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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Archive

인간도 사물도 모두 '객체'다?

by parallax view 2017. 3. 7.

리뷰 아카이브 기고문(17.02.23) 

<인간도 사물도 모두 '객체'다?> 



인간도 사물도 모두 '객체'다? 

객체 지향 존재론과 행위자연결망이론으로 보는 과학기술학 연구의 최전선 


  최근 철학과 사회학, 인류학에서는 ‘존재론적 전환’ontological turn이라 할 만큼 ‘새로운 유물론’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 객체 지향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 행위자연결망이론actor-network theory 등 생소한 이론들이 해외의 학계를 들썩이고 있으며 국내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중이다. 독일 최연소 철학 교수라는 타이틀로 무장한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책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열린책들, 2017)의 출간은 철학의 존재론적 전환이 대중화된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론적 전환은 사물인터넷과 자동주행자동차 실험이며 유전자조작식품과 인공수정 등 기술과학의 한계를 시험하는 현 상황은 물론, 기후변화 등 생태학적 파국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의 연장선에 놓여 있는 듯하다. 


  김연철 박사와 이준석 경희대 과학기술사회연구센터 학술연구교수의 「행위자-연결망 이론(ANT)과 사변적 실재론(SR)의 접점: ‘해석적 유연성’ 개념으로 본 ‘책임 있는 연구와 혁신’」(사회와이론 통권 제28집, 2016년 5월)은 현재 과학기술학STS 분야에서 주된 이론으로 자리 잡은 행위자연결망이론을 사변적 실재론, 그중에서도 객체 지향 존재론과 연결하려는 의도로 작성되었다. 저자들은 객체 지향 존재론을 통해 행위자연결망이론을 존재론화함으로써 오늘날의 기술과학을 더욱 면밀하게 설명할 수 있으며 ‘민주적 기술 거버넌스’를 달성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이 논문을 통해 최신의 이론적 경향을 알 수 있는 것은 물론, 이런 시도가 왜 나타나는지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객체 지향 존재론은

대체 무엇인가 


  우선 사변적 실재론SR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SR은 2007년 영국 골드스미스 칼리지에 모인 레이 브레시어와 이안 해밀턴 그랜트, 그레이엄 하먼, 퀭탱 메이야수로부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유한성 이후』(도서출판 b, 2010)의 저자 메이야수는 칸트 이후의 철학이 존재를 인간의 의식 속에서 포착되는 것만으로 한정한다고 비판하면서 이런 접근을 ‘상관주의’correlationism이라 명명했다. 거칠게 SR로 묶였던 네 철학자들은 이후 ‘상관주의 반대’라는 철학적 지향을 공유하는 것 외에는 자신만의 입장을 고수했다. 논문의 저자들은 이들 중에서 그레이엄 하먼의 객체 지향 존재론OOO에 방점을 찍는다. OOO는 모든 존재를 객체로 환원하고자 하는 이론적 입장이다. 이때 객체는 감각객체sensual object와 실재객체real object로 구분된다. 감각객체는 인간이나 다른 동물 혹은 기계에 의해 지각되는 객체다. 반면 실재객체는 모든 인식과 지각으로부터 물러난withdraw 객체다. 나무가 쓰러졌을 때 이를 지각할 수 있는 개체가 아무도 없고 그 쓰러짐으로 인해 발생한 음파가 주변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항상 완전한 이해로부터 물러나는 객체가 실재객체다. 


  하먼은 (비록 저자들이 이 논문에서 후설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에드문트 후설과 마르틴 하이데거의 논의를 비판적으로 독해하면서 객체가 담지하고 있는 속성 또한 두 가지로 나눈다. 감각속성sensual quality과 실재속성real quality이 그것이다. 감각속성은 객체가 발산하는 정보나 속성 중에서 주체가 인식 가능한 정보나 특질을 의미한다. 한편 실재속성은 객체가 발산하는 정보 혹은 특질이면서 직접적인 이해나 파악으로부터 숨어 있는 속성을 가리킨다. 여기서 저자들은 객체와 속성의 쌍이 다음과 같이 연결된다고 설명한다.



