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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위험천만 왕국 이야기 (J.R.R.톨킨, 1949)

by parallax view 2008. 4. 7.



1. 왕국의 문 앞에서

꿈은 꿈을 꾸는 자의 것이다. 노래는 노래를 부르는 자의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자의 것이다. 톨킨하면 떠오르는, 거대하고 웅장한 대서사시, 세계의 운명을 둘러싼 대전쟁, 고대와 중세의 영어와-정확하게는 켈트어의 방계인 게일어-아일랜드, 스칸디나비아의 전설을 토대로 기독교 정신을 입힌 고차원적인 노래, 그리고 반지, 이 모든 인상은 분명 톨킨의 것이 분명하지만, 네 편의 소소한 이야기를 모아놓은 '위험천만 왕국 이야기(Tales from the Perilous Realm, 1949)'는 톨킨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는 자못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단편집에 수록된 '니글의 이파리(Leaf by Niggle)'에서의 묘사를 모방하자면, 나무에 돋아난 자그마한 이파리를 주의깊게 살펴보고, 그 위에 맺힌 이슬의 빛을 가늠하며 바람이 불어오면 부드럽게 떨리는 그 리듬을 읽어내는 것처럼, '위험천만 왕국 이야기'에 담긴 이야기들은 모두 그렇게 소박하고 담담하게 환상세계의 극히 미세한 부분을 보여준다.

그것조차 거대한 '중간계'의 일부로 볼 수도 있겠지만 꼭 그렇게 보지 않아도 상관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꿈은 그것을 보는 자의 것이고, 그 꿈을 훔쳐본 순간, 훔쳐본 자 역시 꿈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원형을 상실하고 변형되고 왜곡되기 때문에 더 이상 두 꿈을 같은 것으로 볼 수 없을 뿐이다. 환상문학이 서 있는 지점은 아마 그쯤 어딘가일 것이다.


2. 모험 속으로

네 편의 이야기가 있다. '햄의 농부 가일스(Farmer Giles of Ham)'은 가장 재기발랄하고 유쾌하며 풍자적인 소설이다. 수록된 다른 어느 이야기들보다 재미있고 톨킨하면 떠오르는 선입견-딱딱하고 건조하며 지루한 언어의 향연-을 쉽게 무너뜨린다.

욕심많은 왕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작은 왕국(the Little Kingdom)'을 세우기까지, 평범하지만 약삭빠른 구석이 있는 농부 가일스가 벌이는 모험이 제법 신나게 펼쳐진다. 마치 그래픽노블로 나온 '톨킨의 호빗(the Hobbit, 그림 : 데이빗 웬첼 / 출판 : 아트나인)'을 보듯이 장면 하나하나가 그에 맞는 만화장면을 떠올리도록 한다. 맛깔나는 대사도 유쾌한 분위기에 한몫한다. 특히 개와 거인의 대사를 주목할 것! 하지만 가일스를 태운 채 항상 위기를 직감하지만 말없이 능청떠는 지혜로운 암말이 더 눈에 띈다.

만약 '반지의 제왕'에 대해, 혹은 톨킨에 대해 영화만 본 사람보다 조금 더 깊이 알고 있다면 그의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톰 봄바딜. 두번째 단편은 톰에 대한 시, '톰 봄바딜의 모험(The Adventures of Tom Bombadil)'이다. 반지의 제왕 트릴로지를 모두 보았다면, 세번째 이야기인 '왕의 귀환(The Return of the King)' 끝자락에서 빌보와 프로도가 각각 중간계를 떠나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신이라고 할 수 있는 발라들의 세계인 서쪽 나라는 더 이상 동료들과도, 중간계와도 어울릴 수 없게 된 모험가들이 받게 된 포상이자 시대와의 불화로 인한 유배지였고, 그곳으로 떠나는 이들도, 남아서 지켜보는 샘도 모두 아쉬움과 쓸쓸한 회한 속에서 이야기를 마감한다.

