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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umfabrik

<파주> : 가장 두려운 것, 익숙함

by parallax view 2009. 11. 27.
* 스포일러 있음.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라는 이정비(里程碑)를 보았다. 그것은 옛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길가의 잡초 속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내 뒷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시작된 대화를 나는 들었다. "앞으로 십 킬로 남았군요." "예, 한 삼십 분 후엔 도착할 겁니다." 그들은 농사관계의 시찰원들인 듯 했다. ..."무진엔 명산물이……뭐 별로 없지요?" 그들은 대화를 계속하고 있었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김승옥, <무진기행>)

영화 <파주>(2009)를 설명할 때 으레 따라오는 것은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이다. 가상의 공간 무진과 마찬가지로 영화 속 파주 또한 안개의 도시다. 속에 품고 있는 것을 감춤으로써 존재를 드러내는 안개는 모호함의 상징이다. 은모(서우)의 3년만의 귀환. 파주는 너무나 많이 바뀌어 있었다. 영화는 도입부에서 소설 <무진기행>을 변주한다. 카메라는 파주 진입을 알리는 고속도로 표지판을 비추고, 은모가 탄 택시 뒷좌석엔 시찰원 대신 나이트클럽 사장(이경영)이 타고 있다. 은모는 재개발, 더 나아가 물리적인 권력의 상징인 나이트클럽을 표정 없는 얼굴로 망연히 바라볼 뿐이다.

중식(이선균)에겐 과거가 있다. 수배 중인 운동권이었고, 선배의 아내를 사랑했으며, 비록 사고였지만 연인의 아이에게 깊은 상처를 입혔다고 자책한다. 선배가 사는 파주를 찾은 그는, 선배가 목회활동을 하는 교회에서 봉고차를 몰고 공부방 선생 일을 시작한다. 그러다 한 여자(심이영)를 만나고 결혼한다. 여자는 곧 사고로 죽고, 중식은 여자의 동생과 함께 살아간다. 오랜 애증 관계의 시작이다.

상황만 놓고 본다면 <파주>는 그렇게 모호하지 않은 영화다. 파주의 철거현장을 배경으로 언니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은모와, 진실을 에둘러 감추려 하는 중식 사이의 갈등이 영화를 끌고 간다. 돌멩이와 벽돌로는 폐건물을 사정없이 때려부수는 포크레인을 당할 수 없어 화염병을 던지고 용역 깡패들에게 욕을 퍼붓는, 격렬한 철거현장은 용산의 절규인 "여기 사람이 있다!"를 고스란히 반복한다.

영화에서 모호한 말투와 태도로 '안개'라는 이미지와 극도로 부합하는 은모는 <파주>의 긴장과 파국을 이끄는 동력이지만, 무엇보다 눈이 가는 캐릭터는 중식이다. 그는 카메라의 중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많은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다. 그는 공부방 아이들에게 "할 말 못할 말 다 꺼낸다"곤 하지만, 정작 아이들의 짖궃은 장난에 말 한 마디 못하고 도망쳐 버린다. 술을 억지로 들이켜서야 아내와 섹스를 하는 중식이 이를 악물듯 내뱉은 "용서해주세요"는 섹스도 언어와 마찬가지로 그의 본심에 닿지 못함을 드러낸다. 침묵의 절정은 가스폭발사고의 진실을 감옥에 갇혀서라도 은모에게 절대로 알리려 하지 않는 씬에서다. 하지만 "인간적으로 원망하고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인도로 도망치듯 여행을 떠난 은모를 받아들인 중식으로선 자연스러운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 영화에서 가장 무서운 장면은 물대포를 피해서 서 있는 철거대책위원장 김중식(형부)에게 최은모(처제)가 “왜 이런 일을 하세요?”라고 질문할 때였다. 그 물음에 김중식은 씁쓸한, 말하자면 생애전환기의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처음엔 멋져보여서 시작했는데, 그 다음에는 갚을 게 많아서였고, 지금은 그냥 할 일이 자꾸 생기는 것 같네.” 이처럼 무서운 대사가 어디있는가? 멋져 보여서 시작할 때 그는 선배 부부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고, 갚을 게 많아서 그 일을 계속할 때 그는 아내가 죽는 걸 지켜봐야만 했고, 그냥 할 일이 자꾸 생길 때는 처제에게 “한번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김연수, <이거야말로 인간의 종말이로구나>, 씨네21 제728호)

소설가 김연수가 이 장면을 가장 무섭다고 한 이유는 그것이 인생의 종말을 나타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인생의 종말이란 선의든 악의든 결국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밖에 없는 인간이 바로 자신임을 깨닫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나는 감옥에 갇힌 중식이 선배 목사와 대화하는 씬을 들겠다. "조금 겪어봤는데, 은모는 그냥 모르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철거위는 어쩔건데?" 챙겨야 할 사람들이 있지 않느냐는 선배의 물음에 중식은 망설인다. "그냥... 제가 너무 교만했던 것 같아요." 여기서 인생의 종말 만큼이나 두려움을 느끼게 만드는 건 다름 아닌 익숙함이다. 중식은 상처를 주고 받는 일에, 나아가 감옥에 갇히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버린 거다.

철거현장에서 "내가 혼자 감옥 가는 걸로 책임질테니 화염병을 던지자"고 말할 때도, 3년 전 유치장 안에서 은모에게 "이상해?"라고 말하며 웃을 때도, 은모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도(그 사랑은 상당한 죄책감과 연민을 수반하는 듯 하지만), 그리고 끝내 진실을 감추겠다고 결심할 때도 무수한 오해와 편견을 감수하게끔 하는 힘은 바로 익숙함에 있다. 자기를 도구화하는 인간의 슬픈 전형으로서, 중식이 스스로 교만했다는 지적은 옳았다. 그는 자신이 모든 걸 책임질 수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는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결국 또 다시 모든 걸 책임지려든다. 중식에겐 그런 삶의 방식에 충분히 닳고 닳았다. 너무 익숙해져서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은모가, 비록 철거현장에선 끝내 '괴물'이 되어버렸지만, 중식을 떠난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은모를 떠나보내고 진실을 묻어버리려는 중식의 태도 역시 자연스러운 것이다. 파주의 짙은 안개조차 모든 진실을 감출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결별이 새삼 다행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