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map와 지도guidance 둘 다. 아니, 지도편달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정말로, 지도가, 맵이 필요하다. 산만하고 난잡하게 자라난 지식을 가지치고 군데군데 자란 잡초를 매면서 '나의 길'을 가야할 필요를 느낀다. 그래서 많이들 대학원에 가는 걸테지. "과연 이게 정말 나의 길일까" 의문을 품으면서. 인생의 레일이란 무섭고 종종 돌이킬 수 없는 것이어서, "좋은 경험이었다"고 자위할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가까운 친구들 중에 석사의 길을 가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대부분 삶의 필연성에 이끌려 취직을 한다. 나 또한 여기서 새삼 대학원에 진학할 생각은 없다. 밥벌이를 하면서도 '나의 앎'(그것은 진정한 '잉여'이기도 하다.)을 추구하고 싶다. 그러려면 일단 부지런해야 한다. 내 앞에 놓여진 앎의 길이 직선이 아니라는 걸 떠올린다. 그것은 사방에 흩어져 있고, 구불구불하며, 그 끄트머리엔 검은 숲이 있다. 한 마디로, 미지의 세계다. 이 길들은 자체로 네트워크지만, 노드가 불분명해서는 가지로서의 구실을 할 수가 없다. 무엇을 노드로 삼아야 할까.
<전지구적 변환>을 읽으면서, 결국 어떤 '근본'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식의 네트워크를 헤엄쳐 나갈 이정표가 필요했다. 여기서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건, 결국 맑스Marx였다. 수년 전 서점에서 어떤 커플이 가판대에 걸려있던,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였던가 무엇이었던가, 여튼 보통의 책을 펼쳐보다가 내동댕이치듯 던진 말 : "맑스 같은 소리 하고 있네."의 그 맑스 말이다.
맑스에 대해, 굳이 각잡고 읽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종종 생각했다. 그냥 생각의 가지를 뻗어나가는 중에 순간순간 만나면 그걸로 족하다고, 제법 건방지게 생각했다. 근데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매일같이 만나왔던 사람에 대해 생각하다 문득, 나는 그를 '전혀' 모른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있지 않나. 지금 마음이 꼭 그렇다. 맞다. 나는 맑스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공산당 선언>과 <경제학 철학 수고>(내가 읽은 건 강유원 번역이 아닌 옛날 버전이다.)가 내가 만난 맑스의 전부였다. 트윗에서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다른 읽을 것들이 잔뜩 쌓여 있지만(<미국 예외주의>와, <돈 끼호떼> 창비본, 에드가 앨런 포의 <우울과 몽상>, 사라마구의 도시 삼부작 등), <파스칼적 명상>을 마치는 대로 맑스부터 잡아야겠다(<1Q84>는 좀 예외로 하고.). 다시 한 번 환기하지만, 지도가 필요하다. 왜 하필이면 맑스를 지도로 삼느냐 한다면, 어느 곳으로 도주하더라도 항상 맑스의 유령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맑스로 인해 나의 맵을 짜낼 수 있을지, 갭만 커질지는 아직 모르겠다. 변덕스런 마음을 다잡지 못해 또 손을 놓아버릴 수도 있다. 당장의 밥벌이도 급한데 무슨 한량한 짓인가 싶기도 하다. 어찌되었든 시간이 더는 허락하지 않을 게다. 지도가 없다면 급하게 만들기라도 해야할만큼 넉넉치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맑스다. 읽어야겠다.
가까운 친구들 중에 석사의 길을 가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대부분 삶의 필연성에 이끌려 취직을 한다. 나 또한 여기서 새삼 대학원에 진학할 생각은 없다. 밥벌이를 하면서도 '나의 앎'(그것은 진정한 '잉여'이기도 하다.)을 추구하고 싶다. 그러려면 일단 부지런해야 한다. 내 앞에 놓여진 앎의 길이 직선이 아니라는 걸 떠올린다. 그것은 사방에 흩어져 있고, 구불구불하며, 그 끄트머리엔 검은 숲이 있다. 한 마디로, 미지의 세계다. 이 길들은 자체로 네트워크지만, 노드가 불분명해서는 가지로서의 구실을 할 수가 없다. 무엇을 노드로 삼아야 할까.
<전지구적 변환>을 읽으면서, 결국 어떤 '근본'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식의 네트워크를 헤엄쳐 나갈 이정표가 필요했다. 여기서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건, 결국 맑스Marx였다. 수년 전 서점에서 어떤 커플이 가판대에 걸려있던,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였던가 무엇이었던가, 여튼 보통의 책을 펼쳐보다가 내동댕이치듯 던진 말 : "맑스 같은 소리 하고 있네."의 그 맑스 말이다.
맑스에 대해, 굳이 각잡고 읽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종종 생각했다. 그냥 생각의 가지를 뻗어나가는 중에 순간순간 만나면 그걸로 족하다고, 제법 건방지게 생각했다. 근데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매일같이 만나왔던 사람에 대해 생각하다 문득, 나는 그를 '전혀' 모른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있지 않나. 지금 마음이 꼭 그렇다. 맞다. 나는 맑스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공산당 선언>과 <경제학 철학 수고>(내가 읽은 건 강유원 번역이 아닌 옛날 버전이다.)가 내가 만난 맑스의 전부였다. 트윗에서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다른 읽을 것들이 잔뜩 쌓여 있지만(<미국 예외주의>와, <돈 끼호떼> 창비본, 에드가 앨런 포의 <우울과 몽상>, 사라마구의 도시 삼부작 등), <파스칼적 명상>을 마치는 대로 맑스부터 잡아야겠다(<1Q84>는 좀 예외로 하고.). 다시 한 번 환기하지만, 지도가 필요하다. 왜 하필이면 맑스를 지도로 삼느냐 한다면, 어느 곳으로 도주하더라도 항상 맑스의 유령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맑스로 인해 나의 맵을 짜낼 수 있을지, 갭만 커질지는 아직 모르겠다. 변덕스런 마음을 다잡지 못해 또 손을 놓아버릴 수도 있다. 당장의 밥벌이도 급한데 무슨 한량한 짓인가 싶기도 하다. 어찌되었든 시간이 더는 허락하지 않을 게다. 지도가 없다면 급하게 만들기라도 해야할만큼 넉넉치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맑스다.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