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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몽상과 상식 사이에서 균형찾기 (푸코의 진자 / 움베르토 에코, 1988)

by parallax view 2008. 1. 25.

이봐, 조심해. 세계의 제왕님(들)이 보고계셔

역사를 전공하든 혹은 그저 취미로 즐기든, 그것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다 보면 반드시 마주치게 되는 길목이 적어도 두 군데는 있다. 첫번째는 전쟁이고, 또 하나는 '보이지 않는 힘'에 관한 것이다. 일본의 라이트 노벨이나 동인 게임에서 종종 이름만 거론되곤 하는 '흑역사(黑歷史)'가 명칭상으로는 가장 부합할 게다. 통칭 '음모이론(theory of conspiricy)'이 바로 그것인데, 바로 미국의 건국과 세계제패를 '그림자 정부'의 음모에 의한 세계지배전략의 일환으로 보는 관점이 대표적인 케이스다.
 
기존에 알던, 상식적인 역사해석과는 정반대에 서 있는 이 음모이론은 자기만의 논리로 세계를 해석하며 나름의 개연성을 얻어내기 때문에 언뜻 들으면 무척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즉 이런 얘기다.
인간의 역사는 일정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과연 그 모든 것이 우연에 의한 것인가? 신이라도 개입하지 않다면 납득할 수 없겠지만 신조차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라면, 그렇다면 이 역사란 '누군가'의 계획에 의거해서 움직이는 것은 아닐까? 왜 미국의 수도 워싱턴 한복판에 미국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유물인 이집트 오벨리스크의 복제품이 서 있는 것일까? 어째서 히틀러는 유태인을 죽이기 위한 수용소에서 그들을 당장 죽이지 않고 몇 달 혹은 몇 년 동안 감금한 끝에야 홀로코스트를 실행한 것일까? 도대체 왜 그토록 오랫 동안 번영을 누리던 성당기사단은 단 몇 년 사이에 방심과 거짓진술로 처참하게 무너졌단 말인가?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누군가'의 개입을 상정하는 순간, 기존에 알던 상식은 가차없이 전복된다. 모든 것은 '누군가'의 계획에 의해 벌어진 일이며, '누군가'는 그 결과 지금 이 세계를 지배하는 '세계의 제왕(들)'으로 군림한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들)을 지켜보고 있다. 혹시라도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릴지 모르기 때문에...
 
은비주의, 귀신떨거지들 그리고 상호전거성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진자'(1988)은 '은비주의(隱秘主義)'로 칭해지는 음모이론에 대한 소설이다. 많은 독자들이 이 소설 앞에서 종종 무릎을 꿇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번역자 이윤기 씨도 후기에 서술했듯이 이야기 자체보다 이야기 속 상징에 대한 설명이 끊임없이 곁가지를 치고 나가다 보니 그와 관련된 일정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쉬이 지치게 만들기 때문이다. 역자조차 소설의 내용을 독자들에게 충실히 해석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반 년 가까이 세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본문의 라틴어, 에스파냐어, 프랑스어 문구 등을 일일히 한역(차라리 일본식의 '훈독'에 가까운)하고 또 번역해냈다지만, 일단 그 방대한 지적 규모-즉, 기호의 세계-에 많은 사람들이 질려버리곤 한다.

'푸코의 진자'의 강점이자 단점이기도 한 이 지점은, 추리 형식의 전개로 사건에 흥미진진함을 부여하는 '장미의 이름'이나, 유쾌하고 냉소적인 수사로 독자를 이야기 안으로 끊임없이 빨려들게 만드는 '바우돌리노'의 기술(記述)과는 상당한 거리를 둔다. 작품은 주인공 까소봉이 1984년 6월 23일 밤 동안 프랑스 파리의 국립 공예원 박물관(국내에서의 정식번역명은 '파리 국립기술공예박물관')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구조와, 그로부터 약 이틀 뒤 작중 주요 인물인 야코포 벨보의 시골집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두 가지 이야기 구조 속에서 진행된다. 그러다 보니 서술이 과거와 현재를 왕래하여, 이야기에 몰입하는 데에 상당한 혼동을 초래한다.
이런 서술전략은 작품 안에서 까소봉과 야코포 벨보, 디오탈레비 등 가라몬드 출판사 편집자들이 음모를 '창조'하는 과정과 맞물린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음모를 만들었는가.

