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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노래한다

by parallax view 2008. 12. 2.

0. 심연을 바라보는 자

그는 개가와 함께 모든 고통을 정복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고통은 가장 비참하다. 용기는 또한 심연에 있어서의 현기증도 몰아낸다. 그러나 인간이 서 있는 곳은 어디나 심연이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곧 심연을 바라보는 것이다.

F.W.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3부 환상과 수수께끼 중에서



김연수가 밤은 노래한다(문학과지성사, 2008)를 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 슬픈 사랑에 관해 노래했다. 1930년대의 만주에서, 사랑하는 여자를 잃고 오로지 그 추억만으로 살아가는 남자의 이야기. 그녀를 추억하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는 기억 하나만을 붙잡고 살아간다. 한 번도 어둠을 본 적이 없던 눈이 어둠을 응시하기 시작한다. 점점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심해 깊은 곳으로 내려가던 그를 적시는 한줄기 빛은, 그러나 그의 마음속 기근을 채워주지 못한다. 그는, 만철 측량사 김해연은, 한 여자, 이정희를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김해연은 어느 곳에서 밤을 헤메고 있었는가. 그의 방황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우리는 우리 역사 어느 곳에서 방황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1. 밤의 외부 - 1930년대, 간도, 동아시아

우리에게 1930년대는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가. 일제는 1920년대에 이르러 강압적인 지배에서 문화통치라는 유화적인 이름으로 통치 스타일을 바꾼다. 아무리 식민지라 해도 일방적인 착취와 수탈만으로는 지배를 영속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인도 기존의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기업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물론 일부의 성공은 대부분 일제 부역의 댓가였지만). 일제의 지배에 적응한 조선인들도 늘어나 일제에 대한 반항심도 줄어들었다. 식민지배를 합리화하는 게 아니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중·고등학교에서 반일동맹시위가 있는 한편, 속칭 '부역자'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일제 협조자들이 동네 군사무소에서 말단으로 일하는 풍경이 공존하던 1930년대였다. 이는 친일이나 부역을 칼로 무베듯 가를 수 없는 희비극을 의미했다.

일제의 지배는 성공적으로 보였고 국내에서의 테러와 불량선인(不良鮮人, 후레이센진)의 수도 줄어가고 있던 1930년대 초, 간도는 이미 이주한 조선인들로 가득했다. 만주국이라는 괴뢰정부를 세운 뒤 대동아공영권(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 인민의 연합)을 선전하는 일제의 정책과, 고국에서 더 이상 먹고 살 터전을 잃은 농민들의 필요에 따라. 그러나 간도는 희망의 땅 가나안이 아니었다. 척박한 토양과 혹독한 날씨는 이주민들의 배를 곯리고 손발을 부르트게 했다. 조선인들을 일제의 앞잡이로 보는 토착민들의 핍박도 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목숨을 이어나갔다. 그 틈바구니에 항일무장투쟁이 있었다.

국민부 같은 민족주의 계열의 무장투쟁과 중국공산당에 속하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항일유격대가 공존하던 시대. 그리고 조선인 뿐만 아니라 중국인, 일본인 등이 널리 퍼져있던 무국적 공간. 만주.

사진은 영화 '색, 계'의 상하이. 당시 일제 치하의 도시의 풍경을 상징한다.

여기에 "밀라노의 최고급 옷이 사흘만에 상하이로 이동하는" 자본주의적 번영이 겹친다. 전근대적인 농촌과 도시의 모던보이들이 혼재하고, 일제 지배의 동조자들과 반역자들이 피흘리며 싸우고, 소설속 니시무라와 같은 전향한 공산주의자가 만주로 건너와 새로운 국제주의 이상향을 꿈꾸는 중첩적인 시공간이 바로, 1930년대 동아시아였다. 소설은 아시아 한구석 남만주에서 있었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내전, 민생단 사건 속으로 들어간다.


