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좋은 기회를 만나 소리극 <2009 사천가>를 보게 되었다. 마침 또 첫 공연이다. 이자람 외에도 두 명의 소리꾼이 주연인데, 첫 날이라 그런지 이자람이 무대 위에 올랐다. 나는 판소리에 전혀 문외한이고, '아마도이자람밴드'의 이자람 밖에 알지 못해 이렇게 소리를 내는 이자람이 무척이나 생경하다.
극의 내용은 포스터에 나와있듯 브레히트의 <사천의 선인>을 번안한 것이다. 항상 인내만을 강요하는 물신(物神)들과, 착하게 살고 싶은 사람으로 하여금 도리어 악행을 저지르도록 하는 세상의 역설이 극의 긴장을 붇돋운다. 줄거리 자체는 요즘에 와선 그닥 새로울 것이 없고, 중간에 삽입된 이명박 얘기(물론 주어는 생략)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비판은 민초들의 한을 먹고 자라온 판소리의 태생을 다시금 떠올리게 했다.
해학도 슬픔도 다 좋았는데, 개인적으로 인상깊었던 것은 두 가지. 하나는 이자람의 풍부한 연기와 입담. 그저 몇 마디 말로 상황을 얘기하고 그 나머지는 일인 다역 원맨쇼인데, 각기 다른 캐릭터를 폭넓게 소화하는 힘이 있다. 너무 착해 늘 당하기만 하는 순덕이었다가, 곧바로 순덕을 등쳐먹으려는 못된 아줌마가 되기도 하고, 순덕의 매몰찬 사촌오빠 재수로 변신한다. 목소리도 표정도 몸짓도 너무 좋다. 무엇보다 구수하면서도 다채로운 입담이 참 좋다.
또 하나는 소리와 빛을 풍부하게 활용하는 무대효과. 좁은 소극장에서 소리꾼의 창과 함께 울리는 베이스라인과, 캐릭터와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비추는 조명, 간간히 타락한 신들로 출연해 몸짓연기를 하는 무용수들의 그림자가 굉장히 잘 어울렸다. 판소리가 어떻게 현대화되는지를 잘 보여주기도 하고.
무한경쟁시대. 실용의 시대.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물신주의를 풍자하는 브레히트 희곡은 이렇게 현재형의 질문으로 관객에게 다가왔다. 실험적이다. 전위적이다. 수많은 미사여구를 떠나, 그저 한 편의 즐거운 현대 판소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의미를 끄집어 내는 건 그 다음일 게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의 이자람이 퍽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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