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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미, 「신자유주의 경제하의 생활정치와 여성운동」

by parallax view 2011. 5. 7.

지난 4월 28일부터 30일까지 있었던 여성회의에서 김현미 선생님이 발제한 글을 올린다. 국가 페미니즘의 쇠퇴와 마켓 페미니즘의 침투라고 이분화할 수만은 없지만, 현재 신자유주의-토건 국가-이명박 정부라는 복잡다단한 레이어 속에서 여성주의자와 여성운동이 어떻게 살 길을 모색할 수 있을지, 더 나아가 어떻게 또다시 공공성을 이야기할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된다. 생각해 보면, 여성주의는 언제나 공공성을 말해오지 않았던가 싶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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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여성회의- 세션 1. 2011년, 여성운동의 안부를 묻다

신자유주의 경제하의 생활정치와 여성운동

김현미 (연세대 문화인류학과/대학원 문화학협동과정)

1. 문제제기

최근 30년간 세계 경제를 주도해 왔던 신자유주의는 시장주도의 정치 경제적 질서를 만들며 모든 인간을 '노동자'나 '생활인'의 위치에서 '소비자'나 '투자자'의 위치로 바꿔나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신자유주의는 인간의 생존과 좋은 삶을 위협하는 실업, 빈곤, 각종 위험에 대처하는 사회적 안전망을 포기하거나 시장에 맡김으로써 '사회'의 의미를 삭제해 버리는 독특한 형태의 자본주의이다. 다양한 국가들이 다양한 버전의 신자유주의적 기획을 채택하고 있지만 자본주의적 질서에 담긴 세계관이 신자유주의라는 점은 공통적이다. 즉, 이익이 있는 부분에만 투자한다는 신자유주의적 논리가 전 사회 영역으로 확장되면서 '공동적 삶'이나 '비시장적 가치'를 약화시키고 자본의 유통을 원활하게 만들고자 각종 규제를 철폐하며 노동을 유연화하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신자유주의적 권위주의는 신자유주의라는 초국적 자산가의 이해, 군사주의, 기독교근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신 보수주의와의 결합을 통해 실현되었다. 놀랍게도 최근 한국에서도 비슷한 '권력의 연합'을 직시하고 있다. Henry Giroux는 신자유주의는 젊은 세대와 유색인종, 여성들의 저항을 잠재우고, 고등교육을 민영화(기업화)하며, 공립학교를 공격하고, 공공생활을 군사화한다는 특징을 지닌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인 정치는 "개인주의, 선택, 시장사회, 자유방임, 경제에 대한 최소한의 정부개입"과 "비경제적인 영역에서 강력한 정부, 사회적 권위주의, 훈육된 사회, 위계와 복종, 민족의 예찬" 등의 요소들을 조합하여 도출된다. 국가 기능의 많은 부분이 민영화를 통해 기업으로 이전되어 국민의 대다수를 소비자로 변화시킨 상황에서 국가의 정당성과 통치성은 '안보'에 대한 강조나 글로벌 스탠딩과 책무 등 사회적 퍼포먼스와 같은 문화적 이데올로기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 국가가 시장에 많은 것을 양도한 신자유주의 하에서 자기 정당성과 권위를 확보하는 방법은 국가가 가진 문화적 이데올로기 기능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신자유주의 시대 개인이 가진 경제적 불안이나 사회적 지위 하락에 대한 공포 등의 상태에 있는 국민들의 삶에 장기적인 안목과 기획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이들의 '안보'를 보장해주는 자의 입장을 취하게 된다. 바우먼은 신자유주의 기획 하에서 안전과 안보의 개념이 주된 관심사가 되고 있으며, 국내 출신 하층계급과 불법이민자들을 잠재적인 내부의 적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심화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동시에 국가는 선량한 국민을 철저하게 보호하겠노라는 약속을 하며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해나간다. 국가가 복지 정책에서 후퇴할수록 안전과 안보에 대한 문화적 논리는 강화된다. 천안함 사태를 통해 강화되는 안보 논리 또한 이런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

