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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과 경제학, 정치학과 경제학

by parallax view 2008. 11. 17.

물리학과 경제학의 분수령을 찾아서
(periskop 님 포스트)


1. 물리학-경제학의 관계

우선 periskop 님의 포스트에 대한 요약. 19세기의 과학혁명과 물리학의 발전은 동시대의 학자들에게 강렬한 지적 자극이었다. 특히 에너지 개념의 발견과 심화는 '보편 지식'으로서의 수학에 대한 관심을 부추겼으며, 경제학자들에게도 강한 영향을 주었다. periskop 님은 미로우스키 교수의 책 서평으로 물리학과 경제학의 상관관계를 일부 보여준다.

필립 미로우스키 교수의 'More Heat than Light'는 (제목은 전구의 에너지가 빛에너지보다 열에너지로 더 많이 방출되는 현상(엔트로피)으로서, 경제학의 난점을 은유하기 위해 지어졌다고 추정됨) 물리학과 경제학이 어떤 과정을 거쳐 합일했다가 분리되었는가를 설명한다. periskop 님의 포스트를 그대로 인용한다.

저자 미로우스키는 물리학과 경제학을 잇는 맥도 이러한 '은유'를 통해 짚어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놀랍게도 물리학의 '에너지' 개념과 경제학의 '효용(utility)' 개념이 실은 한 몸이었다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현대 경제학의 기본은 '신고전파종합'(New Classical Synthesis)이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정, thesis)과 케인즈주의(반, antithesis)가 합쳐져서(합, synthesis) 만들어졌다는 변증법적 표현이다. 이 신고전파종합을 이끈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이 물리학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종합자' 답게 경제학에 도입된 물리학적 방법론을 집대성한다. 그 이전의 학자들-레옹 발라, 쿠르노, 알프레드 마셜 등의 영향력은 매우 중요하다-의 방식과 함께 물리학적 방법론과 수학적 사고는 오늘날 미시경제학의 주류가 되었다.

물리학의 영향은 경제학에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다음에서 예시한다.

신고전파 경제학은 고전역학을 다음과 같은 의미로 대응하고자 하는 명시적 또는 암묵적 노력의 산물이었다:

  • 입자 → 개인
  • 힘 → 한계효용
  • 에너지 → 효용
  • 힘은 벡터량 → 한계효용도 벡터량
  • 에너지 총량은 입자에 가해지는 알짜힘(net force)의 경로적분값 → 효용 총량은 개인에 가해지는 알짜 한계효용의 적분값
  • 평형상태는 에너지가 극값(extremum)인 상태 → 균형상태는 효용이 극대화된 상태
  • ……

이처럼 물리학의 마당(場, field)개념이 경제학의 개념으로 천착되는 과정 하나하나가 끊어진 고리의 발견들이라 할 수 있다. 이 모두가 경제학을 사회물리학(social physics)으로 반석에 올리려는 시도였다.



미로우스키가 주목하는 바는 이 둘이 분리해나가는 과정이다. 덧붙여 periskop 님 역시 20세기 물리학이 열역학의 발전과 함께 비평형(불균형) 상태에서의 무수한 변화를 수용하는 것과는 달리, 단순한 균형으로의 회귀에 집착하는 경제학에 대해 안타까워한다.
(시장이냐 정부냐 무엇이 문제일까)


그림에서 보여주듯이 현대 미시경제학이 보여주는 단순한 균형으로의 회귀는 수학적 단순성이 주는 아름다움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비판에 직면한다.
(그림은 본 블로거의 과제 중 하나)


미로우스키가 주목한 신고전파 경제학의 가장 큰 문제는 에너지→효용의 은유는 발견해냈으나, 정작 '에너지 보존 법칙'에 대응하는 법칙을 깔끔하게 찾아낼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결과적으로 신고전파 경제학은 물리학의 이른바 '라플라스의 꿈(Laplacian Dream)'에 갇혀 버리게 되었다는 비판을 하고 있다. 라플라스의 꿈(또는 몽상)은 인과적 결정론의 극한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는 말로서, 우리가 모든 만물의 현재상태를 완벽히 알 수 있다면 물리법칙에 의해 모든 미래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신고전파 경제학은 이러한 연역적, 결정론적 체계에 사로잡혀 체계 이식 과정의 문제를 부차적인 것으로 돌려 막으면서 전진해버리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강조는 본 블로거)

즉, 경제를 설명할 수 있는 모형(model)의 생산에 치중하여, 현실경제의 유동적이고 능동적인 '변화'를 짚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미로우스키 교수는 다른 분야의 발전상에 열린 마음을 갖고 교류하려는 노력을 촉구하고 있으며, periskop 님 역시 잃어버린 지적 흐름의 복원의 추구가 중요함을 이야기한다. (굵은 글씨는 periskop 님 강조)


2. 정치학-경제학의 관계

정치외교학과와 경제학을 동시에 전공하는 입장에서, 물리학과 경제학 간의 상관관계를 짚는 과정은 무척 흥미로웠다. 그렇다면 정치학과 경제학의 관계는 어떠한가.

경제학이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물리학과의 접점을 찾았다지만 그 이전의 경제학이라는 학과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도덕철학'(Moral Philosophy)의 하부 과목으로 존재할 뿐이었다. 경제학의 시조 애덤 스미스부터가 도덕철학자였으니까.

