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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십 트루퍼스

by parallax view 2009. 1. 2.
대한민국 남자들이라면 일생에 한번은 직면하는 문제가 있다. 군대.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피해보려고 간장을 타먹기도 하고, 가짜 진단서를 제출하기도 하고, 괄약근에 힘을 주기도 한다. 개인의 손해라는 측면이 아니라 이념으로 접근하는 이는 전쟁과 군대 그 자체를 거부하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선언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청년들은 자신의 청춘을 군대에 바친다. 국민의 4대 의무로서, 이를 완수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시민으로 대접받기 때문이다. 가산점 따위의 사탕발림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이 나라가 남자를 군필자와 미필자, 쉽게 말해 예비역과 아직 군대 안 갔다온 놈으로 구분한다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대한민국이 아직도 병영사회의 틀을 벗지 못한 구시대성으로 해석하든, 권리를 행사하기 전에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공화주의로 해석하든(공화주의는 보병을 중심으로 하는 시민군을 논하지 않고는 성립되지 않는다.), 남북간 대치와 군대조직은 현실로서 존재하고 기능한다. 엄혹한 상황이 현실로 받아들여질 때, 분노는 체념으로 바뀌고 체념은 순응으로 변해간다.

이 나라에서 군대는 국방이라는 제1의 기능 외에, 한 청년을 '군인 아저씨'로 바꿈으로써 체제를 재학습하는 공간이라는 제2의 기능을 해왔고 또 지금도 하고 있다. 그것이 국적을 불문한 근대 군대체제의 핵심이다. 이 시스템의 효율성이 입증되어 수십 수백년 뒤에 더욱 더 정교해진다면, 인류의 눈앞에는 어떤 미래가 펼쳐지게 될까?

로버트 A.하인라인의 스타십 트루퍼스(강수백 옮김, 2003(원작출간 1959) / 행복한책읽기)는 외삽법(1)을 통해 극도로 효율적인 미래의 병영사회를 제시하고 있다. 영화 <스타십 트루퍼스>(폴 버호벤 감독, 1997)로 더 잘 알려졌을 이 작품은 본서의 추천사에도 "파시스트들의 유토피아를 그린 하인라인의 고전"이라고 불려질 만큼 당대 미국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원래 해군장교 출신이던 하인라인 개인의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들어간 본서는 SF에 외삽법을 도입한 최초의 사례는 아니지만, 역자 강수백(김상훈)이 진술하듯이 '영원한 전쟁'의 조 홀드먼을 비롯한 당대 및 후대 SF작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책을 펴들 때 주의할 점 : 영화를 생각하고 읽지 말 것. 소설은 영화와는 판이하다. 소설과 폴 버호벤의 영화에서 비치는 위악적인 영웅담 및 군국주의, 섹스와 폭력은 지구와 안드로메다까지는 아니어도 지구와 명왕성만큼의 거리가 있다.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환경에 대한 별다른 고민없이 살아온 소년 조니가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격으로 입대했다가, 지구연방군 최고의 특수정예부대(이자 최고의 몸빵부대)인 기동보병에 지원하면서 전쟁과 인간사회에 대해 고민하는 일종의 성장기이다.

한 마디로, 이런 장면은 안 나온다.(그런데 다음 장면이...)

조니가 군인으로 성장하는 과정 자체에 군국주의적 요소가 일부 스며드는 것은 사실이다. 하인라인은 조니의 고등학교 역사선생인 뒤보아 중령과, 사관학교 교관 레이드 소령의 입을 빌려 참정권이란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자에 의해서만 사용되어야 하며, 그 자격은 오직 군대를 거쳐야만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스타십 트루퍼스의 세계에서는 여성도 군인으로 복무한다. 기회의 균등이라는 점에서 여성에게 문호를 연 것은 혁신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우주함대 조종사로서 여성이 남성보다 기능적으로 우등하다는 우생학적 가정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이조차 인간사회의 효율적인 조직화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채찍으로 체벌함으로써 범죄를 미연에 방지하는 사회를 제시하면서, 범죄자에 대한 사회적 보호를 중시하는 당대 미국을 비판하는 지점에서 당대 미국인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을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하지만 우리나라를 비롯해 체벌이 어느 정도 정당화된 사회에서는 그리 거부감이 들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을 군인에 의한 평민지배를 합리화하는 도구라고 단정지어서는 곤란하다. 인류가 우주로 나가 식민행성을 개척하는 미래에서 군인이 완전히 차별적인 우월을 확보한 것도, 평민의 자유가 철저히 봉쇄되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평민에겐 참정권이 없을 뿐이며 군생활을 하는 중에도 이를 포기할 수 있는 기회가 친절하게(!) 보장되어 있는 기묘한 시대다. 스타십 트루퍼스의 세계는 군인이 사회 최고의 엘리트이지만 독재적인 권력집단으로 기능하지는 않는다. 하인라인은 그 이유를 의무에서 찾는다. 국가에 대한 헌신과 강한 의무감이 공동체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고대 공화주의와 현대의 애국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이를 강수백은 미국인의 리버터리어니즘(2) 내지는 우익 아나키즘(3)의 영향을 짙게 함유한 일종의 엘리트주의라고 평하는데, 파시즘으로 매도하기에는 덜 폭력적이고 우익 아나키즘이라고 하기에는 체계적으로 조직화된 사회이기 때문에 본서에 대한 평가는 그 둘 사이의 어디쯤이 될 것이다. 또한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기동보병이 소수정예의 시민군이라는 점에서 스파르타를 연상할 수도 있지만, 보병을 중심으로 하는 시민군이 끝임없이 확장을 도모하는 것을 보았을 때 하인라인의 미래사회는 스파르타보다는 로마 공화정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책의 절반을 조니가 훈련받는 데에, 나머지 반을 전장에서 싸우는 데에 할애한 구성은 스티븐 E.앰브로스의 논픽션 <밴드 오브 브라더스>와 비슷하다. 훈련과정의 혹독함과 그를 통해 전우애를 느끼는 과정도 유사한 느낌인데, 이는 군생활을 겪어본 사람들의 보편경혐 때문일 것이다. 이는 본서를 읽는 데 있어 여성보다 남성이, 미필자보다 군필자(예비역)들이 읽기가 좀 더 수월하고 또 공감하기 쉽다는 것을 의미한다.



