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밥춘추 리뷰
(<떡밥춘추> 제1호 리뷰)
0. 리뷰로 들어가기 전에 <떡밥춘추>에 대한 제작위원의 입장 : 耿君(경군), <『떡밥춘추』 그 자체가 떡밥이다>를 먼저 읽어보는 게 좋겠다.
1. <떡밥춘추>(이하 떡춘) 자체가 일종의 떡밥이라는 진술은 제법 시사하는 바가 있다. 한 때 유행하던 레이코프의 프레임 이론을 들이댄다면, 역사 서술이란 이런 점에서 프레임 싸움이다. "사료를 근거로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한다"는 역사학의 기본 명제에서 가장 매력적이면서도 논란이 되는 부분은 바로 재구성에 있다. 역사 서술은 역사를 재구성하는 과정이므로, 이 과정에 어떤 사관(프레임)이 개입되어 있느냐를 가지고 여전히 피 터지게 논쟁하고 있지 않나. 떡춘은 특정 프레임-이것도 일종의 떡밥이다-이 역사를 호도한다고 해서 떡밥을 까는 데 열중하지도, 또 모든 사실관계를 바로잡는 데 진력하고 있지도 않다(그건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여기서 떡춘이 취하는 프레임 전략-"내가 바로 떡밥이다"-는 떡춘 위원들이 비전공자와 전공자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한편, 역사가 주는 부담감을 덜어내려는 나름의 타협인 것 같다.
2. (존칭생략) 특집인 <미지와의 조우>는 '외부'와 접촉한 '내부'의 이야기를 다룬다. rumic71의 <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에는 주로 근대 이전 일본의 미확인비행물체에 대한 목격담이 실려있다. 야스페르츠의 <대박의 꿈 맨해튼>은 가일스 밀턴의 <향료전쟁>을 그대로 인용했다고 고백(?)했으니 패스. 한단인의 <새벽 땅, 첫 빛의 사람들의 사정 : 1621년 3월 21일 밤 메이플라워 호 청교도들을 만나려는 북미 원주민>은 1621년 인디언 부족연맹인 왐파노그와 백인 이주민 간의 회담을 앞두고 인물들 간의 갈등을 소설식으로 풀어냈다.
흥미로운 기사는 경군의 <이천도왕(夷千島王)의 수수께끼>다. <이천도왕의 수수께끼>는 무로마치 막부의 사신과 자칭 '이천도왕'의 사신이 대장경을 구하기 위해 동시에 조선을 찾아왔다는 성종 13년의 기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천도왕'이 실재하는지 하지 않는지에 대한 신료들의 반응에서 당대의 합리성을 가늠해볼 수 있다는 점과, 이천도왕의 실재와 정체-아이누의 유력한 일족인지, 아이누에 대한 영향력을 가진 일본인 가문인지-에 대한 수수께끼, 그리고 조선이 유교 국가였다고는 해도 불교의 영향력이 여전히 남아있었다는 점 등을 읽을 수 있다.
3. rumic71의 <超古代秘史(초고대비사)와 신대문자>, 경군의 <팔린통BINGO! : (2) 내가 헌원이라 이 말인가>, Shaw의 <로마사 : 권 제 2 序紀 下(서기 하)>는 각각 떡춘 1호의 기사에서 이어진다. 제목만 봐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일본의 신대문자는 훈민정음을 그대로 베낀 위작이다. 역사를 과장하고 윤색함으로써, 즉 프레임을 재구성함으로써 (민족)국가의 고유한 역사를 만들 수 있다는 기획은 지극히 근대적인 발상이다(구비전설이 마을 공동체와 고대국가를 연결하는 자연발생적이고 연속적인 과정이라는 것과 정반대로, 근대의 역사는 근대국가의 건설과 함께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단절적이다.). 이 발상은 근대의 중심과 변경을 가리지 않았는데 일본에서 특히 두드러졌다는 것은 제국주의의 발호와 떼어놓을 수 없을 것 같다.
