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로 2권 '아발론의 총' 이후로 젤라즈니의 책은 집어들지 않았다. 그 사이에 있었던 무수한 시간과 사건을 뒤로 하고, 군대에서 마침 책을 꽤 좋아하는 선임을 만났다. 게다가 주로 SF/판타지-물론 이 사람도 양판소 따위는 거들떠 보지 않았다-팬인 그는 내게 이것저것 다양한 책을 소개시켜 주었다. 그 인연으로 읽은 것이 젤라즈니의 '내 이름은 콘래드'와 '신들의 사회', 어슐러 K. 르귄의 '바람의 열두 방향' 등이었는데, 지금 갖고 있는 SF에 대한 지식은 그에게 절반쯤 빚진 것 같다(나머지 반은 아주 어렸을 때 읽었던 SF 아동선집 따위).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에는 다시 젤라즈니와 만나게 되다니.
각설하고, 젤라즈니의 이야기는 무척 마초적이라는 인상부터 준다. 특히 주인공 캐릭터 때문인데,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으로서 이들 주인공은 뛰어난 지성과 불굴의 의지를 지녔으며, 때때로 좌절하고 절망하긴 하지만 번역자 김상훈 씨 말대로 급속한 사건의 전개에 따라 자신의 원래 기질을 발휘하여 위기를 헤쳐나간다. 그들은 반항적인 불량배이고, 고독한 반역자이며, 파괴적인 혁명가이다. 게다가 전형적인 '주인공 컴플렉스'의 소유자들로 수많은 여인들의 연인이 된다(사실 이게 그의 주인공들이 '마초'로 불려지는 주된 이유다-_-;;).
주인공들의 이런 성격은 젤라즈니의 주된 레파토리인 '신화'와 만나면서 더욱 강력해진다. 그리스-로마 신화('내 이름은 콘래드')와 인도 힌두신화('신들의 사회')를 인용하고, 그 너머의 좀 더 근원적인 인류 보편의 신화, 집단무의식에서 이야기와 캐릭터를 끄집어 낸다. 젤라즈니는 특히 반역적인 존재들에 주목한다. 인간에게 불을 준 죄로 코카서스 산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먹히는 프로메테우스, 제우스의 아들이지만 헤라의 질투로 12가지 시련을 견뎌내다 저주에 걸려 자기 살갗을 찢어발기며 죽어가는 헤라클레스는 그의 작품들에서 끝없이 변주된다. 이 변주곡은 인간에 대한 애정이 들어있으며, 소수의 권리보다 다수의 행복이 더 낫다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체제도 기꺼이 파괴할 수 있다는 선언이 담긴 오페라이기도 하다.
단편집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1971)의 원래 미국판 제목은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 그리고 그 밖의 이야기(The doors of his face, the lamps of his mouth and other stories)'이지만 한국판에서는 영문판 제목을 따왔다. 왜 원래 제목으로 하지 않고 영문판 제목을 차용했는지가 못내 궁금했지만, 의문은 곧 풀렸다.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도 완성도가 높았지만, 문학적인 레벨로는 단편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A rose for Ecclesiastes)'가 더 높았던 것이다. 특히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셰익스피어를 틈틈이 인용하되 이야기에 착 달라붙어 전혀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도록 한 구성과 감칠맛 나는 묘사가 일품이다.
무엇보다 주인공 갤린저에게는 젤라즈니의 다른 캐릭터들에게 부족한 것-바로 인간적인 나약함-이 곳곳에서 묻어나온다. 역시나 젤라즈니 주인공 아니랄까봐 천재에, 다재다능하고 뻔뻔스럽고 건방지며 여자도 잘 꼬시고 싸움도 잘하지만(얘기하면 할수록 '수퍼마초'가 아닐 수 없다-_-;;;), 그는 연인과의 이별과 자신의 한계에 절망하고 끝내 쓰러져간다. 비록 절망하더라도 자신만의 길을 굳건히 걸어가서 마침내 승리를 쟁취한다는 점에서는 다른 작품과 비슷하지만(특히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이 그렇다), 갤린저의 마음은 다른 작품들의 캐릭터에 비해 많이 흔들리고 망설이며 좌절한다. 보다 인간적인 캐릭터와의 만남이 신선했다.
