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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진보로 먹고 살기의 어려움

by parallax view 2008. 12. 23.
원제는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미국의 진보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조지 레이코프, 유나영 역 / 삼인, 2006).

출간된 이래 미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었죠. 특히, 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가 2007년 대선 중에 여섯번을 읽었다는 등 현 민주당 정치인들의 필독서로 인정받았습니다. 그건 이른바 '좌파' 내지는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지요.

이 책의 파급력은 출간된 당시에도 컸지만, 더 큰 충격은 그로부터 2년 뒤에 찾아왔습니다. 미국 대선의 다크호스인 버락 H.오바마의 등장과 당선은 가히 한편의 정치드라마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오바마는 조지 레이코프가 2004년 경선에서의 민주당 참패를 보면서 철치부심했던 그 부분, 프레임과 언어를 영리하게 활용한 것처럼 보입니다.

책이 주는 메시지는 이 책의 볼륨만큼 가볍습니다. "상대방의 프레임에 놀아나지 말고, 자신만의 프레임으로 대중을 설득하라."

메시지는 제1장의 첫장에 집중되어 나오며, 1장을 제외한 나머지 글들은 레이코프가 블로그에 올린 정치비판이나 민주당의 팜플렛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민주당 좌파인 레이코프가 주창한 프레임의 재구성을 미국 민주당, 특히 오바마가 어떻게 받아들였는가를 그의 언어를 통해서 살펴보려 합니다. 한 권의 책이 정치인과 현실정치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겁니다.

1. 민주당의 프레임 : 오바마의 언어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는 레이코프의 책 '도덕의 정치'의 연장에 있습니다. 사실상 '도덕의 정치' 내용을 요약하고 보다 대중적인 언어로 바꿨다는 점에서 두 책은 똑같다고 할 수 있지요.

요점은 익히 알려져 있듯이 대중들은 자신의 이익에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관(정체성)에 투표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동자가 부자들에게 투표를 하고, 세금이 빈민들에게 악영향을 미칠 게 뻔하면서도 부자에게 이로운 정책에 손을 드는 이상한(?) 현상이 발생한다는 거지요. 프레임과 진실이 충돌할 때, 진실은 사라지고 프레임만 남는다는 것이 레이코프의 설명입니다.

이는 반대로 말해 반대당이 효과적인 프레임을 만들어낼 수만 있다면, 집권당의 프레임을 파괴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물론 공화당이 민주당보다 훨씬 많은 돈과 노력을 들여 자기들만의 언어-'세금폭탄' 같은-를 생산해 냈습니다만.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이슈에 편승하는 말장난으로 보는 것에 레이코프는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세금폭탄이나 반테러전쟁과 같은 담론의 밑바닥에는 미국인들의 '엄격한 아버지 모델'(보수적인 가족관)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레이코프는 이를 거꾸로 해석합니다. 미국의 전통에는 '엄격한 아버지 모델'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상한 부모 모델' 또한 존재한다는 거죠. '자상한 부모 모델'에 기반한 진보주의 정책의 홍보는 민주당을 부흥시키는 제1순위라는 것입니다.

오바마는 레이코프의 조언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예를 들어, "내 부모님의 꿈이 내 딸에게서 살아 숨쉬는 것을 느낀다. 내 인생은 커다란 미국의 이야기다"를 봅시다.

왜 아들이 아니라 딸일까요. 오바마에겐 말리아와 샤샤라는 딸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들 중심의 혈연관은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이 아닌 딸. 혈연주의와 거리를 두고 있지요. 게다가 흑인 혼혈인 오바마는 결코 흑인만의 미국을 말하지 않습니다. "내 인생은 커다란 미국의 이야기다"라는 말은, 인종차별이나 단순한 사회통합을 넘어 인종의 도가니로서의 미국과, 그 상징으로서의 오바마를 일치시키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이래 민주당의 대내노선과도 부합합니다.

하나 더 들어보죠. "가장 부유한 국가에서 어린이 5명 중 1명이 빈곤 속에 태어나는 건 잘못된 일이라고 말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번 미 대선에서 오바마가 내세운 언어는 용기희망 그리고 변화입니다. 그의 자서전 '담대한 용기' 또한 마찬가지로, 그는 공화당의 정치적 비전인 '강한 미국', '세계의 경찰'에 대항하는 의미에서 "NO라고 말하는 용기"를 자신의 프레임으로 선택합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두 가지가 있을텐데, 하나는 오바마의 언어가 반드시 레이코프의 '프레임'에 부합하는 건 아니라는 것과, 이와 같은 언어는 오바마였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유의미하지 않았겠는가 라는 점입니다. 무엇보다도, 오바마와 민주당은, 그리고 레이코프는 미국의 전통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바마는 다른 누구보다도 링컨을 모방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왼손으로 바이올린을 잡고 오른손으로 켠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겠지요.

