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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Archive

"불꽃 한 점이 들판을 태운다"

by parallax view 2017. 3. 7.

리뷰 아카이브 기고문(17.01.11) 

<"불꽃 한 점이 들판을 태운다"> 



"불꽃 한 점이 들판을 태운다" 

바디우와 지젝의 '공산주의 가설'을 통해 본 '도래할 민주주의' 


  2017년은 여러 가지 면에서 뜻깊은 해다. 현직 대통령의 탄핵이 이뤄지느냐 마느냐 하는 이슈와 함께, 이르든 늦든 대통령선거가 예정되어 있다. 또한 올해는 6월 항쟁 30주년이며 무엇보다 러시아 혁명 100주년이다. 한국은 아직 조용하지만, 세계 곳곳에서는 러시아 혁명을 기념하는 학술대회며 각종 행사가 연이을 것으로 예상된다(이 와중에 한국에서는 ‘노동자의책’ 대표가 ‘이적표현물’을 판매해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는 단지 100주년이라는 숫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로 수많은 이들이 ‘신자유주의의 종언’을 외쳤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모순과 질곡을 돌파할 대안은 생산하지 못한 채, ‘4차 산업혁명’ 같은 자본의 담론만이 횡횡하기 때문에 도리어 많은 이들이 ‘공산주의의 유령’을 복기하려는 것은 아닐까. 


  박도영 한국교원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의 「공산주의와 ‘도래할 민주주의’: 바디우와 지젝의 ‘공산주의 가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마르크스주의 연구 11권 1호, 2014년 2월)는 ‘공산주의 가설’을 제시하며 현 질서를 이론적으로 돌파하고자 하는 알랭 바디우와, 그와 일종의 이론적 동맹을 맺은 슬라보예 지젝의 공산주의를 간략하게 검토하는 논문이다.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이 지적 스타들이 어째서 공산주의라는, 다시는 반복되어선 안 될 실수나 비극으로 간주되곤 하는 이념을 제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자본주의 외의 대안은 없다는 주장을 반박하고 ‘이데올로기의 종언’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때 연구자는 바디우와 지젝이 ‘공산주의 가설’을 표방하면서 민주주의를 적대하지만, 민주주의 개념에 대한 혼동 또한 보인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사소하고 우발적인 사건이 ‘도래할 민주주의’로 도약할 가능성을 긍정한다. 



바디우와 지젝의 

‘공산주의 가설’ 


  먼저 바디우는 니콜라 사르코지의 대통령 당선을 통해 프랑스 좌파의 무력함이 노출되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민주주의의 공리인 선거가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는 보수적인 기능을 수행할 뿐이라고 비판하면서, 사르코지의 당선은 타락한 자가 당대의 도덕적 위기를 돌파할 것이라 기대하는 ‘패탱주의’의 반복이라고 주장했다. 패탱주의는 현재의 위기가 과거의 파국적인 사건 때문에 발생했다고 지목하는 경향을 일컫는다. 바디우는 1815년의 왕정복고에서는 프랑스 혁명이, 나치 치하의 패탱 정부에서는 인민전선과 대파업이 위기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다면, 사르코지 정부에서는 68혁명이 그러했다고 보았다. 혁명과 그 여파를 두려워한 유산계급이 치안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인물을 지지했을 때, 좌파는 거꾸로 우파에 대한 공포 때문에 무력했다는 것이 바디우의 지적이다. 이때 바디우가 이론적·실천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바로 ‘공산주의 가설’이다. 공산주의 가설은 “계급논리에 의거하지 않은 다른 집단적 조직이 실천 가능하다는 것(69쪽)”을 뜻한다. 여기서 그는 공산주의 가설이 “강령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칸트가 규제 기능을 가진 이념이라 불렀던 것이어서 항상 다른 형태로 실연되는 평등의 순수 이념(70쪽)”이라고 덧붙인다. 


  한편 지젝은 바디우 식의 논의가 공산주의 가설을 일종의 ‘규제적 이념’에 그치게 한다고 비판한다. 공산주의를 모두가 따라야 할 일종의 공리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또한 지젝에 따르면 그런 식의 논의는 공산주의의 해체적 읽기로 빠진다. 공산주의의 해체적 읽기란 공산주의를 역사를 초월한 ‘영원한 이념’으로 간주하는 것을 가리킨다. 자크 데리다의 논의가 대표적인데, 연구자는 지젝의 비판과 달리 공산주의를 규제적 이념으로 보는 관점은 데리다보다 가라타니 고진에 더 가깝다고 지적한다. 다시 지젝의 주장으로 돌아오면 그는 바디우나 고진처럼 적대를 낳는 구조를 강조하는 게 아니라, 강력한 적대의 담지자로서의 주체 또는 행위자에 집중한다. 지젝은 오늘날의 세계자본주의를 위협하는 강력한 적대로, 다가오는 생태적 파국, 지적재산권과 관련한 사유재산 개념, 유전자공학 등 새로운 기술과학적 발전, 새로운 아파르트헤이트의 생성을 든다. 이 네 가지 적대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네 번째인 새로운 아파르트헤이트, 즉 “자기 자신의 실체에서 배제되는 자들의 프롤레타리아화 과정(74쪽)”이다.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 사이의 적대를 논하지 않는다면, 다른 세 가지 적대는 각각 현재의 질서 내에서 소화할 수 있는 위기 정도로 격하된다는 것이 지젝의 주장이다. 



