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저널에 보내려 했지만, 이런 이야기는 역시 블로그가 더 나은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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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잠깐 내가 맴돌았던 모처에 대한 이야기다. 별로 유명하지도 않았고, 이젠 거의 잊혀졌을 것이다. 가을도 됐으니까, 좀 과거를 추억해도 될 것 같다.
2000년. 고 3. 남들은 교실에 처박혀 시루 속의 콩나물이 되어가는 동안, 나는 논술반이라는 이유로 이 학교 저 학교에서 열리는 논술대회며 백일장엘 다니며 놀았다. 당연히 별반 소득은 없었다. 날라리도 될 수 없고 모범생도 될 수 없는 딱 어중간한 나에게 논술반은 적당히 현실을 외면할 좋은 구실이었다. 인문계 학교라곤 여고 합쳐서 딱 두 개 밖에 없는 시골의 고만고만한 문화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피시방만은 논물 먹고 자란 피 마냥 무성하게 자라났다. 피시방에 기어들어가 도내 백일장 온라인 게시판에서 내가 쓴 글 조회 수를 열심히 올리던 어느 날이었다. 제 딴에는 글 쓰는 맛을 알아버렸다고 해야 하나. 그 땐 정말 시나리오 작가가 하고 싶었다. 영화는 아니고 게임. 게임 시나리오 작가. 뭔가 둘리스럽고 뽀로로스러운, 문화콘텐츠산업의 최전선 같은 냄새가 나는 그 이름을 그 때의 나는 좋아했다. ‘시나리오네트워크’. 야후에서 시나리오라는 검색어를 치면 가장 상단에 나오던 도메인이었다. 그 해 갓 만들어진 사이트였고, 거기엔 마침 게임 파트도 있었다.
수능을 보고, 원서를 넣고, 대학은 논술로 붙었다. 여전히 사람 만나는 게 서툴러서 아는 교회 동생한테 인사도 제대로 못 건네던 찌질한 나는 그 해 여름, 시나리오네트워크 사무실을 찾아갔다. 일산 호수공원은 너무 넓었고, 오피스텔은 또 뭐 이리 많아, 투덜댔다. 사무실 문을 열었다. 모이기로 했던 사람들은 미리 와서 디아블로2를 하고 있었다. 거의 만렙을 자랑하는 용감한 전사들이 미친 듯이 소를 잡고 있는 동안, 나는 피리 부는 목동 마냥, 그러나 소 대신 빈 의자 위에 오도카니 앉아 멍하니 모니터만 들여다봤다.
그 날 밤 내내 보드카만 들이켰다. 자신을 시나리오네트워크 대표라고 소개한 형님은 자신의 무용담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케이블인가 에로 영화판인가에서 연출부 하다 시나리오 쓰겠다며 뛰쳐나왔다는 그는, 그 역시 시골 출신으로 어렸을 적 한 밤중에 냇가에 둥둥 뜬 시체에 다가가 그 우유에 불린 조리퐁 마냥 퉁퉁 분 살덩이에 팔을 푹 집어넣었노라 했다. 그 때 그가 했던, “작가 하겠단 놈은 살인 빼곤 다 해봐야 돼.” 라는 말은 그 후 약 5년 정도는 내 삶을 거의 지배한 것 같다. 그의 무용담이 구라인지 진짠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시나리오네트워크의 취지는 제법 근사했다. 시나리오 작가들의 집단창작공간으로서, 영화사들과 계약을 맺는 일종의 에이전시로서, 또 예비작가들을 키우는 교육현장으로서의 시나리오 작가집단을 꿈꿨다. 2001년 당시에는 나름대로 몇 군데 영화사들과 시나리오 이야기도 했던 것 같고, 게임이 문화콘텐츠산업의 첨병으로 각광받았던 당시였던 만큼 게임회사 쪽에도 계속 들이댔던 모양이다. PC게임 말고 모바일로 가야 산다던 게임 파트 작가 형의 말을 그 때의 나는 좀 꺼렸다. 미련하게도 나는 내가 패키지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었다. 정확히는, 믿고 싶어했다.
그렇게 몇 달 동안 시나리오네트워크를 온, 오프로 출입하면서 사이드 필드의 <시나리오란 무엇인가>를 교과서 삼아 읽고, 그곳에 올라온 영화 시나리오들을 읽으면서 분석하고, 한참 설정을 짜두고 있던 게임 공모전용 시나리오를 손보기 시작했다. 문득 영화 시나리오도 쓰고 싶어졌지만, 그 땐 게임이 더 급했다. 나와 함께 게임 파트에서 글을 쓰겠다던 친구 중 하나(아마도 그 때 그는 고3이었던 것 같다.)는 그 때 한참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2권에 빠져있었는지 한니발 전쟁을 시뮬레이션 RPG로 옮기는 시나리오를 1년 넘게 짜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대표였던 두 형들(사실 시나리오네트워크의 ‘작가’는 이들 둘 뿐이었다.) 모두 지금 내 또래였던 것 같다. 자신들은 뭐든 할 수 있다고 믿었던, 패기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기억한다. 여자 좋아하고 섹스 좋아하는, 천상 마초기도 했다. 내 기질과 맞던 맞지 않던 나는 그곳이 퍽 마음에 들었다. 다음 해까지도 가끔씩 사무실엘 찾았다. 찾아갈 때마다 그들은 점점 피로에 젖어있었다. 패기도 많이 사라져 보였다. 굳이 말하진 않았지만 사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정발산의 밤내음이 코를 물씬 간질이던 그 해 가을 이후, 나는 더 이상 사무실에 놀러가지 않았다. 나에겐 다른 일들이 생겼고, 내 공모전 시나리오 생각만 했기 때문이다. 공모전 시나리오를 기일에 맞춰 허겁지겁 끼워 맞추는 사이, 나는 연애를 시작했고, 모 게임포털 제1회 공모전에 약 140 페이지짜리 시나리오를 제출했다.