이 점은 레이코프의 주장을 우리 현실에 곧이 곧대로 쓸 수 없다는 난점으로 이어집니다.


2. 인지과학적 한계,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진보로 먹고 살기의 어려움

인지과학은 그 자체로 언어학에서 파생된 한 갈래입니다. 언어학자이자 미국의 대표적인 좌파인 노엄 촘스키와 레이코프 간의 갈등의 산물이기도 하지요. 인간에게는 언어를 발화하는 특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촘스키에 반하여, 레이코프는 언어란 경험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는 인지과학에 대한 언어학적 비판 말고, 정치현상을 인지과학으로 해석하는 한계에 대해서만 짚어보겠습니다.

일단 레이코프는 욕망의 존재를 간과합니다. 물론 보수의 프레임이 전통적인 아버지 모델이라는 '가치'에 기반하여 국방비 증대, 반테러전쟁, 시장만능주의(신자유주의)로 이어지는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보다 가치관에 투표하는 현상도 프레임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프레임은 권리가 일정한 제도 아래 주어진 환경에서는-미국적인 의회민주주의 말입니다-이해되지만, 정치에 대한 대중의 욕망이 들끓어오르는 순간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 촛불을 움직였을까요? 프리온이라는 '프레임'이 움직였을까요? 아니죠.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역으로 보수(정확하게는 극우)의 프레임에 놀아나게 되는 겁니다. 촛불은 신뢰의 문제였고, 소통의 문제였습니다. 제발 우리 말 좀 들어달라는 욕망의 산물이었던 것이죠.

이는 "정치란 역동의 공간"임을 감안할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제도가 이미 주어져 있는 공간에서는 언어와 프레임이 제구실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인식틀이 안정되어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혁명과 같은 순간에는 어떨까요. 삶의 공간이 헝클어지고, 계급적 질서가 전복되는 현실에서 인식틀의 안정성은 순식간에 파괴됩니다. 혁명이 아니더라도, 시대가 변화하면서 기존의 노동계급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세대의 등장은 어떤가요.

레이코프의 프레임 재구성론을 우리나라에 적용하기 어려운 가장 큰 난점은 전통에 있다고 봅니다. 지난 400회 특집 100분 토론에서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위기가 닥쳤을 때 가장이 잘해야 가정이 화목하다"는 논리로 한나라당을 공격한 바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친숙한 '아버지 모델'을 끌어다 쓴 셈이죠. 좌파라기보다는 중도 우파인 유시민은 그렇다쳐도, 지금의 우리나라 진보세력이 내세울 만한 진보의 전통이 과연 있는가라는 난제가 진보진영에게 놓여있다고 봅니다.

이를 반영하듯, 전 민노당 정책위원회 의장인 주대환과 진보신당 정책실장 장석준 간의 논쟁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둘러싼 논쟁은 단순한 이념논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얻은 뒤에도 일관된 노선과 정책을 밀고나갈 기반이 되기 때문이죠.

레이코프의 책은 그저 고민만을 던져줄 뿐입니다.

과연 우리에게 '진보의 전통'이란 존재하는가? 있다면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우리나라의 보수세력이 추구하는 가치-엄격한 아버지상, 시장만능주의, 반북냉전주의, 균형을 잃은 대미외교-와 완벽히 구분되는 가치는 존재하는가? 그것은 서민들에게 어떤 의미가 될 것인가.

프레임만으로는 권력을 쟁취할 수 없기에, 진보로 먹고 살기도 무척이나 어려운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미국인의, 민주당 좌파의 입장에서 씌여진 프레임 재구성은 우리나라의 현실과는 많이 동떨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그나마 얻어낼 부분은 레이코프의 '프레임'이 아니라, 이 프레임이 던지는 '질문'에 불과할 겁니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조지 레이코프 지음, 유나영 옮김 / 삼인
나의 점수 : ★★★

상대방의 프레임에 얽매이지 않도록.

그리고 프레임 그 자체에도 얽매이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