신자유주의 통치 체제는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투쟁하여 만들어 낸 탈냉전, 민주주의, 인권, 시민 사회의 공동체적 아젠다를 위협하면서 우리의 일상을 압박하고 있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이러한 물리적, 경제적, 문화적, 상징적 폭력들 앞에서 시민의 '행위자성'을 요구하는 것 또한 힘든 일이다. 자유권이 위축된 현재는 때로는 이런 아젠다를 공공적 아젠다로 발화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든다. 국가가 휘두르는 공포 조성 전술이 활발하면 정치적으로 혼돈스럽거나 위축된 개인들이 많이 양산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사적인 삶과 공적인 관심사를 연결시켜 낼 수 있는 소통적인 개인의 자발성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런 시대적 맥락은 매우 위협적인 환경이 된다.

최근 한국사회가 경험한 위와 같은 상황은 진보적 여성운동과 페미니즘 진영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전지구적 경제 질서로 잡는데는 신자유주의가 유포한 ‘문화적 규범’이 동의를 얻어냈기 때문이다. 국가의 '사회적' 기능은 후퇴하고 문화 이데올로기적 기능이 강화되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민주주의의 기획을 위해 여성 운동과 페미니즘 진영이 재정치화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신자유주의가 여성을 위계화하고 전통적 젠더 불평등을 삭제해오는 방식은 무엇인가? 국가 페미니즘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시장 페미니즘의 영역을 확장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충분히 급진적인 선택인가? 여성운동과 페미니즘이 개입해왔던 정치적 지형이 변화하는 생활세계의 아젠다를 전면화하고 있는가? 본 발표문은 이런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2. 신자유주의 구조개혁과 여성

1)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과 여성 삶의 질: 신자유주의 경제 개혁의 영향력은 크게 세 가지로 논의되어 왔다. 첫째, '유연화'를 통한 노동시장변화에 따른 여성의 고용불안정이 심화되고 여성이 비공식 부분이나 저임금노동에 집중됨으로써 빈곤화가 심해지고 있다. 둘째로, 정부의 사회 서비스 비용의 지출을 줄임에 따라 여성들이 재생산이나 돌봄 노동에 참여해야 하는 부담이 증가하고 있다. 남편 등 가족 구성원의 실직과 연금 부재에 대한 불안 때문에 여성들의 경제 활동이 증가하고 있지만 돌봄이나 재생산 노동의 부담이 줄어들지 않음으로써 여성들은 과도한 노동을 하고 쉬지 못하는 노동중독의 상황에 놓이게 되어 삶의 질 또한 낮아지고 있다. 자원이 있는 중산층 여성은 시장을 통해 재생산/돌봄 노동을 구매하지만 전반적인 중산층의 위기는 갑작스런 계층 하향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동시에 가족의 실직과 연금 부재를 가족구성원에 대한 의존을 통해 해결하고자하는 '가족주의'가 등장하고 있다.
감정이 귀한 상품이 되는 현재 상황에서 요즘 한국의 중산층 노인들에게 "딸, 특히 결혼 안한 돈 많이 못 버는 딸이 좋아" 와 같은 담론이 노골화되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비정규직 비혼딸이야말로 가난하기 때문에 부모로부터 독립하기 어렵고, 적당히 먹여 살리면서 늙고 병들었을 때 부모가 돌봄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이다. 셋째로, 가족부양을 위한 여성의 경제적 역할 부담이 증가되고 있다. 실업 증가에 따른 가족구성원의 실직, 물가상승, 교육비 상승에 대처하기 위해 가계소득을 만회하기 위한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출이 많아진다. 그러나 경제적 참여를 통한 지위의 상승이나 발언권의 확장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2) 반페미니즘 담론의 전면화: 1980년대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실현시킨 미국과 영국의 사례에서 보듯이, 신자유주의는 신우파 및 보수주의 문화 담론과 연관을 맺으며 서로를 강화시켜 나간다. 레슬리 호가트가 분석한 것처럼 신자유주의와 신우파는 복지정책과 사회보장 지출로 발생된 의존적 문화(dependency culture)를 공격하며, 도덕적 타락이 경제적 퇴보의 원인이라고 비난했다. 이들은 전통적인 핵가족을 방어하며, 국가가 아닌 가족이 더 많은 책임, 특히 젊은이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자유주의와 신우파는 '반페미니즘'을 표방하며 싱글맘을 "복지도둑"이라 매도하고, '여성을 양육을 전담하는 어머니'로만 규정하는' 등 반 성평등적 입장에서 낙태반대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권리'를 주장하는 페미니즘 담론을 약화하려는 사회에 대한 자발적 참여나 '자원봉사'를 강조하는 담론이 강화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 사회에서도 교육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며, 학자금 대여를 확장하거나 무상급식과 낙태를 반대하는 흐름은 이러한 보수주의 이데올로기의 확장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3) "mixed blessing"과 개인화: 신자유주의는 여성 운동이나 여성 권리 향상에 관련하여 '부정적인 영향력'만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신자유주의 개혁과 여성(또는 남성)과의 관계는 "mixed blessing"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신자유주의적 개혁은 새로운 방식의 사회적 배제와 포섭을 만들어나간다. 즉 새로운 영역들에 권위, 정치적 권력, 경제적 자원을 제도적으로 보장해주고, '전통적인 영역'은 약화시켜나간다. 워싱턴 컨센서스를 통해 강조된 '인적자원개발론'은 국가의 경쟁력을 강화해 줄 '인적담론'의 이미지에 들어맞으면 '젠더'를 초월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경제중심주의, 경쟁중심주의가 문화적 관습과 전통의 규제를 무너뜨리기도 한다. 이렇게 신자유주의 개혁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강조함으로써 전통적이고 집단화된 구속이나 범주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다양한 개인과 집단에게 새로운 교육적, 전문적, 재정적 기회들을 열어준다. 이런 점에서 여성 또한 예외가 아니다. 성별 불평등은 오랜 기간 축적해 온 전통과 집단적 피해자화의 결과이기 때문에 자신을 '루저'로 배제되는 자와 같은 부류가 아님을 강조하는 것 또한 중요해졌다. 자신의 정치적, 문화적 행위자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능력주의'가 강조한 '개별성'과 '변별적 역량'을 강조해야 한다. 능력을 통한 주류 사회의 진출이 용이해진 상황에서 여성들의 경쟁력과 경쟁심 또한 강화되고 있다.