2. 밤의 내부 - 민생단

일제에 부역하던 조선인 엘리트와 조선총독부 관료의 합작인 민생단은 1932년 창립된지 얼마 안 되어 자진해산한다. 일제가 간도에서의 조선인 자치구 확보라는 주장이 토착 중국인들을 지나치게 자극할 것을 우려한 때문이다. 하지만 민생단에 대한 중국인들의 의심은 또다른 의심으로 번져갔다. 중국공산당에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입당한 이후, 조선인들 중에 민생단에 가입한 일제 스파이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이 바로 그것이다. 

민생단 사건이 일제의 유격대 분열공작이었을 가능성은 높다. 그러나 더 큰 불행은 민생단의 해산 이후였다. 중국공산당원은 물론 조선인 공산주의자들마저도 동지들을 민생단으로 몰아 죽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일제에 체포되었다가 구사일생 탈출하거나 처형장에서 중상을 입고 살아 돌아오면 가차 없이 민생단으로 처형되었다. 일을 열심히 하면 정체를 감추려 한다고 민생단으로 몰렸고, 일을 게을리 하면 민생단의 지령으로 태업을 한다고 처형되었다. 밥을 흘리면 어렵게 구한 식량을 허비한다고 민생단, 밥을 설익게 하거나 태워도 민생단... ...간첩의 꼬리표는 끝이 없었다. (한홍구의 해제)

반민족주의를 표방한 반민생단 투쟁은 가히 마녀사냥이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내 동지를 민생단으로 몰아야 했던 상황.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은 김해연이 항일유격대의 중국인 간부와 조선인 대원의 심문을 받는 장면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그 때, 중국인이 뭐라고 소리를 질렀고 통역은 비굴한 태도로 그에게 뭔가 설명했다. 중국인은 빠른 목소리로 소리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함께 일어나던 통역은 뇌까리듯 내게 중국인의 말을 전했다. 나는 네가 일공(일본공산당)의 니시무라 히데하치를 아는 줄 알았다. 그제서야 나는 통역이 내 말을 제대로 전하는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니시무라 히데하치는 지금 만철 조사부에 있습니다. 일본어로. 중국인은 나를 돌아봤다.

...나는 니시무라 히데하치도 잘 알고 대련과 만철도 잘 알지.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군. ...동세영은 나를 쳐다봤다. 조선인 통역은 그런 우리를 의심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봤다. 그날 각자 지녔던 의심들. 그러니까 조선인 통역과 조선어로 대화하면 동세영이 그 내용을 의심하고, 조선인 통역이 동세영과 중국어로 대화하면 내가 이를 의심하고, 나와 동세영이 일본어로 대화하면 조선인 통역이 이를 의심하던 일이 어쩌면 앞으로 내가 보게 될,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의 가장 큰 배경일지 모르겠다.

당시 유격대에 팽배하던 의심은 공산당(스탈린주의) 내의 무오류의 신화와 맞물려, 반일투쟁은 피비린내 나는 내전으로 변질된다. 변방의 조그마한 유격구에서, 그나마 곳곳에 분산되어 있고 유격구마다 얼마 되지도 않던 동료들끼리. 그 씻을 수 없는 상처는 이후의 항일유격대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김일성도, 중국혁명에 가담한 뒤 북한정부에 뛰어들었던 김무정도, 빨치산 사령관 이현상도 민생단 사건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현장에 네 명의 실존인물들이 있었다.

안세훈, 박도만, 최도식, 이정희. 당장 천국을 보고자 했으나, 결국에는 제가끔 지옥을 보게 될.