  논의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감각객체의 감각속성은 통시적으로 파악되기 때문에 이 둘의 만남을 시간time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편 실재객체의 감각속성은 공간space로 해석할 수 있다. 객체가 발산하는 정보를 직접적으로 파악하지는 못하더라도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는데, 이때 정보가 인간의 의식으로 들어오기 위해 일정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감각객체의 실재속성은 형상eidos이라 부른다. 객체를 누가, 어떤 각도에서 보더라도 객체 자체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다. 이를 대상영속성이라 부르며 여기서 감각객체의 실재속성을 유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실재객체의 실재속성은 본질essence이다. OOO의 접근을 따른다면 본질은 모든 인식과 지각으로부터 물러났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객체 지향 존재론으로

행위자연결망이론을 다시 읽다 


  이후 저자들은 OOO의 2x2 도식을 더욱 구체적으로 도식화하는 한편, ‘칸토어의 무한사영’을 이용해 이 도식을 3차원적으로 형상화한다. 여기서는 이에 대한 설명을 생략하고 저자들이 OOO를 행위자연결망이론ANT과 연결하고자 하는 시도에 집중하고자 한다. 저자들은 존재를 객체와 그것들의 연결망으로 이해할 때 ANT를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고 관련 연구를 더욱 잘 수행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ANT의 기본적인 개념은 행위자actor와 연결망network이다. 이때 행위자는 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과 자연현상, 기계까지 포함한다. ANT 이론가들은 행위자들이 기호학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행위소actant라는 용어를 더욱 선호한다. 그런데 행위소라는 개념은 연결망에 연결되어 있는 것만 관심을 둔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인간과 연결되지 않는 개체를 설명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저자들은 행위소가 객체임을 이해할 때 행위소에 대한 협소한 이해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고 본다. 


  저자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칸토어의 무한사영을 이용한 3차원 형상화의 한 부분을 예로 들며 사회과학적 연구를 재정의한다. 말하자면 사회과학 연구란 관찰 가능한 감각객체에 대한 감각속성을 종합해 실재속성(즉, 형상eidos)을 알아내는 것이다. 이때 사회과학의 두 가지 연구 전략이 도출되는데, 첫 번째는 위상학topology이고 두 번째는 계보학genealogy이다. 위상학은 미셸 푸코의 에피스테메episteme나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paradigm처럼 ‘특정 시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사고의 틀’을 연구하는 접근법이다. 그런 점에서 위상학은 공시적이며 ‘인식의 평면’ 위에서 감각객체에 대한 실재속성들 간의 불일치(논쟁controversy)를 연구하는 것이다. 한편 계보학은 통시적인 접근으로, 동일한 감각객체에 대한 여러 감각속성의 변화를 시간적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이때 저자들은 공시적·공간적인 위상학과 통시적·시계열적인 계보학은 실재객체의 본질을 추적하는 분석적 방법의 구분일 뿐이며, 어떤 접근법이든 연구의 대상은 결국 연결망의 형태로 드러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렇게 ANT의 입장을 견지하는 저자들은 ANT의 세 가지 주요 명제인 ‘확장된 불가지론’과 ‘일반화된 대칭성’ ‘자유로운 연합’을 객체 지향 존재론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한다. 확장된 불가지론은 기존의 과학사회학이 자연과학(자)을 분석할 때 이를 선별적으로 다룬다고 비판하면서 나온 입장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사회과학 또한 관찰자의 불가지론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확장된 불가지론은 모든 대상을 객체로 환원하는 OOO를 만남으로써 더욱 진전된다. 사회학자의 연구든 자연과학자의 연구든 모두 객체의 연구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일반화된 대칭성은 자연과 문화,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구분을 폐기하고 이들이 완전히 대칭적인 관계에 있다는 주장이다. 마찬가지로 객체로의 전환은 일반화된 대칭성을 더욱 철저히 추구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자유로운 연합이란 일반화된 대칭성을 통해 기존의 인식론적 구분이 사라지면서 어떤 것이든 서로 연결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 또한 모든 인간/비인간 행위자가 객체로 환원되면서 존재론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ANT와 OOO의 만남으로

민주적 기술 거버넌스를 달성한다? 


