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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조셉 캠벨, 1949)

by parallax view 2008. 10. 20.

누구나 마음 속에는 자기만의 신전이 있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의 이 구절만큼 신화를 잘 설명해주는 말은 없을 것이다.

종족마다, 지역마다 수없이 다른 신앙과 종교들이 존재하지만 이들을 조목조목 살펴보면 놀라울만큼 공통된 면이 있다. 가까운 예로, 아비 없이 자라다가 기둥 밑의 토막난 칼을 들고 주몽에게 친아들임을 확인받는 고구려 유리왕 전설은 어떨까. 지리적으로 수천 km 차이가 나는 아테네의 건국시조 테세우스의 전설과 똑같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다. 세계 각지의 홍수설화, 예수님의 부활과 디오니소스의 부활은 또 어떤가.
 
이 유사성은 어디에서 왔을까. 단일한 이야기가 종족의 이동과 함께 전세계로 퍼져나간 것일까. 아니면 종족간의 접촉과 충돌이 낳은 역사적 산물일까. 혹은 그저 단순한 우연의 일치에 불과한 것일까.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조셉 캠벨 지음, 이윤기 옮김 / 민음사)은 작가의 또렷한 통찰과 풍부한 자료로 비교신화학의 교과서가 된 책이다. 세계의 신화와 전설은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더욱 강하며, 이를 통해 세계인류의 평등과 공존을 확인할 수 있다는 조셉 캠벨의 주장은 '세계화'된 지금에 와서는 너무나 당연한 상식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화'는 미국과 서구문화 중심의 반쪽짜리 세계화가 아닐까.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론은 이미 한물간 유행이 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아프리카나 폴리네시아, 아메리카 인디언과 남미의 인디오들을 '야만'이나 '미개'라는 서구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요즘은 속칭 '환독'에 빠진 분들이 중화문화를 압도하는 '동이문화'의 우월성을 강조하기도 하는데, 이는 서구의 제국주의 관점에서 한치도 빠져나오지 못한 국수주의이고 또 하나의 문명의 충돌론일 뿐이다(차라리 '야만의 충돌'이라고 부르는 게 나을 것 같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보자. 조셉 캠벨은 신화 간의 비교연구를 하고 있지만, 일반 독자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흥미롭게 풀어간다. 그 이유는 작가가 신화를 철저하게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신화에 있어서 고대 그리스 신화와 아메리카 나바호 인디언 신화, 수메르의 이난나 신화와 서아프리카의 에드슈 전설 사이에 차별은 있을 수 없었다. 부처님도 예수님도 마찬가지다.

이야기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뉘어진다. 프롤로그인 '원질신화'에서는 신화를 접근하는 방법론으로서의 정신분석학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작가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할례의식과, 정신분석학자 칼.G.융의 뱀의 꿈 해석을 비교한다. 신화는 부족의 집단무의식의 표상이고, 꿈은 개인의 무의식의 표상이므로 이 둘은 같은 지점에서 태어난다는 관점이다. 신화와 꿈 비교는 책의 구석구석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첫 장에 해당하는 1부 '영웅의 모험'은 본격적으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의 모험을 다루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영웅이 길다란 순환레일 위를 숨가쁘게 달려간다는 점이다. 즉, '출발-입문-귀환'이라는 대전제 아래에서, 영웅은 모험에 대한 소명을 받고 이 소명을 거부하다 벌을 받는다. 그러나 신비한 조력자의 도움으로 모험을 떠난 영웅은 갖은 고초를 겪다 악을 물리치고는 세상을 구할 권능을 받아 현실세계로 귀환한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아닌가? 그렇다. 이 구조는 그림형제의 '신데렐라'에도 나오고, 허균의 '홍길동전'에서도 나온다. 하다 못해 윤복이 하악하악 하는 '바람의 화원'에도 나오는 구조다!

고대 신앙은 소멸되고 세계 3대 종교조차 현대화된 지금, 가장 신화에 근접한 이야기 구조는 우리들의 문화매체-만화, 소설, 영화-에 남아있다. 되짚어보면 이렇다. 불륜드라마의 원조는 찰스 디킨스이고, 로맨틱 코미디의 원조는 제인 오스틴인데 이들의 근원을 되짚어가면 셰익스피어와 그 시대의 재능있는 동료작가들이 나오고, 더 깊이 들어가면 그리스 비극이 나오며, 끝까지 다가보면 고대의 신앙과 제의로 들어가는 형국이다. 우리는 이미 다양한 모습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들을 알고 있는 것이다.

한편 2부 '우주발생적 순환'에서는 고대 신화의 세계관과 영웅의 소멸(죽음)을 다루고 있다. 이는 자연의 흐름에 따르고 공존을 모색하려는 고대인의 지혜와 함께 하고 있다.

그런데 작가는 단순히 이야기로서의 신화가 갖는 유사성만을 강요하지 않는다. 이 책의 진정한 미덕은 참된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으로서의 영웅담을 알려주는 데에 있다. 작가는 그 예로 인도의 크리슈나 전설과 예수의 말씀을 함께 묶어 보여준다.

크리슈나는 아르쥬나가 익히 보아온 모습을 보이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베다를 공부한다 하더라도, 무서운 고행을 한다 하더라도, 보시를 행한다 하더라도, 또 의식을 행한다 하더라도 네가 본 나의 이 최고의 모습은 볼 수 없느니라. 그러나 오직 믿는 마음이면 나를 알 수 있고 참답게 볼 수 있으며 내게 들어와 하나가 될 수 있느니라...>
예수는 똑같은 것을 훨씬 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나를 위해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것이다.>
이제 의미는 분명해진다. 말하자면 이것은 모든 종교적 관행이 좇고 있는 바다... 진리를 깨닫고 거듭나는 데 필수적인 자기 적멸에 대한 저항을 버리면, 개인은 위대한 <하나됨 at-one-ment>, 즉 <자기 화해 self-atonment>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법 Law은 그 안에서 거침새가 없다.