같은 맥락에서 <팔린통BINGO!>는 (경군의 말을 빌자면) "아시아의 숲에서 길을 잃은" 일본 지식계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요컨대 이즈모 씨가 만주로 건너가 고구려-숙신-부여-백제-신라 등의 선조가 되었다는 곤도 세이쿄의 주장은 제국주의와 역사학 사이의 밀월관계와 긴장관계를 동시에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재밌는 건 곤도 세이쿄도 환빠들과 마찬가지로 발음의 유사성으로 민족의 유사성을 유추한다는 점인데(그것도 순전히 일본식 발음으로!), 환빠가 곤도 세이쿄에게서 물려받은 무의식적 유산으로 볼 수도, '역사를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욕망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Shaw의 <로마사>는 결과적으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5 : 율리우스 카이사르 (하)>에서 크게 벗어나질 못했다. 1호의 참신함이 많이 사그라들었다.
4. 自重自愛(자중자애)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 : 고려 현종과 신라계 사이>는 고려의 왕위계승을 둘러싼 갈등을 신라계와 고구려계 사이의 대결로 단순화시키는 견해(이덕일 등)에 대한 비판이다. 당시 고려 국왕들의 계보가 나주계와 충주계로 나뉘어져 있었다는 지적은 고려 왕실 권력의 주된 바탕이 지역 호족과의 관계 유지였다는 국사 교과서의 내용을 다시금 반복하는 것 같다.
한단인의 <유교는 대체 무슨 죄? : 유교 원죄론에 대한 뻔하고도 '사소한' 고찰>은 "유교가 나라를 망쳤다"는 유교 망국론이나 "유교는 전근대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유산이다"라는 속류적 인식에 대한 나름 격한(?) 반응이다. 물론 유교가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위계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시대착오적인 면은 있지만, 기독교는 근대적이기에 살아남았고 유교는 그렇지 못했기에 패배했다는 이분법의 단순함을 지적할 필요는 충분하다. 유교는 당대의 규범을 반영했고, 규범은 그 사회 구성원의 생존과 유지를 위한 필요에서 도출되었다는 점에서(최정규의 <이타적 인간의 출현>에 단적으로 나타나듯이, 이를 진화론 혹은 진화적 게임이론 등으로 접근하려는 연구도 있다.) 나름의 합리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게다.
군주-유학자 사이의 긴장 및 협력관계를 지도자-기술자 관계로 치환한 감이 있고, 유학이 전국시대의 제자백가를 어떻게 포용하고 배제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음에도 한단인의 기사는 나름 생각할 꺼리를 던져주고 있다. 엘리아스의 <문명화과정 1>, 모스의 <증여론>, 고병권의 <화폐, 마법의 사중주>, 김택현의 <서발턴과 역사학 비판> 등의 다양한 책들을 근거로 제시한 것도 흥미롭다. 단, 문장이 길어 주석과 본문 둘 다 너무 많아보이는 게 흠이다.
5. 악희惡戱의 <조선 욕정 감방에 어서 오세요♬>는 청년 시절 김구의 탈옥 일화를 다루고 있다. 가벼운 글 몇 편 있는 것이 기획의 부담도 줄이고 회지를 편하게 즐기도록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다고는 생각하지만, 역사상의 다양한 성 관념과 성 정체성을 현대의 '상식'에 무리하게 끼워맞추고 그에 들어맞지 않는 건 가차없이 비난하는 것만 같아 점점 불편해진다. 진성당거사의 <1766년 1월 26일, 어느 북경 유리창(琉璃廠) 상인의 하루>는 한단인의 <새벽 땅, 첫 빛의 사람들의 사정>처럼 역사의 한 장면을 소설식으로 보여주는데, 주석을 통한 지나친 개입이 이야기를 상상하는 데 꾸준한 걸림돌로 작용한다. 행인1의 <대한민국 육군위생원>은 대한제국군의 의료기관에 대한 사실관계 나열에 그친다.
6. 어느 덧 2호가 나왔다는 점에서 떡춘도 일종의 쉰 떡밥이다. 짧은 분량임에도 역사의 수수께끼를 탐사하는 재미를 맛보게 하는 기사가 있는가 하면, 글쓰기 스타일에 따른 개그나 단순한 가쉽거리에 의존하는 기사도 있었다. 분량 조절이 안 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전체적으로 이번 2호는 주제면에서 독자들이 편하게 다가가기 어렵지 않았나 싶다. 독자 스스로 '이야기'를 쫓아나가는 재미를 알아가게끔 하는 기획이 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떡밥춘추> 제1호 리뷰)
0. 리뷰로 들어가기 전에 <떡밥춘추>에 대한 제작위원의 입장 : 耿君(경군), <『떡밥춘추』 그 자체가 떡밥이다>를 먼저 읽어보는 게 좋겠다.
