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그냥 까먹고 있었던 이야기나 끄적끄적.
1. 지난 주 화요일에 <아바타>를 봤다. 숱하게 들려오는 소문에 귀가 솔깃해지는 것도 잠시, 그 동안 매주 목요일부터 매진 러시인 3D 아이맥스를 도저히 볼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개봉한 지도 세 달이나 지났고, 마침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시작했기 때문에 용산과 왕십리 CGV에서는 <아바타> 3D 아이맥스판을 접은 모양이다. 그래서 일산까지 갔다. 내러티브라던가 그런 건 전혀 기대하지 않았고, 3D 기술력에 어떤 환상도 없었으므로 기대하지 않은 만큼 즐길 수 있었다. 솔직히 한 번 더 보고 싶다. 4D도 괜찮다는데. 그런데 너무 비싸다. 아이맥스도 비싼데(16000원), 4D는 무려 18000원이라니!
2. 그리고 그 주 금요일엔 뮤지컬 <김종욱 찾기>를 봤다. 초대권이 있는 친구 덕분이다. 블로그에 올리지 않았지만 작년에도 운좋게 뮤지컬 몇 개를 볼 수 있었는데, 대학로 소극장 뮤지컬들은 그만의 매력이 있다는 것 같다. 서너 명 정도 출연하는 작은 규모에 걸맞게 누구 하나는 반드시 일인 다역을 맡는다는 것도 특징(그리고 이 사람은 거의 반드시 넉살좋고 뺀질뺀질한 캐릭터이고!). <김종욱 찾기>야 몇 년 공연하면서 퍽 유명해진 소극일텐데, 이런 류의 소극을 보면서 느끼는 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을 내러티브가 아니라 캐릭터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또 무대 디자인을 보면 좁은 공간을 가능한 효율적으로 활용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것도 흥미롭고. <김종욱 찾기>를 보고 나니까 작년에 본 이자람의 <사천가>(leopord, <이자람의 소리극 <사천가>>)를 또 보고 싶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올라오더라는.
3. 피에르 부르디외의 <파스칼적 명상>을 겨우 떼었다. 거의 다 읽은 상태에서 마무리를 미뤘는데, 아무리 역자도 번역이 무척 버거웠음을 고백했다지만 그래도 이 앞뒤 안 맞는 번역은 좀 너무한 거 아닌가. (...) 개념보다 문장 자체를 이해하는 게 힘들었다. 부지런하지 못한 독서 습관을 우선 탓해야 할 일이지만, 이 책 한 권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한 것 같다. 어쨌거나 부르디외는 '몸'을 떠난 온갖 사유의 엘리트주의적이고 독자적인 영역 구축을 매섭게 공격하면서, 지식인들을 사유가 실제로 발생하는 시간과 공간(즉, 현실)으로 끌어오는 듯하다. 부르디외는 자신의 작업이(제목부터 그렇지만) 파스칼에 기반하고 있다고 선언하는데, 파스칼의 <팡세>는 어떤지 궁금하다(파스칼 역시 너무 유명하기 때문에 도리어 곧잘 무시되곤 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한편, 랑시에르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Hendrix, <지금 평등을 말하기 위한 정치철학>, 로쟈, <"랑시에르 선생님, 욕보십니다">), 부르디외도 그렇고 프랑스 학계에서 '이주자' 문제(특히 프랑스에서는 알제리계, 독일에서는 터키계 등)는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수준이 아닐까 싶다. 이주자의 존재는 노동시장의 핵심 문제로 자리잡으면서 기존 노동운동의 한계를 환기하고, 더 나아가 주거권을 비롯한 생존권 문제로 이어지며,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시민' 내지는 '지구적 시민권'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는 용암으로 유럽 사회의 얇은 토양 밑을 흐르고 있는 게 아닐까.
4. 김예슬의 자퇴와 관련해서 이글루만이 아니라 인터넷 커뮤니티 곳곳이 시끄러웠는데, 나는 "진정한 급진적 운동은 개인의 내밀한 선택들을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선언'으로 옮기는 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박가분의 말에 동의한다(박가분, <대학 자퇴 선언서>). 그러나 그 이전에, 그러니까 '선언'이 아직 논란의 중심으로 이동하기 이전에 나는 그녀의 선언 역시 운동사회와 학벌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벌어지는 '안전한' 행위라고 냉소하고 있었다는 걸 고백해야겠다. 한 마디로, 나 역시 그녀의 '선언'에서 '계산'을 읽었던 것이다. 내가 그녀의 행위를 옹호하겠다고 나서지 못한 이유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 행위는 계산이라고는 도통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차라리 그건 절망적인 투신이다. 대한민국 유수의 학벌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사실 학벌 빼고는 자신에게 무엇이 남는지 알지 못한 어떤 혼의 외침이다. 부러 과장해서 말하지 않더라도, 그녀의 선택은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물론 운동사회 안에서 자기의 자리를 찾을 수도 있으리라. 여기서 운동권에 대한 고질적인 비난과 혐오감이 개입하는데, 도대체, 운동권이 뭐 어떻단 말인가? 그녀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운동권의 협소함과 무식함을 비웃는 도중에 스스로 자신의 협소와 무지를 고백하는 건 아닌가(이건 나도 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김예슬이 잘 살았으면 좋겠다. 아니, 잘 살아야한다. 그녀야말로 자신의 '선언'에 구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유를 위해 대학은 거부할 수 있어도 '선언'까지 거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남은 길은 역시, 잘 사는 수밖에 없다. 나는 살아있다!고 온 몸으로 외치는 것. 그런 점에서, 그녀가 잘 됐으면 좋겠다.