3. 여성운동과 페미니즘의 대응 방식

여성운동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패러다임 하에서도 페모크라트의 정부와 부처 내에서의 선전으로 '부상하는 10년'을 보낸 것이 사실이다. UN이나 북경대회이후 글로벌 트렌드가 되었던 국가페미니즘은 정부 내 여성정책기구나 담당자, 예산을 확보하여 여성운동의 아젠다를 국가 정책으로 만들어내는데 크게 기여해왔다. 그러나 여성운동계와 페미니즘 진영은 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 개혁이 전면화된 이명박 정부 하에서는 여성정책기구의 현존에도 불구하고 정권이나 정당리더십이 변화되었을 때에는 여성주의 아젠다를 발화조차 할 수 없다는 현실을 고통스럽게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국가페미니즘의 '종언'이나 '후퇴'를 선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여성운동과 페미니즘이 생활세계의 성불평등 문제를 국가의 정책 아젠다로 구성해낼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즉 여성의 시민권을 확장하고자 하는 '투쟁'과 협상의 '대상'이 전면 조정되어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여성운동과 페미니즘이 행사해왔던 '정치적 도구들'이 국가의 관심도 이끌어내지 못하고, 쇠진되거나 작동되지 않게 된 현재의 상황에서 여성운동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다른 시민운동과 연대를 모색하기도 하지만 아젠다를 위해 '경쟁'을 해야 할 압력에 놓이게 된 '경쟁적 민주주의'장에서 어떻게 여성운동과 페미니즘은 '두각'을 나타낼 수 있을까? 이런 변화에 대한 반응과 대응은 복잡하고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한편으로 신자유주의 개혁을 '위협'으로 인지하지만 동시에 운동내부의 개인이나 조직을 신자유주의 가버넌스에 '최적화'시키는 과정이 동시적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1) 진보진영과 맥을 같이하며 머물기: 여성운동이 취하는 대응의 대표적인 예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비판하고 '사회정책'을 보완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추구하는 여타의 진보진영 운동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변화가 만들어내는 각종 '불안들'과 징후들을 관리하며 노동, 복지, 생태, 건강 등 사회권을 확장하는 노력에 동참하는 것이 그것이다. 최근 진보진영에서 논의되는 '역동적 복지국가론'이나 보편적복지 등에 여성운동 진영이 참여하는 것이다 사회권 논의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또한 이런 맥락이다. 그러나 경쟁적 민주주의 장에서 여성운동과 페미니즘이 어떤 구성적 리더십을 만들어내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하다. 여성들이 놓인 다양한 물적 기반에 대한 깊은 고민이나 '참여가능한' 구체적인 아젠다 개발을 통해 쾌락을 동반한 날카로운 정치적 투쟁에 대한 '감'은 체감되지 않고 있다.