결과는 탈락이었고, 나는 내 시나리오를 기억에서 지웠다. 시나리오네트워크 홈페이지는 가끔만 들어갔다. 그러나 더 이상 그곳에서 할 말은 없었다. 2년 쯤 뒤, 시나리오네트워크는 재기를 다짐하며 ‘잠시만’ 문을 닫겠다고 했다. 종종 그렇듯이, 이 ‘잠시만’은 곧 ‘영원히’가 되었다. 나도 영화에 대해서는 거의 잊고 지냈다. 그래서 우연한 기회에 다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 지금 새삼스럽게 낯설다. 아직도 좀, 그렇다.
영화는 어렸을 때부터 내게 오락이었고, 오락인 만큼 진정 ‘무쓸모한’ 지식의 보고였다. 하지만 영화를 테크닉의 집합으로, 더 나아가 내가 창작하고 싶었던 그 무언가로 생각하게 된 첫 경험은 시나리오네트워크에서였다. 올해 들어와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그나마 자주 하게 되면서 부쩍 시나리오네트워크 생각이 난다.
오왕이 형. 하로 형. 어떻게, 잘 살고 있어요? 나는 몇 줄 안 되는 글 가지고 어쩌다 영화 얘기 끄적이고 있습니다. 영화 얘기하며 먹고 사는 그런 정도는 물론 아니구요. 그냥 살아요. 만약 이 글을 보았다면 덧글이라도 남겨주세요. 기회가 되면, 술이나 한 잔 하면 좋구요. 가을이라, 문득 생각났어요. 건강하세요.
덧 : 내가 마린블루스를 처음 알게 된 계기는 시나리오네트워크 대문에 당시 군에서 갓 제대했던 성게군의 홈페이지가 링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게군은 시나리오네트워크를 아직 기억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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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잠깐 내가 맴돌았던 모처에 대한 이야기다. 별로 유명하지도 않았고, 이젠 거의 잊혀졌을 것이다. 가을도 됐으니까, 좀 과거를 추억해도 될 것 같다.
2000년. 고 3. 남들은 교실에 처박혀 시루 속의 콩나물이 되어가는 동안, 나는 논술반이라는 이유로 이 학교 저 학교에서 열리는 논술대회며 백일장엘 다니며 놀았다. 당연히 별반 소득은 없었다. 날라리도 될 수 없고 모범생도 될 수 없는 딱 어중간한 나에게 논술반은 적당히 현실을 외면할 좋은 구실이었다. 인문계 학교라곤 여고 합쳐서 딱 두 개 밖에 없는 시골의 고만고만한 문화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피시방만은 논물 먹고 자란 피 마냥 무성하게 자라났다. 피시방에 기어들어가 도내 백일장 온라인 게시판에서 내가 쓴 글 조회 수를 열심히 올리던 어느 날이었다. 제 딴에는 글 쓰는 맛을 알아버렸다고 해야 하나. 그 땐 정말 시나리오 작가가 하고 싶었다. 영화는 아니고 게임. 게임 시나리오 작가. 뭔가 둘리스럽고 뽀로로스러운, 문화콘텐츠산업의 최전선 같은 냄새가 나는 그 이름을 그 때의 나는 좋아했다. ‘시나리오네트워크’. 야후에서 시나리오라는 검색어를 치면 가장 상단에 나오던 도메인이었다. 그 해 갓 만들어진 사이트였고, 거기엔 마침 게임 파트도 있었다.
수능을 보고, 원서를 넣고, 대학은 논술로 붙었다. 여전히 사람 만나는 게 서툴러서 아는 교회 동생한테 인사도 제대로 못 건네던 찌질한 나는 그 해 여름, 시나리오네트워크 사무실을 찾아갔다. 일산 호수공원은 너무 넓었고, 오피스텔은 또 뭐 이리 많아, 투덜댔다. 사무실 문을 열었다. 모이기로 했던 사람들은 미리 와서 디아블로2를 하고 있었다. 거의 만렙을 자랑하는 용감한 전사들이 미친 듯이 소를 잡고 있는 동안, 나는 피리 부는 목동 마냥, 그러나 소 대신 빈 의자 위에 오도카니 앉아 멍하니 모니터만 들여다봤다.