강화복의 변천(?). 스타십 트루퍼스의 강화복은 이후의 SF에 강한 영감을 불어넣었다. 우측 두 사진은 스타크래프트2의 해병 및 강하병.

하지만 스타십 트루퍼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역시 강화복(Powered Suit)이다. 영화에서는 예산 때문에 도입하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영화에서의 전투복 디자인도 상당히 근사한 편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좌측의 사진은 1976년 보드게임 제작사 아발론힐(4)에서 제작한 스타십 트루퍼스 보드게임의 표지. 우주에서 캡슐을 타고 강하하여 성층권을 뚫고 낙하한다는 설정은 특수전부대의 개념을 외삽법으로 확장한 정도지만, 보병의 전투력을 극한으로 상승시키는 전투복에 대한 구상은 SF를 넘어 미군의 미래보병 아이디어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다(아시모프를 비롯한 SF작가들이 NASA에 조언을 하는 등은 이젠 놀라운 뉴스도 아니다.).

무엇보다 가장 강한 시각적 임팩트는 스타크래프트에서 나타난다. 테란의 마린과 파이어뱃이 전투복으로 감싼 육중한 몸을 이끌고 저그를 쓸어버리는 장면에서 많은 이들이 영화 스타십 트루퍼스에서의 거미전쟁을 떠올렸다(아예 어떤 블로그에서는 영화소개에서 외계종족을 저그라고 소개하기도. 물론 이름도 모르고 세세히 따지기 귀찮았겠지만 그만큼 유사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한 명의 죄수가 테란의 해병으로 재탄생하는 장면을 담고 있는 스타크래프트2의 예고편은 하인라인 아이디어의 중간 정착지를 의미하는 것 같다. 

Do you wanna a piece of meat, boy?

하인라인이 본서를 쓴지 2년만에 이른바 히피들의 성전인 '이방의 이방인들'을 썼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공산주의에 대해 결코 우호적일 수 없었던 냉전시대임을 감안할 때, 본서에서 나타나는 맑스주의 비판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하인라인 스스로 애국주의적 전통에 충실한 군인이면서도 미국인의 자유로운 기질 또한 마음껏 누리고자 했던 바, 자유와 의무라는 개념이 상충하지 않고 결합하는 세계를 그려낸 것은 미국이라는 토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스타십 트루퍼스는 전쟁과 병영사회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 여운은 그리 길지 않다. 전쟁터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고, 병영사회는 남녀를 불문하고 참정권을 원하는 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거쳐가야 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또, 인류가 가장 고전을 면치 못하는 상대가 인간보다 월등히 조직화된 거미사회라는 메타포는, 고도로 조직화된 인간을 이기는 존재는 마찬가지로 조직화된 존재(인간의 그림자)라는 역설을 드러내고 있다.

전쟁도 사라지지 않았고, 군대도 여전히 남아있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본서는 그저 군바리들이 공감하고 읽을만한 SF 정도로 넘길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하인라인은 과감하게(그리고 꽤 지루하게) 자신의 통찰을 피력한다.
 "군대는 왜 존재하며, 너는 왜 군대에 들어왔는가? 전쟁 앞에 선 너는 무엇 때문에 그 자리에 서 있는가?"
본서는 SF에 관심있는 이에게 충분한 재미를 보장한다. 동시에 비판할 여지도 충분하다. 그렇기에 아직 군대를 갔다오지 않은 청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1) 외삽법(外揷法, extrapolation) : 원래 수학/통계용어로, 과거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귀납적 통계방법을 일컫는다. SF를 비롯한 문학에서의 외삽법은 독자가 공유하고 있는 당대의 지식을 바탕으로 설정을 확장시키는 작법을 말한다. 

(2) 리버터리어니즘(Libertarianism) : 개인의 자유의지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사상경향. 미국의 경우 개척자정신 및 자경주의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오스트리아 학파의 거두 하이예크가 대표적인 사상가. 하이예크의 경제학 이론은 시장의 자율성에 대한 완전한 믿음을 전제로 한다.

(3) 아나키즘(Anarchism) : 통상 '무정부주의'. 아나키즘의 스펙트럼은 워낙 넓기 때문에 국가 및 계급의 철폐라는 혁명주의 아나키즘부터, 시장의 완전자율이라는 아나코-리버터리안까지 다양하다. 전반적으로는 정부에 의한 지배를 불신하고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자율적인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대표적인 사상가로는 톨스토이, 크로포트킨, 바쿠닌 등.

(4) 아발론힐(Avalon Hill) : 미국의 유명 보드게임 제작사. 국내에는 M&A게임인 어콰이어(Acquire)와 2차대전게임 액시즈 앤 얼라이스(Axis & Allies) 등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매직더개더링(Magic : The Gathering)으로 유명한 위자드오브코스트의 계열사로 영업중(위자드오브코스트는 97년에 미국의 완구회사 하스브로에 합병.).

스타십 트루퍼스

로버트 하인라인 지음, 강수백 옮김 / 행복한책읽기
나의 점수 : ★★★★

미스터SF 로버트 하인라인의 고전.
군인에 의한, 군인을 위한, 군인에 대한 서사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