한편으로 다양한 정체성에 기반한 급진적인 인쟁투쟁(LGBT, 이주자운동), 초국적 페미니즘 등 국가와 연루되지 않고, 국가에 압력을 가하거나, 국가를 초월하고 냉소하는 여성운동들의 등장은 더 이상 단일한 집합체에 의한 여성운동은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일깨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변화를 여성운동과 페미니즘의 다중적, 확장적 변화로 이해하기보다 '분열적' '이질적' 단계로 불편해하는 흐름 또한 존재한다. 여성운동과 페미니즘이 "전략적으로 행동하는 능력을 위협하는 이질성"으로 생각하는 진영과 여성운동과 페미니즘의 국가 의존성을 탈피하기 위한 "필요불가피하고 건강한 역동성"으로 보는 진영 간의 긴장이 존재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2) 모방과 연루: 수비르 신하는 신자유주의가 표면상으로는 국가를 후퇴시키고 그 기능들을 시장에 재분배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만 시민사회를 '개조'하는데 있어서도 새로운 통치 기술을 발휘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신자유주의적 정부나 글로벌 사회가 시민사회를 개조하는 과정은 한편으로 시민사회를 NGO와 동일시하고 이들에게 막대한 발전기금을 지출하고 정책을 입안하거나 이행하는데 있어서 이들을 합류시키는 '포함'의 논리를 적용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적대적인 시민사회의 형태들을 제한하고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이들 행위의 '불법성'을 강조하고 선언하는 것이다. 촛불시위에 참여한 여성단체들에 대한 처벌이 바로 그것이다.

최근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가버넌스' 개념은 국가-시민사회-기업 등간의 유연화된 소통과 조정의 네트워크를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국가와 기업이 행사하는 권력을 은폐하는데 기여하기도 한다. 신자유주의 가치관을 내재화된 용어나 기업뿐만 아니라 복지, 교육, 지방자치, 심지어 NGO나 NPO의 운동 방식마저도 '효율성 극대화"를 목표로 재조직되고 있다. 대학의 각종 회의나, 공무원, 기업, 시민단체, 여성운동단체 등의 회의에서 사용하는 용어가 '동질화'되고 있다는 측면에 주목해야 한다. '돈'을 통한 지배를 이뤄내는 신자유주의 국가에서 대학을 비롯한 교육기관, 시민단체, 복지기관 등에서 '가버넌스', '선택과 집중,' '평가', '투명성' 등의 용어는 보수, 진보 진영 상관없이 동질적으로 사용하는 언어가 되고 있다.

신자유주의 국가는 시민사회를 사회적 서비스 담당자의 기능으로 가치 하향화시키는데 성공해가고 있다. 국가가 시민단체를 관리하는 방식은 즉, 책무, 감사, 예산 등에 대한 '평가'체제를 도입하여 전 시민사회의 회계감사화('audit')를 이뤄낸 것이며 이는 신자유주의 국가 가버넌스의 특징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와 기업은 시민사회에게 '증거에 근거를 둔 정책 개발'을 요청한다. 즉, 증거에 근거를 둔 정책개발을 요구하는 것은 시민 운동계가 더 이상 의견이나 철학을 내세우는 점진주의적 입장을 갖기 보다는 '투명성'과 편의성을 보장하는 서비스 기관으로 변화하기를 요청한다. 시민사회는 정치적 의견을 내세우는 것보다 펀딩의 투명한 관리와 집행을 통해 증거를 통해 문제가 있다고 주장된 '대상 그룹'이나 '위험그룹'에 서비스를 제공하면 '좋은 가버넌스'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정부는 이 같은 방식으로 사회운동권을 후원-수혜자의 관계로 만들면서 분할 지배한다.

