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대선 때부터 특히 내 머리를 쿡쿡 쑤셨던 의문 한 가지 : 왜 우리나라 국민들은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에 빠삭하면서도 경제적으로는 "돈 많으면 장땡"이라는 천민자본주의의 화신이 되어버렸을까?
계약직으로 들어간 모 공기업 출근 삼일째, 회식자리에서 문득 깨달은 두 가지 : 본부장님 바로 옆에 앉은 탓에 "자네는 어떻게 회사에 들어오게 되었나?" 라는 질문에 "모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다니고 있습니다" 라는 한 마디를 들은 본부장님, 화제를 바로 다른 사람에 돌리고 이쪽은 쳐다도 보지 않으셨다. "아~ 이래서 선배들이 정외과 나오면 취직하기 어렵다고 하는 거구나~ 앗흥♡" 이라는 것과, "정치라는 말만 들어도 이리 혐오감이 들어버리는 건가" 라는 것.
이제 정치라면 신물이 난다! 라는 사람들, 참 많이 본다. 아니, 만나는 사람 전부가 그랬다고 봐야겠다. 구케우원들(오타 아니다)이 구케에서 벌이는 레이드 전대질을, TV를 통해 접하곤 하는 인사청문회의 그 수많은 고정멘트들 : "모릅니다", "그런 적 없습니다" 그리고 결정타 "기억이 안 납니다" 를 국민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말한다. 이제 정치는 싫다고. 좀 더 적극적인 쪽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이제 정치 가지고는 안 된다고. 그래서 경제와 경영을 이야기한다. 드디어 CEO 대통령, 경제대통령이 나왔다고 수구보수언론은 기뻐날뛰고 있으며, 새로운 내각의 멤버들의 친환경적이고(땅을 너무 사랑하셨다잖은가) 차라리 양심적인 발언에 모 언론은 "공직자는 정직해야 하지만 때론 거짓말을 하는 능력도 필요하다. 정직이 불필요한 상처를 국민에게 주는 경우에는" 이라고까지 말씀하셨지 않은가.
그런 한편 우리는 어떤가. 하루에도 몇 번씩 부자가 되기 위한 십계명을 열심히 외우고 재태크 책도 많이 보고 생존을 위해, 미래를 위해 8,9급 공무원이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선거 때가 되면 정치인을 욕하며 투표장엔 도장은 커녕 얼굴도장도 들이밀지 않는다. 자기 목숨만큼 중한 것이 어디 있겠냐만, 우리는 이상하게도 우리 능력을 너무 믿고 있는 것 같다. 혼자서도 잘해요, 모두모두 늑돌이가 되었나 보다.
최장집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2002)는 2005년에 개정판으로 다시 나왔다. 하지만 저자도 후기를 통해 밝히고 있듯이 김대중 정권 말기의 상황까지를 다뤘음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정권 중반인 당시까지도 한국민주주의는 큰 틀에서 변한 것이 없다고 했고, '노무현 정부 말기-이명박 정부 초기'인 지금 보아도 이 나라 민주주의에 어떤 질적인 발전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물론 2004년 당시 민주노동당의 약진과, 노무현 대통령 개인의 의지에 많이 좌우되긴 했어도 과거사 청산 문제와 권위주의적인 정치문화 개선 같은 점에서는 발전이 있기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여전히 민주주의의 길은 멀다고 말한다. 주장하는 바는 그래서 오히려 간단하다.
정치를 욕하고 멸시하고 멀리하지 말고 더욱 더 나은 정치를 만들어나가야 된다고. '민주주의의 꽃은 정당' 이라는 말도 있듯이 국민의 삶에 밀착한 정당이 법적으로 정당한 경쟁을 통해 더 나은 비전과 정책을 만들어 나가야 된다고. 그래서 '노무현 정권', '이명박 정권' 이럴 게 아니라 '통합민주당 정권', '한나라당 정권' 이렇게 얘기가 나와야 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사실 우석훈/박권일의 '88만원세대'의 정치학적인 접근이라고 볼 수 있으며, 또한 88만원세대가 태어나게 된 배경을 말하고 있다. 비록 신자유주의가 전세계적인 추세라고는 해도, 각 나라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각기 달랐으며 자국의 국민에게 일방적인 책임과 희생을 강요한 나라는 여기 이 나라 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치가 젊은이들에게 어느 정도의 보호막과 완충망 역할을 해줘야 하는데, 민주화 이후의 정부들-김영삼, 김대중, 노무현까지-은 그 책임을 방기했으며 오히려 더욱 신자유주의를 가속화하는 데에 일조했다는 거다.
차라리 철저히 가속화시켜서 한국경제의 고질병인 재벌독점구조라도 깼으면 나았을 테지만, 묘하게도 재벌들은 대부분 살아남았고 현재 한국경제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다(이 표현이 싫다면 '점유'하고 있다고 말하겠다. 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결과가 바로 냉전반공주의와 권위주의가 신자유주의와 만나 함께 살아숨쉬고 있는 대한민국으로 오세요♪, 이거다. 남보다 잘 살기 위해 남을 짓밟고, 탈세와 투기를 밥먹듯 하는 사람들이 내각에 들어서도 "능력이 있으니까" 라는 말로 인정해버리며, 젊은 사람들은 그들을 디씨든 이글루에서든 까대는 것 밖에 못 하는 지금이다.
그래서 보다 나은 정치를 위해 '민주파' 라는 집합적 정체성을 만들어야 한다는 저자의 말이 공허하게 들리기도 한다. 누차 걱정하지만, 과연 '우리'가 단합할 수 있을까? 우석훈 박사가 88만원세대라는 말을 제시한 것도 현실을 냉철하게 파악한 뒤 스스로 힘을 합쳐 움직이자는 메시지에서 출발한 것인데, 지금 88만원세대라는 말은 그저 현실에 대해 한숨 푹 쉬며 자조하는 기능만 발휘하고 있다. 프로그램이 갖고 있는 기능이 무한히 많은데 익숙한 아이콘만 계속 클릭하고 있는 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을 모아야 한다. 개인은 아무리 잘나도 거대한 권력 앞에서 미약할 수 밖에 없고, 민주주의라는 게 뭔가, '모두의 정치'가 아닌가. 비웃고 침을 뱉고 더럽다고 욕을 해도, 모두가 같이 다스리는 나라다. 그건 꿈일 뿐이고 현실은 달라, 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내 속에서부터 그 말이 끓어오른다. 하지만 반문한다. 민주주의가 별거냐? 어디 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 다스리는 게 민주주의인가? 그렇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다. 회사에서 괴롭힘 당해도, 짤려도, 돈 없다고 치료도 못 받아도, 그저 능력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내팽겨쳐지는 세상이 민주주의 사회라면 차라리 독재가 나을 것이다.
4월 9일, 또다른 선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어디가 되었든지 투표를 하자. 진보신당이 되었든 호남당으로 전락한 통합민주당이 되었든, 자유선진당을 찍든, 정말정말 원한다면 한나라당이나 민주노동당을 찍든 간에. 지금을 바꾸는 순간이란 종종 단순한 행위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민주주의를 끊임없이 민주화해야 한다고 그랬다. 앤서니 기든스 라는 사람이 그랬단다, 뭐 어쨌든.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최장집 지음 / 후마니타스
나의 점수 : ★★★★
88만원세대에 대한 정치학적인 접근.
정치를 욕하지만 우리의 리스타트 지점은 결국 정치다.
민주주의를 끊임없이 민주화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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