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저널 <김주원의 그 때 그 때 다른 영화 (15) 고갈(2009)>
세상은 반드시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걸 애써 증명하려는 시도가 있다. 본질적으로 판타지인 영화를 애써 현실의 영역으로 끌어내리는 방법 중 하나는, 영화를 도리어 철저히 판타지로 만드는 것에 있다. ‘인디영화’ 하면 떠올리는, 지루한 연출과 의도된 위악(僞惡)이 다시금 반복될 때, 관객은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영화와 애써 대결하기보다 포기하길 선언할 법하다. <고갈>의 비타협노선이 관객과 충돌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영화의 고집을 인내한 관객에게 복이 있으라.
비타협영화집단 ‘곡사’(감독 김곡, 김선)의 장편영화 <고갈>(2009)은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의 초청작으로 우리 관객에게 소개되었다. 관객들이 ‘후반 30분’의 잔혹함을 못 견뎌 줄줄이 영화관을 나섰다는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덤이다. 영화는 정말 끔찍할 정도로 지루하다. ‘뷰티풀 호러’라는 홍보카피에서 ‘호러’의 의미는 후반의 서스펜스보다 전반 1시간 30분에서 뚜렷해진다. 여자가 있고, 남자가 있다. 남자는 밤에는 여자를 이주노동자들의 매춘에 이용해 먹고, 낮에는 여자와 같이 공단의 거친 갯벌에서 노닌다. 이야기는 영화의 배경만큼 황량하고 무의미하다. 여기서 영화의 진짜 플롯을 따진다는 건 이명박에게 진짜 중도실용을 묻는 것만큼 허망할 것이다.
여자와 남자의 관계는 또 보이는 것만큼 단순하다. 지금/여기를 벗어나고 싶은 백치 여자(장리우)와, 억압자로서의 남자(박지환)라는 배치는 너무 흔해 낡고 닳았으며, 또한 갯벌에서 태곳적 원시인 마냥 순진하게 노는 것 또한 감상적이고 현실도피적이다. 동시에 이 단순한 관계망은 하나의 거대하고 절대적인 불안을 감추는, 여자가 매춘할 때 입는 얄팍한 슬립만큼 가냘프다. 왜 여자는 툭 하면 뛰쳐나가 입술을 퉁기며 숨을 내뱉고, 침을 뱉고, 구토하고, 더러는 술에 취해 꺽꺽 우는가. 왜 남자는 공장의 풍경을 망연히 바라보며 막연한 불안에 빠지는가. 영화의 진면목은 인물보다 배경에서 드러나는 것 같다. 낡고 거대한 공장. 인천 남동공단과 새만금은 슈퍼 8mm 필름을 거칠게 확대하고 약품으로 더럽히면서까지 훼손된 영상 속에서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절대자로 관객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흡사 70년대의 총천연색 방화를 연상케 하는 영상은 그렇게 현재를 지워 시간을 초월한다. 무참할 정도로 훼손된 필름은 이따금 아예 삭제되어 자연스레 로버트 로드리게스의 <플래닛테러>(2007)를 떠올리게 하지만, 그 빈도는 더욱 잦고 가벼운 위트보다 무거운 침울함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만큼 관객의 망막을 거칠게 한다. 의도적으로 삽입된 소음은 관객의 감정마저 거스른다. 남자가 여자를 부를 때 쓰는 호루라기는 왜 그리 끔찍하게 귓가에 울리는가. 그러나 영상이 캐릭터와 관객 사이의 관계를 가깝게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과 반대로, 소리만큼은 관객에게 부쩍 가깝다. 여자가 호루라기 소리를 싫어하는 것만큼 관객도 그 소리를 싫어하고, 여자가 내지르는 비명만큼 관객도 비참해진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삽입된 침묵조차 하나의 소리로 기능한다.
이 모든 효과의 배후에서 극적 긴장을 조이는 건 또 다시 공장지대다. 그 안에서 실제로 노동을 하고 생활을 꾸리는 이주노동자들을 직접 캐스팅한 데에는 단순히 제작비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들의 어설픈 연기 속에서 일상과 환상 사이의 구별을 뚜렷이 드러내 도리어 이 환상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다. 무엇이 불안의 실체인가? 끝없이 갯벌을 벗어나려 하면서도 끝내 붙잡아두고야 마는, 다리의 힘을 잃게 만들고 두 손을 무력화시키는 그 힘의 실체는? 이건 여자도 모르고, 남자도 모르며, 이주노동자들도 모른다. 그 점에서 무지는, 불안은 모두에게 평등하다. 라캉주의자 이택광의 표현(‘쾌락의 평등주의’)을 빌자면 ‘불안의 평등주의’다. 그리고 그것이 <고갈> 속에 숨어있는 공포의 힘이다.
그래서 오히려 배달부(오근영)의 개입으로 서서히 망가져가는 인물 구도와, 후반 30분의 신체훼손, 피와 체액으로 더럽혀진 사체들은 호러의 요소를 따왔지만 그다지 무섭지 않다. 진짜 공포는 거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공포는 차라리 자신의 아이와 모성마저 억지로 떼버린 여자의 내면에 있으며, 그녀가 내뱉는 비명에 있다. 여전히 공포는, 소리 속에 숨어있다.
