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은 오랫동안 내가 관심을 갖고 생각해오던 주제다. 수입이 변변치 않던 시절에는 기본소득이 청소년, 청년 들과 빈곤층의 가난을 해결하고 일정 수준의 생활력을 확보할 보편적인 권리가 되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일을 하고 일정한 수입을 얻으면서 기본소득에 대한 생각도 점차 바뀌었다.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에서 정의한 '국가가 모든 구성원 개개인에게 아무 조건 없이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소득'이라는 기본소득 개념부터 걸리기 시작했다. '모든 구성원'은 과연 누구이며 어디까지 포함/배제할 수 있을까? 기존의 복지제도를 건드리지 않은 채 현금 지급을 대폭 늘리는 게 가능할까? 아무리 금액을 늘리겠다고 하더라도 지급액의 한계가 발생하는데, 적은 액수의 소득을 주는 것으로 생활력의 확보가 가능한 걸까?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를 비롯해 여러 활동가가 기본소득을 주요 정책 의제로 끌어올리면서, 내게는 기본소득에 대한 거부감이 조금씩 자라났다. "19세기에는 노예해방, 20세기에는 보통선거권, 21세기에는 기본소득"을 슬로건으로 내세운 기본소득 활동가들은 계급투쟁의 수단으로 생각하던 기본소득에 맹목적으로 사로잡혀 이제는 물신화하는 수준으로 올라간 것은 아닐까? 사회당이 진보신당과 합당해 노동당을 만들고 이른바 기본소득 활동가가 중심이 된 '비선조직'이 드러난 뒤, 기본소득파는 아예 당명을 '기본소득당'으로 바꾸자고 주장하다가 탈당해 기어이 기본소득당을 만들었다. 그리고 더불어민주당의 위성정당 창당에 투신해 1명의 의원을 배출하는 데 성공했다. 성남시장 시절의 이재명과 줄이 닿아 그가 기본소득을 주요 대선 공약으로 삼은 것도 활동가들로서는 고무적이었을 것이다. 자신들이 믿는 정책을 사회 의제로 띄우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수행하는 의지는 높게 살 만하다.
하지만 나는 활동가들이 기본소득을 변혁의 만병통치약으로 믿고 달려갈 때, 그들이 지나쳐버리는 것이 있다고 본다. 바로 실물이다. 화폐는 그 자체로 아무것도 아니다(그와 함께 화폐가 없이는 상품 교환도 없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중핵이기도 하다). 화폐는 상품의 교환을 위해, 무엇보다 자본의 재투자를 위해 국가가 발행하는 증서다(무형이냐 유형이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또한 암호화폐는 자산 성격이 매우 크기 때문에 제외한다). 인플레이션률에 따라 가치의 절하가 발생하고, 여기에 한국과 같은 비기축통화국은 환율로 크게 휘청이기까지 한다. 정말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구매력이며, 구매력을 통해 얻고자 하는 '재화와 서비스'가 더 중요하다. 수중에 화폐가 많다 해도 초인플레이션으로 가치가 급락하거나 상품 지급을 거절당할 때 보통 사람은 그와 같은 위험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 이렇게 생각했을 때 기본소득 지급을 위한 재원은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나, 덜 결정적이다(여러 기본소득 연구자가 탄소세부터 연말정산 폐지/감축에 이르기까지 재원 마련을 위한 방안을 다양하게 제시해왔다. 모두 기본소득을 보다 많은 사람에게 설득하기 위해 제안된 것이지만, 아무리 합리적인 외양을 보인다 하더라도 기본소득의 핵심 개념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상쇄하지는 못한다. 바로 보편적 현금 지급이라는 문제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지금 당장 월 65만 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하더라도, 그 돈은 대부분 주식투자나 투자를 위한 종잣돈으로 흡수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기본소득은 아무리 금액을 늘리더라도 거대한 자산 격차를 해소하지 못한다(소비에만 쓰일 수 있도록 지역화폐로 지급하는 방안은 기본소득의 원리에도 어긋나는 꼼수다. 상품권은 유가증권이지 화폐가 아니기 때문이다. 상품권으로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급할 수는 있겠지만, 자본에 재투자할 수는 없다). 현금 지급 자체는 정책 수단일 뿐, 그 자체로 체제 변혁을 이끌 수는 없다. 기본소득은 '자본의 반격'과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길을 잃은 사회운동이 찾아낸, 오인된 탈출구다. 그 끝은 허망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제는 기본소득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하고 그에 따라 보다 명확한 대안을 찾아보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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