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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umfabrik

<터미네이터 : 미래전쟁의 시작> : 프리퀄의 시대, 터미네이터가 돌아왔다

by parallax view 2009. 5. 31.
시간은 흐르는 강물이고, 강물에 담근 발을 스치는 물줄기는 서로 같지 않다. 시간여행은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의 몸짓을 욕망하는 인간의 상상의 산물이다. 인류의 영웅을 제거하기 위해 미래에서 파견된 터미네이터와의 한판 승부라는, B급 SF의 내러티브가 의외의 인기와 자본에 힘입어 제 새끼를 불려놓은 지 20년도 훨씬 지난 지금,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이미 하나의 연대기가 되어 있다.

<터미네이터 : 미래전쟁의 시작>(2009)은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이지만, 그 내용은 전작들의 변주에서 벗어나 있다. 첨단 테크놀로지 기업 사이버다인에서 개발한 군사 네트워크 ‘스카이넷’이 일으킨 핵전쟁으로 인류가 몰살당한지 15년이 지난 2018년. 미래의 구원자로 예정된 존 코너(크리스천 베일)는 스카이넷 네트워크를 공략하는 과정에서 최신 살인병기 T-800의 존재를 알게 되지만, 그 과정에서 부하들을 모두 잃고 혼자만 살아남는다. 한편, 스카이넷의 전쟁이 일어나기 전 사이버다인의 피실험체였던 사형수 마커스 라이트(샘 워싱턴)가 인간 저항군의 공격을 받아 파괴된 스카이넷 네트워크에 갑자기 등장하고, 그는 자신의 실체를 알지 못한 채 2018년의 폐허를 떠돈다.

영화는 항상 미래에서 온 적에 대항하는 현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동안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 ‘가까운 미래의 비극’으로, 또 과거로 파견되었던 자들에게는 각자의 과거였던  2018년의 미국이 ‘지금/여기’라는 점에서 전작들에서 탈피하되 시리즈의 기본골격은 고스란히 남겨둔 채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시리즈의 설정을 본격적인 무대로 삼는 전략(프리퀄)은  <스타워즈> 프리퀄과 <스타트랙 : 더 비기닝>(2009), 그리고 <스몰빌>(2001) 같은 미드로 이제 더 이상 신선한 기획은 아니지만, 영화는 앞선 예들이 솔선했던 영리함을 십분 발휘한다. <미녀삼총사>(2000)의 감독 맥지가 연출을 맡았다는 불안(?)은 다소 논란의 소지는 있더라도 어느 정도 잠재워지지 않았나 싶다. 구성은 제법 탄탄하고 캐릭터 구현도 근사하다.


보통 <터미네이터 4>로 알려져 있지만, 차라리 만들지 않는 게 나았으리라는 혹평을 들었던 전작보다는, 지금의 터미네이터 시리즈를 결정지은 블록버스터 <터미네이터 2 : 심판의 날>(1991)을 직접적으로 계승했다고 보는 게 옳다. 과거의 사건이 미래를 고스란히 결정한다는 운명론적인 시간관도 동일하다. 약에만 빠지지 않았다면 필경 에드워드 펄롱(<터미네이터 2>의 존 코너)의 몫이었을 미래의 영웅 존 코너는 크리스천 베일의 중량감 있는 연기로 <터미네이터 1>에서 언뜻 드러나는 예리하고 단단한 지도자의 이미지를 충실히 반복한다. 기계에 박식한 카일 리스(안톤 옐친)의 젊은 날에 대한 재현도 세심하다.

전체적으로 불만을 가질 틈도 없을 만큼 터미네이터 연대기를 성실히 구현하고 있는 본작은 ‘헌터 킬러’ 같은 전작들에 익숙한 메카닉에 ‘모터 터미네이터’와 ‘하베스터’ 등 더욱 다양한 볼거리를 추가해 보는 재미를 늘렸다. 전체적으로 새로운 관객보다는 기존의 관객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만들었다는 인상을 폴폴 풍기는 소품을 찾는 재미도 쏠쏠하다. <터미네이터 2>의 OST였던 건즈앤로지스(Guns N' Roses)의 <You could be mine>을 당당하게 터뜨리는 뻔뻔함도, 존 코너에게 있어 계시나 다름없는 어머니의 테이프 녹음(1, 2의 사라코너인 린다 해밀턴의 육성)도, 최후의 강적 T-800으로 깜짝 출연하는 그 분(?)을 구경하는 것도 즐겁다. 한 편의 근사한 미드를 보는 기분으로 보면 딱 좋다.

하지만 이런 류의 구성은 시리즈에 관심이 없거나 처음 접하는 이들에겐 불편하다는 게 문제다. 존 코너는 밑도 끝도 없이 비장하기만 하고, 마커스의 행보는 너무 빤하다. 맥지의 속도감 있는 연출은 나름 팬에게 친절한 정도로 호흡을 조절하지만 거기까지다.

<터미네이터 : 미래전쟁의 시작>은 이미 할리우드의 전략으로 자리매김한 연대기적 구성과 과거 작품의 리메이크를 온 몸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기획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려야 살아남는 지금의 절박한 제작풍토를 반영한다. 스카이넷의 공격으로 폐허가 되어야 했을 2003년도 벌써 지나갔고, 2018년은 이제 겨우 9년 밖에 남지 않았지만 말이다.

한 사람의 죽음이 수많은 사람들의 슬픔이 된 지금. 언젠가 나중에, 어쩌면 2018년 쯤, 삶과 죽음 사이의 차이를 넘어 부엉이 바위마저 넘은 한 사람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미래에서 파견된 누군가를 다룬 영화도 나오지 않을까. “만약 그가 살아있었다면.” 인과의 그물을 깨부수는 상상이 실현될 언젠가를 <터미네이터 : 미래전쟁의 시작>을 보면서 꿈꾼다. 김주원(PD저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