그 날 밤 내내 보드카만 들이켰다. 자신을 시나리오네트워크 대표라고 소개한 형님은 자신의 무용담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케이블인가 에로 영화판인가에서 연출부 하다 시나리오 쓰겠다며 뛰쳐나왔다는 그는, 그 역시 시골 출신으로 어렸을 적 한 밤중에 냇가에 둥둥 뜬 시체에 다가가 그 우유에 불린 조리퐁 마냥 퉁퉁 분 살덩이에 팔을 푹 집어넣었노라 했다. 그 때 그가 했던, “작가 하겠단 놈은 살인 빼곤 다 해봐야 돼.” 라는 말은 그 후 약 5년 정도는 내 삶을 거의 지배한 것 같다. 그의 무용담이 구라인지 진짠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시나리오네트워크의 취지는 제법 근사했다. 시나리오 작가들의 집단창작공간으로서, 영화사들과 계약을 맺는 일종의 에이전시로서, 또 예비작가들을 키우는 교육현장으로서의 시나리오 작가집단을 꿈꿨다. 2001년 당시에는 나름대로 몇 군데 영화사들과 시나리오 이야기도 했던 것 같고, 게임이 문화콘텐츠산업의 첨병으로 각광받았던 당시였던 만큼 게임회사 쪽에도 계속 들이댔던 모양이다. PC게임 말고 모바일로 가야 산다던 게임 파트 작가 형의 말을 그 때의 나는 좀 꺼렸다. 미련하게도 나는 내가 패키지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었다. 정확히는, 믿고 싶어했다.
그렇게 몇 달 동안 시나리오네트워크를 온, 오프로 출입하면서 사이드 필드의 <시나리오란 무엇인가>를 교과서 삼아 읽고, 그곳에 올라온 영화 시나리오들을 읽으면서 분석하고, 한참 설정을 짜두고 있던 게임 공모전용 시나리오를 손보기 시작했다. 문득 영화 시나리오도 쓰고 싶어졌지만, 그 땐 게임이 더 급했다. 나와 함께 게임 파트에서 글을 쓰겠다던 친구 중 하나(아마도 그 때 그는 고3이었던 것 같다.)는 그 때 한참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2권에 빠져있었는지 한니발 전쟁을 시뮬레이션 RPG로 옮기는 시나리오를 1년 넘게 짜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대표였던 두 형들(사실 시나리오네트워크의 ‘작가’는 이들 둘 뿐이었다.) 모두 지금 내 또래였던 것 같다. 자신들은 뭐든 할 수 있다고 믿었던, 패기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기억한다. 여자 좋아하고 섹스 좋아하는, 천상 마초기도 했다. 내 기질과 맞던 맞지 않던 나는 그곳이 퍽 마음에 들었다. 다음 해까지도 가끔씩 사무실엘 찾았다. 찾아갈 때마다 그들은 점점 피로에 젖어있었다. 패기도 많이 사라져 보였다. 굳이 말하진 않았지만 사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정발산의 밤내음이 코를 물씬 간질이던 그 해 가을 이후, 나는 더 이상 사무실에 놀러가지 않았다. 나에겐 다른 일들이 생겼고, 내 공모전 시나리오 생각만 했기 때문이다. 공모전 시나리오를 기일에 맞춰 허겁지겁 끼워 맞추는 사이, 나는 연애를 시작했고, 모 게임포털 제1회 공모전에 약 140 페이지짜리 시나리오를 제출했다.
결과는 탈락이었고, 나는 내 시나리오를 기억에서 지웠다. 시나리오네트워크 홈페이지는 가끔만 들어갔다. 그러나 더 이상 그곳에서 할 말은 없었다. 2년 쯤 뒤, 시나리오네트워크는 재기를 다짐하며 ‘잠시만’ 문을 닫겠다고 했다. 종종 그렇듯이, 이 ‘잠시만’은 곧 ‘영원히’가 되었다. 나도 영화에 대해서는 거의 잊고 지냈다. 그래서 우연한 기회에 다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 지금 새삼스럽게 낯설다. 아직도 좀, 그렇다.
영화는 어렸을 때부터 내게 오락이었고, 오락인 만큼 진정 ‘무쓸모한’ 지식의 보고였다. 하지만 영화를 테크닉의 집합으로, 더 나아가 내가 창작하고 싶었던 그 무언가로 생각하게 된 첫 경험은 시나리오네트워크에서였다. 올해 들어와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그나마 자주 하게 되면서 부쩍 시나리오네트워크 생각이 난다.
오왕이 형. 하로 형. 어떻게, 잘 살고 있어요? 나는 몇 줄 안 되는 글 가지고 어쩌다 영화 얘기 끄적이고 있습니다. 영화 얘기하며 먹고 사는 그런 정도는 물론 아니구요. 그냥 살아요. 만약 이 글을 보았다면 덧글이라도 남겨주세요. 기회가 되면, 술이나 한 잔 하면 좋구요. 가을이라, 문득 생각났어요. 건강하세요.
덧 : 내가 마린블루스를 처음 알게 된 계기는 시나리오네트워크 대문에 당시 군에서 갓 제대했던 성게군의 홈페이지가 링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게군은 시나리오네트워크를 아직 기억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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