모든 조직을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으로 재조직한다는 것은 단순한 조직 개편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 행위자들의 사고, 행동양식, 가치관을 급진적으로 변화시킨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조직 구성원사이에 '개혁'의 의지를 실천하는 리더들(주로 상층부)과 급진적 평등주의를 이상화하며 시민운동계에 진입한 젊은 활동가들 사이에 '갈등'이나 소통의 부재 또한 일어난다. 생존을 위한 효율과 최적화라는 말이 의미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개혁의 대상을 종종 조직 '내부'에서 찾는 경향이 강하다. 운동단체나 페미니즘 진영에서 가장 즐겨 사용하는 단어였던 '헌신'과 '열정'이 동원되기도 하는 동시에, 능력주의가 관리의 언어로 들어오게 된다. 즉, 역량 강화, 열망, 경쟁을 강조하는 능력주의와 차별적인 보상체제의 도입 등을 통해 내부를 관리하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이다.
 기업에 대한 시민사회의 개입이 증가하고 (사회적 책임), 정부의 평가와 감사기능이 확대(새로운 가버넌스)됨으로써 여성운동을 비롯한 시민사회는 이에 응답하며 자기 경영과 가기 감시을 내재화한다. 단체는 자체 평가의 기준을 만들고 내부를 관리하고 감시하는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 (발표자 같은) 페미니스트 학자나 지식인들 또한 정부와 시민단체의 '평가'체제를 공고히 하는 많은 사업에 연루되어 지쳐가면서 정치적 '애착'의 대상을 잃어가고 있다.

3) 정치의 '소비'와 아젠다의 '연성화'

Kantola와 Squires는 마켓페미니즘(market feminism)이라는 용어를 통해 여성운동이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해 정치적 현장을 시장으로 옮겨가는 것을 상황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영국의 Women's Aid가 바디샵(Body Shop)을 파트너 삼아 여성에 대한 폭력을 없애는 운동을 벌여나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최근 기업도 여성 소비자를 의식하고 기업의 사회적 책무의 일환으로 자사 제품이나 홍보에 '여성친화적' '성평등을 위한 실천'등의 문구를 넣어 소비를 촉진한다. 서울시의 '여행' 프로젝트 또한 정치를 사적인 편의를 위한 체험과 소비의 장으로 이동시키는 사례이다. 정치의 실종으로 후원금을 모으기 어려운 여성단체들은 사회적 기업이라는 장으로 이동하며 시장과 사회적 운동을 연결시키는 작업을 벌이며, 카페나 가게를 통해 소위 대중과의 '접촉'지대를 늘려나가고 있다. 게르하르트 슐체는 '체험사회'라는 개념을 통해 후기 근대의 개인들이 체험지향적 생활양식을 통해 '아름답고, 재미있고, 주관적으로 보람 있다고 느껴지는 삶을' 만들어가고자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체험지향적이니 사회에서는 소비자 정체성을 가진 개인들에게 모든 것을 체험가능한 영역이나 장소로 만들어주어야 하기 때문에 시장의 중요성 또한 증대된다. 체험 서비스를 받을 준비가 된 여성들 또한 체험적 소비의 방식으로 사회적 운동에 참여하여 보람된 삶을 만들고 싶어 한다.
이 때문에 여성운동이나 여성단체들은 공정무역, 생태, 환경, 글로벌 연대의 정치를 '체험'하게 하는 사업을 만들어가며 변신을 시도한다. 마켓페미니즘에 대해 어떠한 가치 판단을 내려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유보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내는 여성 억압이 가속화됨에도 집단적 대응 운동의 '동력'이 왜 나오지 않을까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고민을 해야 한다. 사실 한국 사회의 여성들은 매우 '정치화‘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의 정치성이 전통적 성차별에 대한 공동 대응의 형식과는 매우 거리가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대학의 총학생회의 80%가 여학생이지만 이들은 여성의 권리, 여성 관련한 아젠다를 위해 연합하지 않는다. 이들의 리더십은 도농 직거래 추진을 위한 생태운동이나 환경운동,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근거 없이) 모방한 자원봉사, 장애인과 성적소수자에 대한 감수성 함양 등에 집중된다. 대학에 들어 온 많은 젊은이들의 삶은 시간별, 단계별, 장단기목적별로 세세히 구획되고 실행된 프로젝트화된 삶이었고, 또한 부모, 학원, 학교, 사회단체나 봉사 단체, 해외 인턴십 등을 통한 경험의 다양한 이동을 통해 컨설턴트식 삶에 익숙해지고 있다. 사회 참여의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창의성을 추구하고 이것을 자신의 개별적 역량으로 보상받기 원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준비된 여성들에게 더 두드러진 특징이다. 정치의 연성화가 여성운동의 '대중화'에 진실로 기여하는가?

