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칭생략) 1. 한윤형이 <정치평론에서의 초월적 논증>에서 염두에 둔 딜레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언'은 불가피하지 않느냐"인 것 같다. 여기에 칸트가 어설프게 개입되는 바람에 개념의 혼동이 온 게 아닐까(이 지적이야말로 어설픈지 모르겠다). 김우재는 초월적 논증과 과학적 논증 사이의 대립 구도는 순진할 뿐 아니라 무지의 소산이라고 비판하는 듯한데, 이 지점에 대해서는 김우재가 옳다(과학은 세계 '외부'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윤형은 여기에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2. 한윤형이 논객 내지 문사의 한계를 짚는 이유는 정치평론이란 언제나 실천의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의견의 과잉대표 현상과, 의견-실천의 괴리 내지는 연결점 부재에 있다. 여기서 김우재는 지적·실천적 도약으로서의 '초월'transcendent을 말하는 걸테고. 세계의 불확실성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성을 찾아 움직여야 한다는 주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섬세하고 민주적인 정치평론의 가능성을 짚는 것만큼이나 '상식적'이다. 두 사람은 각자의 '상식'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3. 내가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선언'으로서의 초월적 논증이다. 한윤형이 박노자 등의 사례를 들면서 비약의 문제를 제기했을 때, 모든 선언은 가능성이 이미 실현되었다고 주장하는 데서 시작한다는 것을 떠올린다(예를 들어, 기본소득!). 그러므로 여기서 더 도드라지는 사람들(동시에 논쟁의 행간 속에 숨어있는 사람들)은 마키아벨리와 맑스와 레닌 그리고 그람시가 아닌가 싶다. 물론 이건 내가 '보고 싶어하는 지점'이기도 하다는 걸 고백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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