여기서 신화가 정확하게 어디에서부터 지리적, 민족적 기원을 갖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작가는 단일민족신화를 부정한다. 각각의 신화는 다른 신화와 만나 왜곡되고 변형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화를 하나의 '상징'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역사로 받아들이거나, 혹은 자연에 대한 원시적인 이해방법 쯤으로 해석하는 극단론도 피하고 있다. 이미 '역사'가 아니라 '신앙'이 되어버린 '우리민족의 중국지배'가 '태왕사신기'나 드라마 '바람의 나라'로 표출되는 이유도 이걸로 설명할 수 있다.

각각의 신화는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의식이자, 지식의 전달 방법이었고 세계의 균형을 이해하는 방법이었다. 작가는 책을 마무리지으면서, 지금 인간은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하며, 인간의 심성은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 사이의 통로를 상실한 채 둘로 찣기고 말았다고 개탄한다. 그리고 파시즘에 대한 강한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다.

한 국가가 열병식장에서 벌이는 얼치기 제의는 신(이기주의는 이 신을 통해 제거된다)이 아닌, 포악한 용인 압제자를 섬긴다. 그리고 수많은 반제의의 성자들-국기로 장식된 채 곳곳에 나붙어 공식적인 성화로 채택된 이른바 애국자들-이야말로, 영웅이 극복해야 하는 첫번째 시련인, 관문의 문지기(우리의 끈끈이 터럭 악마)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래서 작가는 독자에게 묻는다. 세계와 자신에 대한 균형을 상실한 현대인들에게 참된 구원이란 무엇인가. 이 균형은 특정 종교나 신앙에 투신한다고 해서 바로잡힐 수 없을 것이다. 한편, 각각의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들은 때론 성공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에는 실패-이는 종종 죽음으로 연결된다-하기도 한다. 아르테미스의 알몸을 본 죄로 자기 사냥개들에게 살해당한 악타이온이나, 태양신인 아버지의 조언을 따르지 않다가 하늘을 모는 마차와 함께 벼락에 맞아죽은 파에톤, 마침내 영생의 풀을 얻지만 잠깐 방심하다 뱀에게 풀을 빼앗겨 인간의 유한한 운명을 슬퍼하며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가메쉬...

이 혼란한 시대에, 이 글을 시작할 때의 표현을 바꿔말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마음 속에는 자신만의 영웅이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앞서 말했듯이 모든 영웅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험을 무사히 통과하고 신의 세계로 들어간 영웅일지라도 영원의 세계에서 지고의 삶을 사는 것에 익숙한 나머지, 찰나의 세계인 현실로 돌아오는 것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 자아와의 화해를 달성하고도 찰나의 삶을 인정한 영웅만이 세상에 내려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 신화는 결코 현실도피가 아니다.

다음의 아일랜드 전설 요약은 영웅이 어째서 현실로 파고들어야 하는지를 잘 알려줄 것이다. 아무리 자그마한 이야기일지라도, 그것은 우주를 품고 있다. 그것이 섭리 아닌가.

에오카이드 왕의 다섯 아들이 사냥하러 갔다가 길을 잃어 한 명씩 차례로 물을 찾으러 가기로 했다. 그런데 우물은 아주 구역질 날 것 같이 생긴 노파가 지키고 있었다. 첫째인 퍼거스가 노파에게 물을 요구하자, 노파는 자기에게 입을 맞춰주면 물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퍼거스는 입을 맞추느니 차라리 목말라 죽는 게 낫다며 형제들에게 돌아갔다. 올리올, 피아크라, 브라이언이 차례로 갔다가 노파에게 질려 빈손으로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막내인 니알이 노파에게 갔다. (이상 Silva Gadelica 요약) 

니알은 노파에게 말했다.
"여인이여, 물을 떠가게 해주시오."
노파가 대답했다.
"물을 드리겠소. 대신 나에게 입맞춰주시오."
"입맞춤이 대수요? 그대를 껴안아줄 수도 있소."
왕자는 노파를 껴안고 뺨에다 입을 맞추었다. 왕자가 입을 맞추고 물러서는데 보라, 화용월태, 세상 어디에 그같이 아름다운 여자가 있으랴 싶은 미녀가 바로 앞에 서 있는 게 아닌가!...

...왕자가 탄복한 나머지 중얼거렸다.
"아, 아름다움이 은하를 이루지 않았는가?"
"그렇습니다."
하고 여인이 대답했다.
"그대는 누구신가요?"
그러나 여인은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왕도(王道, Royal Rule)라고 합니다. 타라(아일랜드)의 왕이시여! 내가 바로 왕도입니다. 가십시오. 물을 떠서 형제들 있는 곳으로 가십시오. 그대와 그대의 자손에게 왕위와 왕권이 영원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대 역시 이 몸을 추악하고, 야비하고, 욕지기가 나는 노파로 보았다가, 이윽고 아름다움을 보셨습니다. 왕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왕도란 싸움 없이, 치열한 전쟁을 치르지 않고는 손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왕의 그릇은, 무슨 일이 있든지 이를 이기고 왕도를 가는 것입니다."

왕도에 대한 이야기, 이것은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조셉 캠벨 지음, 이윤기 옮김 / 민음사
나의 점수 : ★★★★★

비교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역작. 책에 별점을 매긴다는 게 우습긴 하나, 정말 5점 만점이 아깝지 않다.

수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본질은 같다. 신화를 잃어버린 우리들은 우리 안의 영웅과 재회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