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저널 <김주원의 그 때 그 때 다른 영화 (17) 디스트릭트9(2009)>
지금이 확실히 인터넷 시대라는 걸 체감할 때 중 하나는 관심 있는 영화에 대한 사전정보가 이미 인터넷에 좍 깔려있을 때다. 피터 잭슨이 제작에 참여한 탓에 유명세를 탄 <디스트릭트9>(2009)이 아직 개봉도 하지 않았을 때에도, 감독 닐 블롬캄프의 단편영화 <Alive in Joberg>는 유튜브에 공개되어 관객들의 호기심을 무럭무럭 키워주었다. 닐 블롬캄프는 남아공 출신의, 올해로 만 서른 살 된 젊은 감독이다. 감각적인 스타일을 가진 여느 감독들처럼 그 역시 CF와 뮤직비디오를 찍으며 데뷔를 했다. <디스트릭트9>은 감독의 <Alive in Joberg>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만화 <슬램덩크>의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농구만화 단편을 통해 데뷔하고, 그 단편들을 잇고 이야기에 살을 붙여 장편으로 대히트를 쳤듯이, 블롬캄프도 비슷한 길을 걷는다.
1982년. 우주선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 상공에 출몰하고 난파된 외계인들이 인도적인 이유로 도시 외곽에 집단거주하게 된다는 설정은 인종차별로 인한 갈등이 심화된 나라들-특히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좀 진부할지 몰라도 우리에겐 제법 신선하게 다가온다. 외계 난민의 첫 수용으로부터 28년이 지난 2010년을 무대로, 대체역사를 이야기의 바탕에 깔고 페이크 다큐멘터리로 근사하게 장식한 <디스트릭트9>은 그저 근사한 SF액션으로 즐기는 걸로도 충분하다. 플롯은 단조롭지만 연출과 스토리를 디테일하게 다듬은 덕분에 매 컷마다 생동감이 넘치고, 외계인의 무기를 독점하고 싶어 하는 거대 기업의 탐욕이 작품에 적절한 긴장을 불어넣는다. 할리우드 자본의 생존술인 특수효과 역시 적절히 투입되어 외계인들의 생활-그래서 단편의 제목에 Alive가 들어간 지도 모른다-과 박진감 넘치는 액션씬을 리얼하게 그려낸다.
여전히 흥미로운 부분은 외계인의 생활이 1980년대의 지독했던 인종차별정책에 대한 메타포라는 것이고, 이 SF적 외삽이 작품의 개연성을 가능한 끌어올리고 있다는 점이다. 외계인들이 거주하는 ‘디스트릭트9’은 고스란히 흑인 난민촌을 연상시킨다. 작품 속 외계인들은 고양이 먹이에 눈이 먼 거지떼 취급을 받고, 생존을 위해 나이지리아 갱단과 목숨을 건 거래를 하며, ‘보호’라는 명목 아래 철조망 안의 수용소에 갇혀 지내다 아무 힘없이 강제 퇴거될 수밖에 없는 사회의 루저들, 아니, 이방인들이다. 여기서 <디스트릭트9>은 쫓겨나는 자들을 위한 인류학적 박물지로 제 위치를 잡는 것 같다. 외계인의 불시착과 주인공의 감염, ‘디스트릭트9’ 철거작업과 외계 모선의 이탈까지 각각의 과정을 교차편집하고, 사건과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 그리고 군중과 외계인 사이의 갈등을 복잡다단하게 묘사하는 점에서 그렇다(사회학자와의 인터뷰가 작품 사이에 배치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게다.).
영화는 외계인들의 ‘디스트릭트10’ 이주가 완료되었다는 자막으로 끝을 맺는다. 외계 모선을 타고 떠난 외계인이 동포를 구하기 위해 군대를 끌고 돌아올지 어떨지는 알 수 없다. 지구에 남겨진 외계인들은 여전히 인간의 미움을 받는 채 격리되어 살아갈 것이다. ‘빼앗긴 자들’에 대한 SF적 외삽을 걷어내고 나면 거기엔 결국 ‘인간’이 보인다. 그러니까 지금도 철거 중인 재개발 구역들과, 거기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싸우는 철거민이 보인다. 이명박 집권 초기에 돌던 사진이 도시 상공의 모선 마냥 머릿속에 둥둥 떠오른다. 사진 속에는 기다란 장벽이 안팎을 가르고, 그 좌우로 호화저택과 빈민촌이 공존 아닌 공존을 하는 가공의 서울이 존재했다. <디스트릭트9>은 인종차별타파를 주장하지도, 외계인의 인권을 요구하지도 않는다(만약 그렇다면 우린 ‘인권’의 개념과 범위를 대폭 수정해야 할 테니까!). 다만 ‘디스트릭트9’이 어디 따로 없다는 것만 알려준다. ‘디스트릭트9’은 어디에나 있다. 김주원(PD저널)
지금이 확실히 인터넷 시대라는 걸 체감할 때 중 하나는 관심 있는 영화에 대한 사전정보가 이미 인터넷에 좍 깔려있을 때다. 피터 잭슨이 제작에 참여한 탓에 유명세를 탄 <디스트릭트9>(2009)이 아직 개봉도 하지 않았을 때에도, 감독 닐 블롬캄프의 단편영화 <Alive in Joberg>는 유튜브에 공개되어 관객들의 호기심을 무럭무럭 키워주었다. 닐 블롬캄프는 남아공 출신의, 올해로 만 서른 살 된 젊은 감독이다. 감각적인 스타일을 가진 여느 감독들처럼 그 역시 CF와 뮤직비디오를 찍으며 데뷔를 했다. <디스트릭트9>은 감독의 <Alive in Joberg>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만화 <슬램덩크>의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농구만화 단편을 통해 데뷔하고, 그 단편들을 잇고 이야기에 살을 붙여 장편으로 대히트를 쳤듯이, 블롬캄프도 비슷한 길을 걷는다.