3. 심연 속으로 

애국이니 민족이니 하는 말과는 거리가 먼, 먹고 살아야 하는 환경에 적응하여 사는 것이 우선이던 만철(남만주철도주식회사) 측량사 김해연은 우연한 계기로 이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민생단 간부 박길룡의 주선으로 만난 여자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이정희. 막심 고리끼의 '데쯔뜨보'를 이야기하고, 조선문예보급회에서 쇼팽의 피아노곡을 연주하는, 김해연더러 "나는 당신이 그리뇨프 보다는 푸가쵸프가 되길 원하는 마리아랍니다" (둘 다 소설 '대위의 딸'의 주인공들)라고 말할 수 있는 신여성. 그녀와의 결혼을 약속하던, 세상의 어둠을 모르던 그는 어둠 속으로 등떠밀리고 만다. 김해연을 자기와 연루시키지 않기 위해 이정희가 자살함으로써.

조선인 공산주의자 안나 리. 이정희의 죽음은 김해연을 한없이 나락으로 몰아간다. 그에게 "사랑을 하라"고 하던 일본군 장교 나카지마와 이정희의 정사를 알고, 순사의 조사를 받고, 허탈해지고, 아편에 쩔고, 만철을 그만두고, 자살을 기도하고, 실패하고.

그러다 항일유격대를 몰래 돕는 사진관 사람들의 보호를 받고, 새로운 사랑 여옥이와 경성으로 돌아갈 것을 약속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일어난 일제 토벌군의 습격으로 여옥이와 자신을 제외한 모두는 죽고, 여옥이는 다리가 잘리고. 곡절 많은 인생이 돌고 돌아 유격대로 들어가지만, 민생단 사건의 광풍은 이미 유격구 곳곳을 휩쓸고 있었다...


4. 별도 없고, 달도 없다. 죽은 나비도, 웃음의 허망함도, 사랑의 무도도 없다. 밤은 노래한다.

우리에겐 아직 생소하고 어려운 주제로, 이야기를 충실하게 이끌어 낸 작가 김연수.

그러나 여기까지 힘있게 이야기를 끌고 나가던 작가는 김해연이 민생단 사건에 온몸으로 부딪히기 시작할 때부터 급속히 집중력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특히 젊은 공산주의자인 유격대 지휘관 박도만이 반쯤 미친 민족주의자(그 역시 공산주의자이지만) 박길룡에게 살해당하면서부터 그렇다. 민족과 국경을 떠나 인간의 실존과 이상주의에 대한 진중한 탐구는 서서히 그 빛을 바랜다. 단순히 작가의 역량 탓인가? 혹은 여전히 민생단과 항일유격대는 여전히 접근하기 난해한 주제란 말인가.

오히려 김해연의 구원은, 또 작품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은 여옥이에게 있지 않았을까? 사람은 무엇 때문에 살며 어떠한 사람으로 되며 사람으로서 어떻게 해야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혁명의 도리를 깨치고 연락원 일을 한 뒤로는 그게 내가 아는 세계의 전부였습지. 이슬을 맞으면서도 신이 나서 밤새 노루처럼 산을 타고 다녔슴둥. 엉겅퀴나 산국(山菊) 날카로운 이파리들이 종아리에다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적어놓았습지.

그녀의 다리만 잘린 것이 아니라, 구원마저 잘려나간 것은 아니었을까.

한편,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여자 이정희는 정말 누구인가. 오로지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여자. 김해연이 기억하는 이정희와, 나카지마가 기억하는 이정희, 박도만이 기억하는 이정희, 박길룡이 기억하는 이정희가 모두 달랐음에도 작가는 이 '기억 속의 여자'의 존재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만약 이 소설이 영화화된다면 아마도 추리물이 기본으로 깔려야 할 것이다. 조각조각 흩어진 기억과 사건을 조합하고 다시 깨뜨려고 재조합해야만 제대로 된 이야기로 재탄생할 수 있지 않을런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읽어볼 가치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심연 위에 서 있는가. 우리는 심연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나의 점수 : ★★★

심연을 바라보다 자기 안의 어둠에 먹혀버린 시대의 이야기.

혁명 앞에서 하이네를 외는 그리뇨프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