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팅>을 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영광의 탈출’이 울려 퍼지는 MBC <주말의 명화>에서였는지, 일요일 오전 11시쯤이면 어김없이 옛날 영화를 틀어주던 KBS 1TV의 모 영화 프로그램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고전사기극 하면 떠오르는, 나긋하지만 예리한 폴 뉴먼과 한창 혈기왕성한 로버트 레드포드가 환상의 콤비플레이를 펼치는 장면들은 이미 고전의 반열에 들어가 있다. 속는 사람마저 기분 좋게 속아줄 수 있을 것만 같은 행복한 사기극이란 이 고전적인 테마는, 현대에 와서 가뜩이나 서로 속고 속이는 지금 우리에게 얼마나 기분 좋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블룸형제 사기단>(2009)의 주인공 블룸형제는 어렸을 때부터 구라에 도가 터 이제는 절정에 달한 유명한 사기꾼들이다. 서글서글한 눈빛으로 여심을 녹이는 동생 블룸(애드리언 브로디)은 두뇌플레이의 달인 형 스티븐(마크 러팔로)의 계획에 따라 상황극을 이끌어 타깃의 돈을 빼앗는다. 가짜 총과 가짜 피로 가득한 위험천만한 모험 속에서 가짜 인생에 질린 블룸은 형의 곁을 떠난다. 하지만 인생이 사기였기에 결코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블룸에게 스티븐은 다음 타깃을 보여준다. 천애고아가 된 젊은 부자 페넬로페(레이첼 와이즈)에게서 돈을 빼앗기 위한 그들의 계획은, 그러나 페넬로페가 개입하면서 점점 틀어지기 시작한다.
영화라는 매체 자체는 그것이 극이라는 틀에 있는 한 사기와 비슷하다. 사기와 다른 점이 있다면 관객은 모든 장면이 연출이라는 것을 알고, 배우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안다는 점이다. 요컨대 관객은 영화를 보면서 기꺼이 속아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사기극은 영화 자체를 소재로 하는 영화만큼이나 극을 만드는 사람들의 속내를 드러낸다.
특유의 나른한 표정으로 극중극 광대의 피로를 표현하는 애드리언 브로디가 꼭 그런데, 영화의 포커스도 대부분 그에게 맞춰져 있다. 격정적으로 연기를 토해낸 후 사람들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 숨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쓰다듬을 때의 그 나긋한 피로감은 곧 여러 배우들의 것일 게다. 스케일은 월드와이드급이면서 군데군데 일본영화의 개그합이 녹아든 구성도 눈여겨볼만 하다. 영어라고는 세 단어 밖에 할 줄 모르는 뱅뱅(키쿠치 린코)의 존재감은 영화의 엉뚱발랄한 개그감각을 북돋워준다.
영화가 블룸에게 초점이 맞춰진 탓에 그저 들러리 수준으로 내려앉은 마크 러팔로의 역할도 불만이다. 그는 그저 동생을 이용하는 척만 하는, 그러나 알고 보면 속 깊고 다정한 큰형으로 충분했을까. 감각적인 연출과 일본영화의 영향을 받은 듯 가벼운 개그로 유쾌한 사기극을 만들어보려는 시도는 좋았지만, 여전히 그 놈의 플롯이 문제였다. 그만큼 좋은 이야기에 대한 욕망은 항구적이되 그걸 인지하고 끌어올리기란 어렵다는 얘기일 게다.
<블룸형제 사기단>은 <스팅>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하기엔 2% 모자란 작품인 듯싶다. 관객은 언제라도 속아줄 준비가 되어 있지만, 기왕이면 제대로 속을 수 있기를 욕망한다. 가면을 쓴 사람은 그 가면을 계속 갖고 싶은 욕망과 벗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한다. 관객이 자신의 가면을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을 만큼 근사하게 속인다는 게 어려운 이유가 아마 여기 있지 않을까 싶다. 김주원(PD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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