'톰 봄바딜의 모험'을 일관하는 분위기는 쓸쓸함이다. 아일랜드의 시골 분위기를 상상케 하는 소박한 활기는 저물어가는 제3시대와 요정의 몰락을 암시하는 듯한 애상(哀想)으로 바뀌고, 일관되지 않고 가끔은 모순되며 때론 충돌하기도 하는 세계관은 이 시구 역시 중간계에 전해지는 구비전승이라는 걸 넌지시 암시한다. 시의 서문에 부제를 '프로도의 꿈'이라고 제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나즈굴의 칼에 찔린 이래로 상처 때문에 늘 고통받는 그의 두려움과 절망감이, 반지의 시대 이전의 서사시이자 중간계의 역사기록인 '실마릴리온(the Silmarillion)'을 관통하는 주제, 흥망성쇠와 애상과 겹치면서 시의 분위기를 더욱 붇돋운다.

한편, '니글의 이파리(Leaf by Niggle)'에 대해 혹자는 톨킨 자신의 이야기라고도 하며, 실제로 죽음을 앞둔 말년의 모습을 스스로 예시하고 풍자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세상은 왜 자기에게 그림을 그릴 시간을 주지 않는지, 다른 세계로 가야되는 시간은 왜 자꾸 다가오는지, 난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왜 세상 사람들은 그런 불필요한 일을 할 시간에 다른 사람을 도와주어야만 한다고 강요하는지, 그 수많은 불평과 불만을 두 볼 가득 담아 툴툴거리지만 정작 소심하고 선량한 소시민 니글 씨는 끝까지 이웃에 대한 의무감과 동정심을 발휘한다. 하지만 결국 다른 세계에 억지로 끌려간 니글 씨의 소소한 모험 이야기는 어쨌든 푸근한 결말로 마무리된다. 꿈은 뭐니해도 꿈을 꾸는 자의 것이 아니겠는가...

마지막 단편인 '큰 우튼의 대장장이(The Smith of Wooten Major)'는 중간계와 묘하게 겹치면서도 별개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이마에 요정의 별을 단 현명한 대장장이는, 위대한 보석 실마릴-요정들이 사악한 모르고스를 쫓아 중간계로 건너와 이른바 '보석전쟁'을 벌이게 된 원인이기도 한-을 이마에 달고 '최후의 전쟁'에서 흑룡 안칼라곤을 죽인 요정 '뱃사람' 에아렌딜과, '반지의 제왕'의 아라곤의 선조이자 사우론에 대항해 싸우다 전사한 아르노르의 왕 엘렌딜이 지니고 있던 보석 '엘렌딜의 별'을 연상케 한다.


3. 이야기는 꿈꾸는 자의 것

역자가 이야기했듯이, 톨킨은 스스로 창조해 낸 이야기 속에서 살았다. 그 속에서 살아가기를 꿈꾸지 않았던들, 어떻게 이런 소소한 세계를 마치 그 속에서 살았던 것처럼 쓸 수 있었을까. 더러는 활기 넘치고 기운차게, 더러는 쓸쓸한 애상감에 가득차 지어내는 노래들은, 풍부한 언어는 곧 하나의 세계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수많은 작가들이 톨킨의 세계를 모방해 왔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흉내내는 것은 그 외양일 뿐 어떤 통찰이나 본질이 결여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언어일 것이다. 하나하나의 리듬과 울림을 온전히 만들어내고 그것을 세계로 바꾼 이는 톨킨 정도가 아니었을까.

때로는 니글이 되어 창조물을 완성할 시간에 쫓겨 조바심내기도 하고, '큰 우튼의 대장장이'에 나오는 욕심많은 요리사처럼 환상을 거부하고 오로지 현실적인 이익과 질투에 가득찬 이들에 대한 모멸감을 드러내는 요정왕 같이 되기도 하며, 단순하지만 재기발랄한 햄의 농부 가일스가 되어 이상한 세계를 모험한다...

환상은 물론 현실에 대한 도피이지만, 동시에 현실에 대한 거리두기이기도 하다. 지금을 꿈이 없는 시대라고들 부른다. 잠시 현실이 무척 팍팍하게 느껴질 때 누군가의 꿈을 훔쳐봄으로써 자신의 꿈을 다시 확인해 보는 건 어떨까. 읽다가 지루하다고 좀 졸아도 상관없다. 운이 좋으면 톰 봄바딜을 만나 중간계를 여행할지 또 모르잖은가.


위험천만 왕국 이야기

존 로날드 로웰 톨킨 지음, 이미애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나의 점수 : ★★★

톨킨의 소소한 이야기.

트롤처럼 큼지막한 것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호빗들이 군데군데 숨어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