1. 지난 주 화요일에 <아바타>를 봤다. 숱하게 들려오는 소문에 귀가 솔깃해지는 것도 잠시, 그 동안 매주 목요일부터 매진 러시인 3D 아이맥스를 도저히 볼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개봉한 지도 세 달이나 지났고, 마침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시작했기 때문에 용산과 왕십리 CGV에서는 <아바타> 3D 아이맥스판을 접은 모양이다. 그래서 일산까지 갔다. 내러티브라던가 그런 건 전혀 기대하지 않았고, 3D 기술력에 어떤 환상도 없었으므로 기대하지 않은 만큼 즐길 수 있었다. 솔직히 한 번 더 보고 싶다. 4D도 괜찮다는데. 그런데 너무 비싸다. 아이맥스도 비싼데(16000원), 4D는 무려 18000원이라니!
2. 그리고 그 주 금요일엔 뮤지컬 <김종욱 찾기>를 봤다. 초대권이 있는 친구 덕분이다. 블로그에 올리지 않았지만 작년에도 운좋게 뮤지컬 몇 개를 볼 수 있었는데, 대학로 소극장 뮤지컬들은 그만의 매력이 있다는 것 같다. 서너 명 정도 출연하는 작은 규모에 걸맞게 누구 하나는 반드시 일인 다역을 맡는다는 것도 특징(그리고 이 사람은 거의 반드시 넉살좋고 뺀질뺀질한 캐릭터이고!). <김종욱 찾기>야 몇 년 공연하면서 퍽 유명해진 소극일텐데, 이런 류의 소극을 보면서 느끼는 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을 내러티브가 아니라 캐릭터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또 무대 디자인을 보면 좁은 공간을 가능한 효율적으로 활용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것도 흥미롭고. <김종욱 찾기>를 보고 나니까 작년에 본 이자람의 <사천가>(leopord, <이자람의 소리극 <사천가>>)를 또 보고 싶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올라오더라는.
3. 피에르 부르디외의 <파스칼적 명상>을 겨우 떼었다. 거의 다 읽은 상태에서 마무리를 미뤘는데, 아무리 역자도 번역이 무척 버거웠음을 고백했다지만 그래도 이 앞뒤 안 맞는 번역은 좀 너무한 거 아닌가. (...) 개념보다 문장 자체를 이해하는 게 힘들었다. 부지런하지 못한 독서 습관을 우선 탓해야 할 일이지만, 이 책 한 권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한 것 같다. 어쨌거나 부르디외는 '몸'을 떠난 온갖 사유의 엘리트주의적이고 독자적인 영역 구축을 매섭게 공격하면서, 지식인들을 사유가 실제로 발생하는 시간과 공간(즉, 현실)으로 끌어오는 듯하다. 부르디외는 자신의 작업이(제목부터 그렇지만) 파스칼에 기반하고 있다고 선언하는데, 파스칼의 <팡세>는 어떤지 궁금하다(파스칼 역시 너무 유명하기 때문에 도리어 곧잘 무시되곤 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한편, 랑시에르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Hendrix, <지금 평등을 말하기 위한 정치철학>, 로쟈, <"랑시에르 선생님, 욕보십니다">), 부르디외도 그렇고 프랑스 학계에서 '이주자' 문제(특히 프랑스에서는 알제리계, 독일에서는 터키계 등)는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수준이 아닐까 싶다. 이주자의 존재는 노동시장의 핵심 문제로 자리잡으면서 기존 노동운동의 한계를 환기하고, 더 나아가 주거권을 비롯한 생존권 문제로 이어지며,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시민' 내지는 '지구적 시민권'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는 용암으로 유럽 사회의 얇은 토양 밑을 흐르고 있는 게 아닐까.
4. 김예슬의 자퇴와 관련해서 이글루만이 아니라 인터넷 커뮤니티 곳곳이 시끄러웠는데, 나는 "진정한 급진적 운동은 개인의 내밀한 선택들을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선언'으로 옮기는 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박가분의 말에 동의한다(박가분, <대학 자퇴 선언서>). 그러나 그 이전에, 그러니까 '선언'이 아직 논란의 중심으로 이동하기 이전에 나는 그녀의 선언 역시 운동사회와 학벌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벌어지는 '안전한' 행위라고 냉소하고 있었다는 걸 고백해야겠다. 한 마디로, 나 역시 그녀의 '선언'에서 '계산'을 읽었던 것이다. 내가 그녀의 행위를 옹호하겠다고 나서지 못한 이유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 행위는 계산이라고는 도통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차라리 그건 절망적인 투신이다. 대한민국 유수의 학벌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사실 학벌 빼고는 자신에게 무엇이 남는지 알지 못한 어떤 혼의 외침이다. 부러 과장해서 말하지 않더라도, 그녀의 선택은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물론 운동사회 안에서 자기의 자리를 찾을 수도 있으리라. 여기서 운동권에 대한 고질적인 비난과 혐오감이 개입하는데, 도대체, 운동권이 뭐 어떻단 말인가? 그녀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운동권의 협소함과 무식함을 비웃는 도중에 스스로 자신의 협소와 무지를 고백하는 건 아닌가(이건 나도 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김예슬이 잘 살았으면 좋겠다. 아니, 잘 살아야한다. 그녀야말로 자신의 '선언'에 구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유를 위해 대학은 거부할 수 있어도 '선언'까지 거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남은 길은 역시, 잘 사는 수밖에 없다. 나는 살아있다!고 온 몸으로 외치는 것. 그런 점에서, 그녀가 잘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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