단편집 안의 다른 15편의 이야기들도 나름의 재미가 있다. 첫 장을 여는 '12월의 열쇠'는 '고양이 인간'인 쟈리 다크가 행성개척을 하는 이야기로, 이후 '신들의 사회'의 기본 발상으로 이어진다.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은 금성을 무대로 거대 어룡을 낚시질(-_-;;)하는, A.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의 젊고 활기찬 변주곡이라고 보면 되겠다. '악마차'는 단편집에 들어갈만한 짤막한 이야기이고, '괴물과 처녀'는 '판타지 뒤집어보기'의 좋은 케이스다. 판타지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다소 뻔한 구성일 수도 있겠지만 이 이야기가 60년대에 씌여졌다는 걸 생각해 보면 또 재밌다.
'이 죽음의 산에서'는 산악 SF라 불릴만한 작품이고 '폭풍의 이 순간'은 재난 SF로,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처럼 현실세계의 모험소설의 배경을 우주로 옮겨놓은 것 이외에는 상당히 현실감이 느껴지는 이야기다. 젤라즈니를 포함해서 60년대 SF 뉴웨이브 작가들의 공통된 특징인 듯 싶다. '수집열'과 '완만한 대왕들'은 낄낄대며 읽을만한 개그 판타지. 젤라즈니 글에서 마초와 세계설정을 빼면 시니컬한 개그가 둥둥 떠다닌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 전시품'과 '성스러운 광기', '코리다', '루시퍼'는 습작이라는 느낌이 강하지만 '성스러운 광기'의 경우엔 좀 더 어지러운 구성을 갖고 있는 게 눈에 띈다. 비디오를 Rewind 하는 듯한 구성을 글이라는 매체로 잘 표현해냈다.
'사랑은 허수'는 주인공이 아예 대놓고 프로메테우스이며, 공간이 왜곡되는 장면은 앞에서 말한 '앰버의 아홉 왕자' 와 비슷하다. '앰버 연대기'로 이어질 고리 한 개를 보여준다. '화이올리를 사랑한 남자'의 주인공이 보여주는 나약함은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의 갤린저와 비슷한 인상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단편인 '프로스트와 베타'는 구성도 훌륭하고 중간중간 던지는 시니컬한 개그가 저절로 웃음짓게 만든다. 이 작품은 시공사판 '내 이름은 콘래드'의 뒤에 부록으로 붙어있으며, 원제인 For a breath I tarry(숨결이 한 번 스치는 동안 나는 기다리네)는 A.E. 하우스먼의 시집 '슈롭셔의 청년들'에서 나오는 구절로 어슐러 K. 르귄의 단편집 '바람의 열두 방향'의 제목도 이 시집에서 따온 구절이다. 뉴웨이브 작가들끼리의 교류를 단편적으로 드러내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캐멀롯의 마지막 수호자'는 젤라즈니의 친구인 조지 R.R. 마틴이 TV 시리즈 '트와일라잇 존(Twilight zone)'의 에피소드로 각본화한 작품이라고 한다.
로저 젤라즈니는 1937년에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태어나 1995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에서는 2005년에 작가 서거 10주년을 기념해서 씨네21에 특집기사가 나기도 했었다. 후반기를 대표하는 '앰버 연대기'나 '저주받은 자 딜비쉬'보다 초기 작품인 '내 이름은 콘래드', '신들의 사회', '드림 마스터' 등이 더 잘 알려져 있고 또 완성도도 높다는 평가를 받으며, 단편집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역시 초창기 작품들로 이뤄져 있다. 하지만 살아있었다면 더욱 발전하며 좋은 작품을 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는 작가이기도 하다.
숨결이 한 번 스치는 동안 나는 기다리고,
아직 흩어지지 않았어.
어서 나의 손을 잡고 말해줘,
너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너의 극은 춥고,
나는 고독하다.
('프로스트와 베타'의 한 구절, '슈롭셔의 청년들'에서 발췌)
32편의 장편과 10편의 중단편집, 총 10권에 달하는 앰버 연대기를 포함해 50편 이상의 작품을 남겼으니, 로저 젤라즈니의 뒤안길이 조금은 덜 외롭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한편, 60년대의 상상력이 아직도 힘을 발휘하는 요즘의 참담한 문화에 대해 젤라즈니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역시 상상하기 어렵지 않은 일이다.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로저 젤라즈니 지음, 김상훈 옮김 / 열린책들
나의 점수 : ★★★★
시로써 단편소설을 쓰는 작가, 로저 젤라즈니의 초기 단편집.
넘치는 에너지, 유려한 스타일, 재기발랄한 유머,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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