바디우와 지젝은 '공산주의 가설'을 주장하면서 현재의 지배질서를 돌파하고자 시도한다.


도래할 민주주의를 

유보 없이 환대하기 위하여 


  그렇다면 바디우와 지젝은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떤 점에서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일까. 지젝은 공산주의 국가의 실패 못지않게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는 물론, 급진민주주의 좌파가 강조하는 대항국가 모델(“자발적인 자기조직화와 직접민주주의, 평의회 등을 통해 화석화된 국가 구조에 맞선다는 생각(75쪽)”) 역시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1968년 이후 세계 자본주의가 이윤 추구에서 지대 추구로 선회하면서 ‘공통적인 것’에 대한 엔클로저가 발생했으며, 여기서 앞서 말한 네 가지 적대가 출현한다고 보았다. 공통적인 것에 대한 엔클로저는 권위주의적이고 억압적인 국가가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이기에, 자본주의를 민주화함으로써 대응할 수 있다는 논리 또한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지젝은 민주적 메커니즘 자체가 자본의 무조건적 재생산을 보장하는 부르주아 국가 기구의 일부를 형성한다고 지적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바디우는 정당하게도 오늘날 궁극적인 적의 이름은 자본주의나 제국, 착취, 그런 어떤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라고 말했다.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바로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줄 유일한 프레임으로 민주적 메커니즘을 수용하는 것이다(지젝, 2013a: 37).” (76쪽) 


  이때 바디우는 공산주의로 향하는 마르크스주의적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대중은 계급으로 분리되고, 계급은 정당에 의해 대의되며, 정당은 지도자에 의해 지도받는(77쪽)” 레닌주의적 기획을 비판한다. 그는 ‘빼기의 길the subtractive way’을 가야 한다고, 국가의 영역에서 스스로 물러나 “지배적인 상황의 법들로부터 독립된 새로운 공간을 창조(77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지젝은 바디우가 말하는 ‘빼기의 길’은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유지할 뿐이며, ‘진정한 빼기의 길’은 시스템을 타격하는 행위라고 재해석한다. 여기서 지젝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강조하며 극적으로 도약한다.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에 머무는 게 아니라 아예 기존의 정치 질서를 무너뜨리는 정치로서 레닌주의를 다시금 긍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연구자는 민주주의가 지배적인 정치체제가 된 오늘날, 바디우와 지젝이 민주주의를 비판의 과녁으로 삼은 데 이론적인 난점이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는 모두 민주주의자다”라는 식의 선언은 대중의 저항을 선거로 순치시킨다는 점에서 보수적이다. 하지만 연구자는 민주주의가 “사회-정치적 공간 안으로의 배제된 자들demos의 침입을 일컫는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한 이름(82쪽)”이라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든 빼기의 길이든 얼마든지 민주주의로 번역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들에게 개념의 혼동이 있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연구자는 민주주의의 형식적(절차적) 측면과 실질적 측면을 구분하고, 인민의 자기통치라는 실질적 측면을 추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연구자는 지젝이 바디우에 대한 애드리언 존스턴의 비판을 일부 수용했듯이, “사소한 사회적 개혁 조치들이 자칭 ‘급진적’ 변화들보다 훨씬 강력하고 광범위한 결과들을 초래하게 되는 상황은 분명히 존재(86쪽)”한다고 강조한다(이 표현은 마오쩌둥의 “불꽃 한 점이 들판을 태운다”는 연설을 연상시킨다). 그렇기에 연구자는 사건의 ‘우발적 토대’를 인정해야 하며, ‘도래할 민주주의’를 어떤 유보도 없이 환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듯 연구자는 민주주의의 인민적이고 급진적인 성격을 강조하며 ‘사건의 우발적 토대’를 긍정한다. 이는 이화여대 재단비리에 대한 학생들의 저항 등 얼핏 ‘사소해 보이는’ 사건들이 중첩되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상승해 촛불집회와 탄핵까지 이어지는 현 상황을 예시하는 듯 보인다. 어쩌면 우리는 ‘도래한 민주주의’를 이미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열정이 꺼지지 않아야 하는 것은 물론, 촛불을 든 사람들의 열정을 정확하게 집약할 역량 또한 절실히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