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 긴 겨울의 通路를 비집고 걸어갔다
기형도
그리하여
겨울이다. 자네가 바라던 대로
하늘에는 온통 먹물처럼 꿈꾼 흔적뿐이다.
눈[雪]의 실밥이 흩어지는 空中 한가운데서
타다 만 휴지처럼 한 무더기 죽은 새[鳥]들이 떨어져내리고
마을 한가운데에선
간혹씩 몇 발 처연한 총성이 울리었다
아무도 豫言하려 하지 않는 時間은
밤새 世上의 낮은 울타리를 타넘어 추운 벌판을 홀로 뒹굴다가
몽환의 빗질로 우리의 차가운 이마를 쓰다듬고
저 혼자 우리의 記憶 속에서 달아났다.
알 수 있을까, 자네
꿈꾸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굳게 빗장을 건 얼음판 위에서 조용한 깃발이 되어
둥둥 떠올라 타오르다 사라지는 몇 장 불의 냉각을
오, 또 하나의 긴 거리, 가스燈 희미한 내 기억의 迷路를
날아다니는 외투 하나만큼의 허전함.
겨울 오후 3시, 그 휘청휘청한 권태의 비탈
텅 빈 서랍 속에 빛나는 압정 한 개
춥죠? 음. …… 춥군. 그런데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그리하여 水平으로 쓰러지는 한 컵의 물. 한 컵 빛의 悲鳴
잠자는 물. 그 빛나는 죽음. 얼음의 꿈. 토막토막 끊어지는 秒針.
우리는 世上과 타협하지 않은 최후의 무리였다.
모든 꿈이 소멸된 지상에 홀로 남아
두꺼운 외투와 커피 한 잔으로
겨울을 정복하는 꿈을 꾼다.
춥죠? 음. …… 춥군. 그런데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거리를 한 개 끈으로 뛰어다닐 때의 해질 무렵
건물마다 새파랗게 빛나는 면도 자국.
이것이 희망인가 절망일 건가 불빛 속에서
낮게낮게 솟아오르는 중얼거림
깨지 못하는 꿈은 꿈이 아니다. 미리 깨어 있는 꿈은 悲劇이다.
鋪道 위에 고딕으로 반사되는 발자국마다
살아 있다. 살아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희미한 음향을
듣는가 자네 아직도 꿈꾸며
우리는 그 긴 겨울의 通路를 비집고 걸어갔다.
- 『기형도 전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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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하고 괴로운 마음에 무심코 곁의 기형도 전집을 펼쳤다. 우울한 날에는 시가 더 잘 읽힌다. 부정확하고 비음섞인 발음으로 한 자 한 자 더듬는다.
우리는 그 긴 겨울의 통로를 비집고 걸어갔다. 오늘은, 아니 어제는, 아니 내일도 우리는 없이 나는, 이 긴 겨울의 통로를 비집고 걸어간다.
이번 겨울은 각별히 춥고 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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