1982년. 우주선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 상공에 출몰하고 난파된 외계인들이 인도적인 이유로 도시 외곽에 집단거주하게 된다는 설정은 인종차별로 인한 갈등이 심화된 나라들-특히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좀 진부할지 몰라도 우리에겐 제법 신선하게 다가온다. 외계 난민의 첫 수용으로부터 28년이 지난 2010년을 무대로, 대체역사를 이야기의 바탕에 깔고 페이크 다큐멘터리로 근사하게 장식한 <디스트릭트9>은 그저 근사한 SF액션으로 즐기는 걸로도 충분하다. 플롯은 단조롭지만 연출과 스토리를 디테일하게 다듬은 덕분에 매 컷마다 생동감이 넘치고, 외계인의 무기를 독점하고 싶어 하는 거대 기업의 탐욕이 작품에 적절한 긴장을 불어넣는다. 할리우드 자본의 생존술인 특수효과 역시 적절히 투입되어 외계인들의 생활-그래서 단편의 제목에 Alive가 들어간 지도 모른다-과 박진감 넘치는 액션씬을 리얼하게 그려낸다.
여전히 흥미로운 부분은 외계인의 생활이 1980년대의 지독했던 인종차별정책에 대한 메타포라는 것이고, 이 SF적 외삽이 작품의 개연성을 가능한 끌어올리고 있다는 점이다. 외계인들이 거주하는 ‘디스트릭트9’은 고스란히 흑인 난민촌을 연상시킨다. 작품 속 외계인들은 고양이 먹이에 눈이 먼 거지떼 취급을 받고, 생존을 위해 나이지리아 갱단과 목숨을 건 거래를 하며, ‘보호’라는 명목 아래 철조망 안의 수용소에 갇혀 지내다 아무 힘없이 강제 퇴거될 수밖에 없는 사회의 루저들, 아니, 이방인들이다. 여기서 <디스트릭트9>은 쫓겨나는 자들을 위한 인류학적 박물지로 제 위치를 잡는 것 같다. 외계인의 불시착과 주인공의 감염, ‘디스트릭트9’ 철거작업과 외계 모선의 이탈까지 각각의 과정을 교차편집하고, 사건과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 그리고 군중과 외계인 사이의 갈등을 복잡다단하게 묘사하는 점에서 그렇다(사회학자와의 인터뷰가 작품 사이에 배치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게다.).
영화는 외계인들의 ‘디스트릭트10’ 이주가 완료되었다는 자막으로 끝을 맺는다. 외계 모선을 타고 떠난 외계인이 동포를 구하기 위해 군대를 끌고 돌아올지 어떨지는 알 수 없다. 지구에 남겨진 외계인들은 여전히 인간의 미움을 받는 채 격리되어 살아갈 것이다. ‘빼앗긴 자들’에 대한 SF적 외삽을 걷어내고 나면 거기엔 결국 ‘인간’이 보인다. 그러니까 지금도 철거 중인 재개발 구역들과, 거기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싸우는 철거민이 보인다. 이명박 집권 초기에 돌던 사진이 도시 상공의 모선 마냥 머릿속에 둥둥 떠오른다. 사진 속에는 기다란 장벽이 안팎을 가르고, 그 좌우로 호화저택과 빈민촌이 공존 아닌 공존을 하는 가공의 서울이 존재했다. <디스트릭트9>은 인종차별타파를 주장하지도, 외계인의 인권을 요구하지도 않는다(만약 그렇다면 우린 ‘인권’의 개념과 범위를 대폭 수정해야 할 테니까!). 다만 ‘디스트릭트9’이 어디 따로 없다는 것만 알려준다. ‘디스트릭트9’은 어디에나 있다. 김주원(PD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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