  저자들은 ANT에서 중요한 것이 ‘번역’translation임을 강조하면서 번역의 네 가지 단계(문제제기-흥미끌기-등록-동원)를 객체 지향 존재론적 관점에서 다시 쓴다. 논의가 길어지니 여기서는 생략하고 논문의 마지막 부분을 살펴보자. 저자들은 ANT가 실재론을 무시하는 구성주의라는 비판을 받았음을 상기한다. 말하자면 특정한 해석이 (모든 행위소의) 이해관계의 네트워크 양상에 따라 부여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이 해석적 유연성interpretative flexibility이다. 기술의 사회적 구성Social Construction of Technology에서 주요한 개념인 해석적 유연성은, 기술이 사회의 다양한 행위자에 의해 생산, 사용, 번역되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OOO는 기술적 대상을 비롯한 행위소를 객체로 간주하기 때문에 “해석은 특권자에 의해 관계로부터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로서의 객체가 다른 객체와의 관계맺음을 통하여 창발하여 드러나 발견되는 속성(141쪽)”이 된다. 이제 해석은 연구자의 자의에 달린 것이라는 오해에서 벗어나 기준이 되는 객체를 중심으로 하는 연결망의 위계에 따른 작업이라는 것이다.


  해석적 유연성의 갱신된 명단은 민주적 기술 거버넌스를 향한 디딤돌이 된다. 기술혁신의 과정을 객체의 관점에서 살펴볼 때, 어떤 기술혁신이 성공적인지 또한 밝혀낼 수 있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성공적인 기술혁신은 특정한 기술적 대상이 다른 객체들과 얼마나 강력한 연결망을 구축하느냐(ANT의 표현을 빌자면 “어떻게 이 행위소가 ‘의무통과점’에 놓이느냐”)에 달렸다. 여기서 기술 거버넌스가 중요해진다. 법률과 같은 객체가 특정한 객체를 강화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을 기술 거버넌스라고 했을 때, “민주적 기술 거버넌스란 기술의 형태를 가진 객체들이 사회 속에서 작동될 때 어떤 의무통과점을 거치도록 강제하되, 그 의무통과점은 민주적 절차를 통해 확립되어야 함을 의미(146쪽)”한다. 저자들은 시민사회의 참여를 통한 참여적 기술 거버넌스의 형성, 거기서 비롯되는 책임 있는 연구와 혁신Responsible Research and Innovation은 원자력의 평화적인 이용이나 폐기, 인간유전제프로젝트가 고용이나 보험에 미치는 악영향을 막는 문제 등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하며 논문을 끝마친다. 


  요약하면 저자들은 ANT를 OOO로 재해석함으로써 그동안 인식론에 그친다거나 또 다른 구성주의라는 비판에 직면했던 ANT를 존재론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레이엄 하먼은 (ANT의 주창자인) 브뤼노 라투르의 관점을 관계주의relativism라고 비판했는데, 저자들은 연결망으로부터 ‘물러나는’ 객체라는 문제를 논문에 언급만 했을 뿐 이에 주의를 덜 기울인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게다가 ‘민주적 기술 거버넌스’의 강조는 기존의 시민사회론을 단순히 반복하고 있을 뿐은 아닌가. 다만 ANT를 존재론화하고자 하는 이런 시도는 기술적 대상의 진화와 변동에 온통 관심이 쏠린 이 시대의 주요한 증상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