1. <떡밥춘추>(이하 떡춘) 자체가 일종의 떡밥이라는 진술은 제법 시사하는 바가 있다. 한 때 유행하던 레이코프의 프레임 이론을 들이댄다면, 역사 서술이란 이런 점에서 프레임 싸움이다. "사료를 근거로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한다"는 역사학의 기본 명제에서 가장 매력적이면서도 논란이 되는 부분은 바로 재구성에 있다. 역사 서술은 역사를 재구성하는 과정이므로, 이 과정에 어떤 사관(프레임)이 개입되어 있느냐를 가지고 여전히 피 터지게 논쟁하고 있지 않나. 떡춘은 특정 프레임-이것도 일종의 떡밥이다-이 역사를 호도한다고 해서 떡밥을 까는 데 열중하지도, 또 모든 사실관계를 바로잡는 데 진력하고 있지도 않다(그건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여기서 떡춘이 취하는 프레임 전략-"내가 바로 떡밥이다"-는 떡춘 위원들이 비전공자와 전공자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한편, 역사가 주는 부담감을 덜어내려는 나름의 타협인 것 같다.
2. (존칭생략) 특집인 <미지와의 조우>는 '외부'와 접촉한 '내부'의 이야기를 다룬다. rumic71의 <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에는 주로 근대 이전 일본의 미확인비행물체에 대한 목격담이 실려있다. 야스페르츠의 <대박의 꿈 맨해튼>은 가일스 밀턴의 <향료전쟁>을 그대로 인용했다고 고백(?)했으니 패스. 한단인의 <새벽 땅, 첫 빛의 사람들의 사정 : 1621년 3월 21일 밤 메이플라워 호 청교도들을 만나려는 북미 원주민>은 1621년 인디언 부족연맹인 왐파노그와 백인 이주민 간의 회담을 앞두고 인물들 간의 갈등을 소설식으로 풀어냈다.
흥미로운 기사는 경군의 <이천도왕(夷千島王)의 수수께끼>다. <이천도왕의 수수께끼>는 무로마치 막부의 사신과 자칭 '이천도왕'의 사신이 대장경을 구하기 위해 동시에 조선을 찾아왔다는 성종 13년의 기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천도왕'이 실재하는지 하지 않는지에 대한 신료들의 반응에서 당대의 합리성을 가늠해볼 수 있다는 점과, 이천도왕의 실재와 정체-아이누의 유력한 일족인지, 아이누에 대한 영향력을 가진 일본인 가문인지-에 대한 수수께끼, 그리고 조선이 유교 국가였다고는 해도 불교의 영향력이 여전히 남아있었다는 점 등을 읽을 수 있다.
3. rumic71의 <超古代秘史(초고대비사)와 신대문자>, 경군의 <팔린통BINGO! : (2) 내가 헌원이라 이 말인가>, Shaw의 <로마사 : 권 제 2 序紀 下(서기 하)>는 각각 떡춘 1호의 기사에서 이어진다. 제목만 봐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일본의 신대문자는 훈민정음을 그대로 베낀 위작이다. 역사를 과장하고 윤색함으로써, 즉 프레임을 재구성함으로써 (민족)국가의 고유한 역사를 만들 수 있다는 기획은 지극히 근대적인 발상이다(구비전설이 마을 공동체와 고대국가를 연결하는 자연발생적이고 연속적인 과정이라는 것과 정반대로, 근대의 역사는 근대국가의 건설과 함께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단절적이다.). 이 발상은 근대의 중심과 변경을 가리지 않았는데 일본에서 특히 두드러졌다는 것은 제국주의의 발호와 떼어놓을 수 없을 것 같다.