4. 맺음말

신자유주의적 권위주의가 전면화되며 정치적 현장은 맹목적이고 무자비한 우파적 공세들로 가득 차고, 이에 대한 대응은 여전히 '선거'를 통한 정국 전환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질문은 신자유주의하의 구조 개혁 속에서 집단적으로 '피해'를 보고 있는 여성들은 왜 공동적인 대응을 하지 않고 실용적이고 개별적인 차원에서 자신의 삶을 관리하고자 하는가이다. 돈에 대한 거리낌 없는 욕망이 공공연히 표출되고 여성이 자신을 '투자자'나 '소비자'로 인식하며 재테크의 기술을 학습하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 시장에 뛰어드는 상황에서 즉각적 경제적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사회 운동의 비전을 갖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IMF 이후 복지제도와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를 개인들 스스로가 메워야 하는 현실을 자각하게 되면서 개인은 불예측적인 미래를 위해 금융 소비자로 편입되면서 개별적 생존 전략에 익숙해지고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나쁜 가버넌스'임이 입증된 현재 삶의 불안정성과 피폐함과 싸우기 위해 위계화되고 범주화된 인간의 삶들 사이에서 ‘공감’ 능력을 회복하고 민주사회를 위한 새로운 기획에 여성주의는 어떤 기여를 해야 하는가? 모든 개인의 삶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상상력을 갖는 것은 대안적이고 대항적인 정치적 상상력을 구상하고자 할 때 무엇보다 중요하다. 세넷의 지적처럼 “생존 가능한 삶의 가능성을 증가시키는데 기여하는” 정치적 행위를 만들어내기 위해 여성운동과 페미니즘의 새로운 기획력이 절실히 요청된다. 시장이 사람들의 삶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가치 전환을 위한 탐색이 필요한 시대이다. 1980년대 멕시코의 여성운동이 실질적인 이해에 관한 이슈들, 즉, 공공서비스-전기, 하수도, 식품-와 임금과 신용 획득 등의 노력으로 이어져 대중적 참여를 가능하게 했던 예들 또한 상기되어야 한다.

사회적으로 현존하고 있는 분배의 위기, 자신을 철저한 ‘물질성’의 현존체로 인지하고 경험하고 있는 ‘대중’, 싸이월드의 일촌/방문객이나 사회적 네트워크 매체들의 팔로어(follower)에 의해 고무되는 나르시시즘적인 방식의 정치적 연대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애착의 대상은 더 이상 사회적 민주주의가 아닐 수 있다. 자본주의의 현란하고 화려한 기술성에 우리의 삶은 이미 깊이 연루되어 있고, 새로운 테크널로지를 소비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사람의 언어는 첨단적이지 못해 청취할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시대이다.  그러나 수질오염에 대한 해결책으로 생수를 사먹는 것을 유일한 대안으로 제시하는 신자유주의 정치학은 공공 영역을 시장 영역으로 변형시키고 공공재의 획득을 '구매력'으로 교환하게 하는 어처구니없는 정치를 일상화시키고 있다. 여성운동과 페미니즘의 '정치성'은 어떻게 드러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진다.

사진 출처 : 김포이주여성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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