최초의 시작은 '성당기사단의 전설'이었다. 십자군 전쟁 시대에 '그리스도와 솔로몬 성전의 청빈 기사단'에서 출발한 그들은 전쟁 과정에서 전투를 통한 영광 뿐만 아니라 중세시대에 흔히 그러했듯 상당한 봉토(封土)를 차지하였고 더 나아가 금융권에까지 손을 대어 유럽에서 손에 꼽히는 거대 세력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러던 그들이 1314년 프랑스의 왕 필립 4세에 의해 몰락한다. 공식적인 역사기록은 여기까지다. 이후의 이야기는 말 그대로 '흑역사', 우리말로 하자면 '야사(野史)'에 가깝다. 아르덴티 대령이라는 사람이 성당기사단 조직이 파괴된지 약 500년 쯤 뒤에 앙골프라는 사람이 발견한 프로뱅의 '밀지(密紙)'의 비밀을 알고 있다 주장하며 출판을 위해 불쑥 자료를 내미는 거다. 이른바 작중 '귀신 떨거지들'-주인공들은 은비주의를 비롯한 음모이론에 미친 사람들을 이렇게 불렀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상호전거성(相互典據性, intertextuality)'이라는 개념이 불쑥 나타난다. 한자보다는 영어로 살피는 게 더 쉬울 게다. inter(~사이에)-text(글 혹은 이야기 혹은 담론)-uality(능력 혹은 가능성 혹은 역능), 즉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의 연관성을 찾아내고 그 연결고리를 바탕으로 둘의 기원을 탐구하는 전략으로, 유명한 이야기로는 선사시대의 홍수전설과 각 지역마다 존재하는 '영웅신화' 그리고 장화홍련 전설의 수많은 유사민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까소봉 등은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의 상호전거성을 바탕으로 비슷한 이야기면 무조건 연관시킨다. 성당기사단과 장미십자회를 연결하고, 불사신으로 일컬어지는 생 제르맹과 유대인 탄압을 연결짓고, 에펠탑과 지자기장(地磁氣場, 지구 내부에 흐르는 거대한 에너지. 이 에너지를 손에 넣은 자가 바로 '세계의 제왕'이라는 믿음이 있다)과 지구공동설(地球空洞說, 지구 내부는 흙으로 메꿔진 것이 아니라 거대한 지하세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놀라운 문명이 자리잡고 있다는 전설) 따위를 연관짓는다. 그런데 이들의 전략은 바로 그들이 비웃어마지 않던 '귀신 떨거지들'의 것이었다. 처음부터 그들을 믿지 않았던 편집인들은 점차 '연금술적 사고'에 휘말려 역사와 '흑역사'를 혼동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그 때가 파멸의 시작이다.

상호전거성이란 무조건 이야기 사이의 공통점을 연관짓는다고 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논리는 있을지언정 '상식'이 없이는 파도 속에 돛을 잃은 채 난파하는 배 신세가 되고 만다. 까소봉 일행은 그렇게 자신들을 잠식해 가는 파도 한 가운데로 이야기에 취한채 뛰어든다.
"내용없는 사상은 공허하고, 개념없는 직관은 맹신이다" 라는 칸트의 명언은 이들의 귀에서 점점 멀어진다.

내용없는 사상은 공허하고, 개념없는 직관은 맹신이다.

음모론을 접할 때마다 종종 느끼는 것은, 다름 아닌 불쾌함이다. 역사가 특정한 엘리트(집단)의 손에 좌지우지 된다면 '나'를 비롯한 개체의 어리석음과 무능력만이 남게 되기 때문이다. 역사를 뒤집어 봄으로써 갖는 재미는 잠깐이다. 본문에서 제시했듯이 역사에 개입하는 '신'의 자리에 '음모가들'이 들어섰을 뿐이다. 작품은 이런 음모론의 역사가 유럽에서 상당한 전통(?)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 전통이란 것은 인도의 아가르타 전설(지구공동설과 비슷하다)과 이슬람의 산노인 전설('어쌔신'의 어원으로 유명한 하시시 암살단) 등 아시아의 전설을 유럽의 역사에 끼워맞춘, 지극히 유럽중심적인 것에 불과하다. 작가의 네 번째 소설 '바우돌리노'의 주된 이야기가 십자군 전쟁 시대의 전설이었던 '프레스터 존의 왕국'(이슬람 왕국을 넘어선 '동방'에 기독교를 믿는 왕이 강대한 세력을 떨치고 있다는 전설. '동방견문록'의 마르코 폴로는 평생 동안 칭기즈 칸 이전의 타타르 부족장이 바로 전설의 프레스터 존이라고 믿었다)을 찾기 위한 여정이었다는 점 역시 같은 맥락이다.

'푸코의 진자'는 음모를 '사실'로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음모에 대한 '믿음'임을 드러낸다. 주인공들이 낄낄거리며 창조했던 음모를 절실하게 믿어버린 누군가는 그 음모를 기정사실화 시키고야 만다. 이 과정은 종교에 대한 일반론으로 대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믿음이란 신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행위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자신이 거짓이라고 믿었던 이야기가 사실로 다가와 자신의 목을 조르려 들 때, 게다가 그것이 자신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상기했을 때의 공포란? 자신이 창조한 괴물을 바라보는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심정이 그와 비슷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주인공들이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자기 자신'을 지키는 전략은 바로 상식과 인간성으로 회귀하는 것이었다. 위험을 눈앞에 두고 벨보의 시골집에서 한가로이 산을 바라보는 까소봉의 모습은 맹신과 어리석음으로 가득한 세상에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중 하나일지도 모를 일이다.
음모론을 살필 때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바로 '상식'이다. 현실적인 균형감각 없이 망상과 맹목의 바다에 뛰어들어선 곤란하다. 하긴, 그것이 어찌 음모론에만 해당되는 일일까. 지금 여기, 그리고 향후 5년, 더 나아가 이 '세대'에 상식과 균형없는 맹목의 바다가 펼쳐져 있으니까.

덧붙이자면, 작품의 밀도는 무척 높은데 번역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번역상태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다. 도처에 주석을 달고 해석을 붙여도 끊임없이 매복해 있는 개념의 파상공세를 당해내긴 쉽지 않은데, 인물들의 대화나 서술에서 너무 옛스러운 말투가 툭툭 튀어나오고 거기다가 군데군데 오, 탈자가 보이는 것은 무척 아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풍부한 소설을 번역해 낸 이윤기 씨에게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해준 것에 그나마 감사해야 할 터이지만 조금 입맛이 쓰다.

마지막으로, 아무래도 장편이다 보니 이야기 자체의 호흡이 길어 다소 산만한 감도 있고, 68혁명의 여운이 상당히 남아있어 에코 개인의 의식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선 듯한 느낌도 든다.


푸코의 진자 1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나의 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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