같은 맥락에서 <팔린통BINGO!>는 (경군의 말을 빌자면) "아시아의 숲에서 길을 잃은" 일본 지식계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요컨대 이즈모 씨가 만주로 건너가 고구려-숙신-부여-백제-신라 등의 선조가 되었다는 곤도 세이쿄의 주장은 제국주의와 역사학 사이의 밀월관계와 긴장관계를 동시에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재밌는 건 곤도 세이쿄도 환빠들과 마찬가지로 발음의 유사성으로 민족의 유사성을 유추한다는 점인데(그것도 순전히 일본식 발음으로!), 환빠가 곤도 세이쿄에게서 물려받은 무의식적 유산으로 볼 수도, '역사를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욕망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Shaw의 <로마사>는 결과적으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5 : 율리우스 카이사르 (하)>에서 크게 벗어나질 못했다. 1호의 참신함이 많이 사그라들었다.
4. 自重自愛(자중자애)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 : 고려 현종과 신라계 사이>는 고려의 왕위계승을 둘러싼 갈등을 신라계와 고구려계 사이의 대결로 단순화시키는 견해(이덕일 등)에 대한 비판이다. 당시 고려 국왕들의 계보가 나주계와 충주계로 나뉘어져 있었다는 지적은 고려 왕실 권력의 주된 바탕이 지역 호족과의 관계 유지였다는 국사 교과서의 내용을 다시금 반복하는 것 같다.
한단인의 <유교는 대체 무슨 죄? : 유교 원죄론에 대한 뻔하고도 '사소한' 고찰>은 "유교가 나라를 망쳤다"는 유교 망국론이나 "유교는 전근대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유산이다"라는 속류적 인식에 대한 나름 격한(?) 반응이다. 물론 유교가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위계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시대착오적인 면은 있지만, 기독교는 근대적이기에 살아남았고 유교는 그렇지 못했기에 패배했다는 이분법의 단순함을 지적할 필요는 충분하다. 유교는 당대의 규범을 반영했고, 규범은 그 사회 구성원의 생존과 유지를 위한 필요에서 도출되었다는 점에서(최정규의 <이타적 인간의 출현>에 단적으로 나타나듯이, 이를 진화론 혹은 진화적 게임이론 등으로 접근하려는 연구도 있다.) 나름의 합리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게다.
군주-유학자 사이의 긴장 및 협력관계를 지도자-기술자 관계로 치환한 감이 있고, 유학이 전국시대의 제자백가를 어떻게 포용하고 배제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음에도 한단인의 기사는 나름 생각할 꺼리를 던져주고 있다. 엘리아스의 <문명화과정 1>, 모스의 <증여론>, 고병권의 <화폐, 마법의 사중주>, 김택현의 <서발턴과 역사학 비판> 등의 다양한 책들을 근거로 제시한 것도 흥미롭다. 단, 문장이 길어 주석과 본문 둘 다 너무 많아보이는 게 흠이다.
5. 악희惡戱의 <조선 욕정 감방에 어서 오세요♬>는 청년 시절 김구의 탈옥 일화를 다루고 있다. 가벼운 글 몇 편 있는 것이 기획의 부담도 줄이고 회지를 편하게 즐기도록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다고는 생각하지만, 역사상의 다양한 성 관념과 성 정체성을 현대의 '상식'에 무리하게 끼워맞추고 그에 들어맞지 않는 건 가차없이 비난하는 것만 같아 점점 불편해진다. 진성당거사의 <1766년 1월 26일, 어느 북경 유리창(琉璃廠) 상인의 하루>는 한단인의 <새벽 땅, 첫 빛의 사람들의 사정>처럼 역사의 한 장면을 소설식으로 보여주는데, 주석을 통한 지나친 개입이 이야기를 상상하는 데 꾸준한 걸림돌로 작용한다. 행인1의 <대한민국 육군위생원>은 대한제국군의 의료기관에 대한 사실관계 나열에 그친다.
6. 어느 덧 2호가 나왔다는 점에서 떡춘도 일종의 쉰 떡밥이다. 짧은 분량임에도 역사의 수수께끼를 탐사하는 재미를 맛보게 하는 기사가 있는가 하면, 글쓰기 스타일에 따른 개그나 단순한 가쉽거리에 의존하는 기사도 있었다. 분량 조절이 안 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전체적으로 이번 2호는 주제면에서 독자들이 편하게 다가가기 어렵지 않았나 싶다. 독자 스스로 '이야기'를 쫓아나가는 재미를 알아가게끔 하는 기획이 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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