<고갈>은 분명히 논쟁적인 영화이며, 여전히 논쟁적일 것이다. PD저널 독자들껜 죄송하지만, 이렇게 지면을 할애했음에도 불구하고 쉬이 추천하긴 어려운 작품이다. 굳이 보아야겠다면 “임산부, 노약자는 관람을 자제…” 운운하진 않겠다. 다만 당부드릴 뿐이다. 이 영화를 보는 순간부터 당신은 영화 속 인물들과 함께 오롯이 평등해진다는 것이다. 불안 앞에서. 김주원(PD저널)
세상은 반드시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걸 애써 증명하려는 시도가 있다. 본질적으로 판타지인 영화를 애써 현실의 영역으로 끌어내리는 방법 중 하나는, 영화를 도리어 철저히 판타지로 만드는 것에 있다. ‘인디영화’ 하면 떠올리는, 지루한 연출과 의도된 위악(僞惡)이 다시금 반복될 때, 관객은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영화와 애써 대결하기보다 포기하길 선언할 법하다. <고갈>의 비타협노선이 관객과 충돌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영화의 고집을 인내한 관객에게 복이 있으라.
비타협영화집단 ‘곡사’(감독 김곡, 김선)의 장편영화 <고갈>(2009)은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의 초청작으로 우리 관객에게 소개되었다. 관객들이 ‘후반 30분’의 잔혹함을 못 견뎌 줄줄이 영화관을 나섰다는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덤이다. 영화는 정말 끔찍할 정도로 지루하다. ‘뷰티풀 호러’라는 홍보카피에서 ‘호러’의 의미는 후반의 서스펜스보다 전반 1시간 30분에서 뚜렷해진다. 여자가 있고, 남자가 있다. 남자는 밤에는 여자를 이주노동자들의 매춘에 이용해 먹고, 낮에는 여자와 같이 공단의 거친 갯벌에서 노닌다. 이야기는 영화의 배경만큼 황량하고 무의미하다. 여기서 영화의 진짜 플롯을 따진다는 건 이명박에게 진짜 중도실용을 묻는 것만큼 허망할 것이다.
여자와 남자의 관계는 또 보이는 것만큼 단순하다. 지금/여기를 벗어나고 싶은 백치 여자(장리우)와, 억압자로서의 남자(박지환)라는 배치는 너무 흔해 낡고 닳았으며, 또한 갯벌에서 태곳적 원시인 마냥 순진하게 노는 것 또한 감상적이고 현실도피적이다. 동시에 이 단순한 관계망은 하나의 거대하고 절대적인 불안을 감추는, 여자가 매춘할 때 입는 얄팍한 슬립만큼 가냘프다. 왜 여자는 툭 하면 뛰쳐나가 입술을 퉁기며 숨을 내뱉고, 침을 뱉고, 구토하고, 더러는 술에 취해 꺽꺽 우는가. 왜 남자는 공장의 풍경을 망연히 바라보며 막연한 불안에 빠지는가. 영화의 진면목은 인물보다 배경에서 드러나는 것 같다. 낡고 거대한 공장. 인천 남동공단과 새만금은 슈퍼 8mm 필름을 거칠게 확대하고 약품으로 더럽히면서까지 훼손된 영상 속에서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절대자로 관객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흡사 70년대의 총천연색 방화를 연상케 하는 영상은 그렇게 현재를 지워 시간을 초월한다. 무참할 정도로 훼손된 필름은 이따금 아예 삭제되어 자연스레 로버트 로드리게스의 <플래닛테러>(2007)를 떠올리게 하지만, 그 빈도는 더욱 잦고 가벼운 위트보다 무거운 침울함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만큼 관객의 망막을 거칠게 한다. 의도적으로 삽입된 소음은 관객의 감정마저 거스른다. 남자가 여자를 부를 때 쓰는 호루라기는 왜 그리 끔찍하게 귓가에 울리는가. 그러나 영상이 캐릭터와 관객 사이의 관계를 가깝게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과 반대로, 소리만큼은 관객에게 부쩍 가깝다. 여자가 호루라기 소리를 싫어하는 것만큼 관객도 그 소리를 싫어하고, 여자가 내지르는 비명만큼 관객도 비참해진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삽입된 침묵조차 하나의 소리로 기능한다.
이 모든 효과의 배후에서 극적 긴장을 조이는 건 또 다시 공장지대다. 그 안에서 실제로 노동을 하고 생활을 꾸리는 이주노동자들을 직접 캐스팅한 데에는 단순히 제작비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들의 어설픈 연기 속에서 일상과 환상 사이의 구별을 뚜렷이 드러내 도리어 이 환상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다. 무엇이 불안의 실체인가? 끝없이 갯벌을 벗어나려 하면서도 끝내 붙잡아두고야 마는, 다리의 힘을 잃게 만들고 두 손을 무력화시키는 그 힘의 실체는? 이건 여자도 모르고, 남자도 모르며, 이주노동자들도 모른다. 그 점에서 무지는, 불안은 모두에게 평등하다. 라캉주의자 이택광의 표현(‘쾌락의 평등주의’)을 빌자면 ‘불안의 평등주의’다. 그리고 그것이 <고갈> 속에 숨어있는 공포의 힘이다.
그래서 오히려 배달부(오근영)의 개입으로 서서히 망가져가는 인물 구도와, 후반 30분의 신체훼손, 피와 체액으로 더럽혀진 사체들은 호러의 요소를 따왔지만 그다지 무섭지 않다. 진짜 공포는 거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공포는 차라리 자신의 아이와 모성마저 억지로 떼버린 여자의 내면에 있으며, 그녀가 내뱉는 비명에 있다. 여전히 공포는, 소리 속에 숨어있다.
<고갈>은 분명히 논쟁적인 영화이며, 여전히 논쟁적일 것이다. PD저널 독자들껜 죄송하지만, 이렇게 지면을 할애했음에도 불구하고 쉬이 추천하긴 어려운 작품이다. 굳이 보아야겠다면 “임산부, 노약자는 관람을 자제…” 운운하진 않겠다. 다만 당부드릴 뿐이다. 이 영화를 보는 순간부터 당신은 영화 속 인물들과 함께 오롯이 평등해진다는 것이다. 불안 앞에서. 김주원(PD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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