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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umfabrik

<하바나 블루스> : 빈곤의 공간, 풍요의 음악

by parallax view 2009. 9. 23.
PD저널 <김주원의 그 때 그 때 다른 영화 (16) 하바나 블루스(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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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상대적 박탈감의 세계다. 모두가 잘 살고 있는 것 같고 '나만' 못 사는 거 같다. 그래서 아등바등 산다. 돈은 벌어도 벌어도 부족한 것 같다. 딱히 버는 게 없을 때는 말할 것도 없다. 이통사가 친절하게 문자로 알려주는 핸드폰요금에 기겁을 했다. 그 외에도 앞으로 꾸준히 빠져나갈 돈을 생각했다. 여기는 부유하고, 모두가 잘 살고 있는 것만 같고, 정말로 '나만' 못 사는 것 같은 세상이다.

반대로, 쿠바는 절대적 박탈의 세계다. 그곳에서는 모두가 가난하다. 1954년제 시보레가 버젓이 시내를 활보하는 아바나는 말이 친환경 도시지, 실상 그 별명이 붙은 원인은 정부의 계획이나 전망에도, 전통에 대한 낭만에도 있지 않다. 만성적인 빈곤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음악이 있어 행복했다? 꼭 그렇지도 않다. 석유가 부족해 정전도 잦고, 도로며 건물이며 보수되지 못하고, 쿠바 밖으로는 쉬이 나가지도 못하는 삶이 지치고 지겹지 않을리 없다. 혈기왕성한 티토가 그렇다. 티토의 단짝친구인, 물라토(흑인과 에스파냐인 혼혈) 루이도 그렇다. 뮤지션으로서 지극히 원초적인 욕망-유명해지고 싶다!-이 그들을 끊임없이 자극하기 때문이다.

<하바나 블루스>(2005)는 빤한 영화다. 음악을 하는 뮤지션들이 있고, 이들의 음악이 쿠바인들의 정서를 충실하게 드러낸다. 여기에 루이와 아내 까리다드의 갈등, 루이와 티토의 갈등이 서로 엇갈리며 서사를 직조한다. 영화의 미덕은 그럼에도 음악에 있다. 음악이 있어 나는 행복했네 따위의 안일한 말은 하지 않는다. 카리브해의 바람을 맞아 변이한 음악들(블루스, 쌈바, 소울, 그리고 로큰롤!)은 푸른 바다만큼 풍요롭고, 쿠바 뮤지션들은 예의 활달하고 열정적이다. 한편, 그들의 모습에서 별 수 없이 홍대의 클럽을 전전하는 인디들을 본다. 루이와 티토의 작업실은 또 어떤가. 한대수가 그의 단편영화 <Way Home>에서 여관방을 빌려 작업을 하던 모습 그대로다. 무덥고 텁텁한, 지루하고 끝이 없을 것만 같은, 더도 덜도 말고 꼭 쿠바 같은 작업들.

빨랫줄에 전화기를 걸어 아파트 주민들끼리 돌려가며 쓰고, 변변한 칵테일글라스도 없어 아무 유리잔에나 모히토를 부어 마시고, 무엇이든 새 것이 없으므로 낡은 차, 낡은 피아노, 낡은 극장 모두 조심해서 써야만 하는 가난한 삶. 이런 가난한 삶은 혁명 후의 기나긴 시간만큼이나 느릿하고 수더분하다. "쿠바 전 국민의 취미는 시간낭비" 라는 말은 자본주의 논리에 충실한 에스파냐 프로듀서들에겐 낯설 수 밖에 없다. 카메라는 이들의 여유 아닌 여유를 너무 미화하지도 폄하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가난하므로 더욱 음악에 몸을 맡기고 살을 부비고 비록 순간일지언정 그 때의 감정에 솔직하다. 상대적 박탈감의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쿠바인들의 삶의 결이 더욱 낭만적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곧잘 가슴을 후벼파는 음악은, 특히 루이의 거친 목소리는 그런 낭만이 관객들의 가슴 속에 안일하게 자리잡기를 거부한다. 순간의 욕망에 흔들리고 이내 바보 같은 선택을 하고야 마는 루이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에게 내민 자본주의의 달콤하지만 냉혹한 손길을 뿌리치는 것은 사회주의 이념 때문도, 조국에 대한 충성 때문도 아닌 알량한 자존심, 음악에 대한 고집 때문이다. 그 고집은 분명 그를 힘들게 해왔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친구도 아내도 사랑하는 아이들도 떠난 아바나를 자전거를 타고 홀로 가로지르는 루이의 뒷모습이 더욱 쓸쓸해 보이는 이유다.

그럼에도 <하바나 블루스>를 보면서, 나는 루이에게 감사해야 했다. 영화는 내가 지금 갖고 있는 것에 만족을 못하는 바보 같음을 비웃었다. 루이가, 쿠바 사람들이 온 몸으로 쏟아내는 음악이, 그 빈곤한 삶이 내 알량한 소갈머리를 여지없이 깨뜨려줌에 고마움을 느꼈다. 나는 그들의 음악보다 너무 작았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작아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