정치학 역시 19세기 들어와서 서구 학문의 세분화와 전문화 과정에서 생겨난 과목이다. 모든 학문이 그렇듯이 출발은 철학이었다. 그리스에서 플라톤이 국가를 쓴 것이 효시다.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치면서 집대성된 고전철학은 로마 제국을 거치며 풍부해졌고, 제국의 멸망과 함께 침체되었다. '통치론'은 중세 시대에도 '제왕학'이란 이름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가톨릭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처럼,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좀 더 정확하게는 정치가 종교의 지배하에 있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었다.

정치학이 본격화된 것은 르네상스 시대에 마키아벨리가 군주론로마사 논고를 쓰면서부터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여우처럼 교활하고 사자처럼 강인한 군주의 정치학이 탄생한다. 동시에 마키아벨리는 고대 로마의 공화주의 전통(권력의 상호견제와 균형)을 따르며 시민이 주인이 되고 법에 따른 통치를 이상화한다. 이같은 모순을 반영하듯 토머스 홉스는 리바이어던을 씀으로써 자신을 지키기 위해 군주에게 개인의 모든 권리를 위임할 것을 주장하는 사회계약론이 등장하고 뒤이어 계몽주의가 등장하고,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남으로써 공화주의와 계몽주의, 그리고 정치학은 급격히 팽창한다.

이 커다란 지적 흐름에서 도덕철학 또한 빗겨갈 수 없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신보수주의, 네오콘)에서 국부로 떠받드는 애덤 스미스(A.Smith)는 오히려 그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인 인물이었다. 프랑스 같은 절대왕정국가들이 중상주의를 표방하며 수출을 늘리고 수입을 줄이는 정책을 고집하여 걸핏하면 전쟁을 일으키던 시대. 스미스는 국부론(공교롭게도 미국독립혁명이 있었던 1776년에 출간)을 통해 중상주의를 비판하고 국가 간의 자유무역을 주장한다. 여기서 절대권력이 개입할 수 없는 자유지대로서의 시장이 등장한다. 오늘날 시장의 중립성을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시장은 처음부터 정치적인 공간이었다.

스미스로부터 시작되는 고전학파 경제학의 특징은 책 제목에서 나타난다. 데이비드 리카도(D. Ricardo), 토머스 맬서스(T.R.Malthus), 존 스튜어트 밀(J.S.Mill), 칼 맑스(K.Marx)의 책에는 반드시 들어가는 말이 있다.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 이는 경제학이 정치학의 하부과목이라기보다는 아직 정식학문으로서의 입장을 가지지 못한 상태를 나타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학은 정치학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는 국가가 책임져야 했고, 국가는 그것을 정책으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정책은 무엇이 뒷받침되어야 하는가. 바로 경제학을 통해 뒷받침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지수당을 지급하는 정책이 19세기 정치가들과 경제학자 모두의 화두였다는 사실이 이를 시사한다.

19세기 과학혁명의 영향으로 경제학은 정치학과는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직도 정치학이 철학과 뚜렷한 경계를 짓지 못한 것과는 달리, 경제학은 물리학적 방법론을 도입함으로써 발전하였다. 경제학에도 많은 분파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구조주의, 오스트리안 학파, 맑스주의 등) 미시경제학적 기초는 여전히 단단하다. 경제학은 정치학의 애매모호함과 벽을 쌓기 시작했다(구조주의나 맑스주의 같은 이단적인(heterodoxy) 분파는 예외).


3. 잃어버린 지적 흐름의 복원

다시 처음의 주제였던 물리학-경제학의 관계로 돌아가자. '균형으로의 회귀'에 집착하는 주류경제학이 현대 물리학이 보여주는 '변화에 대한 풍부한 수용'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이미 물밑에서는 학문간 교류라는 커다란 물줄기가 흐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가시화되지 않고 있다.

학문간 교류는 오히려 철학에서 엿볼 수 있다. 미셸 푸코(M.P.Foucault)나 질 들뢰즈(G.Deleuze)와 같은 프랑스 철학자들은 물리학과 수학, 회화를 넘나들며 철학의 외연을 확대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불리는 지적 유행 한가운데 있었던 이들이야말로-그러나 스스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을 매우 싫어했다-지적 흐름의 복원에 대한 중요한 전례가 될 것 같다.

그렇다면 물리학-경제학 간의 학문교류를 추구하듯이 정치학-경제학 간의 학문교류는 얼마나 확대될 것인가(그렇담 물리학-정치학 사이에는???). 결과적으로 이 포스트는 정치학-경제학 간의 상관관계에 대한 진부한 썰풀이 정도 밖에 안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학과 경제학이 서로에게 음(-)의 관계가 아니라 양(+)의 관계가 될 수 있었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있다. 정치외교학과 경제학을 이중전공하는 것도 이런 소망의 부족한 시도이다.


p.s periskop 님의 서평에 대한 반박문 periskop님 글에 트랙백.

미로우스키 교수가 경제학과 물리학의 상관관계를 과잉해석하고 있다는 것이 요지. periskop 님의 글을 통해 미로우스키 교수와 periskop 님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물리학-경제학의 관계는 단순히 방법론의 문제일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