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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혁명'은 과연 무엇일까

by parallax view 2016. 11. 28.

리뷰 아카이브 기고문(16.10.25) 

<우리에게 '혁명'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에게 '혁명'은 과연 무엇일까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을 통해 혁명의 개념 변화를 살피다 


  구력(율리우스력) 1917년 10월 23일은 러시아 10월 혁명이 일어난 날이다. 그레고리력으로는 11월 5일이지만, ‘10월’은 여전히 러시아 혁명의 상징이다. 이제 내년이면 러시아 혁명 100주년이다. 에릭 홉스봄이 이야기했듯이 20세기는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로 막을 내렸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혁명은 지나간 역사적 사건을 언급하거나 기술적 혁신을 강조하는 수사로 쓰일 뿐이다. 하지만 거대 서사가 붕괴한 ‘탈근대’를 살아가는 지금도, 우리는 평등을 향한 열망을 호흡하며 살아간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여전히 혁명의 아이들인 셈이다. 길윤미·문경자 경북대 인문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의 「‘혁명’의 개념 변화에 관한 고찰: 프랑스와 러시아의 경우를 중심으로」(동서인문 2집, 2014년 10월)는 혁명이라는 개념이 역사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살펴본다. 그럼으로써 혁명에 대한 당대인들의 긍정적 확신과 부정적 인식, 그리고 혁명 개념을 둘러싼 갈등을 조명한다. 


  혁명revolution의 어원은 라틴어 레볼루티오revolutio다. ‘별이 주기적으로 궤도의 한 지점에 회귀하는 현상’을 뜻하는 레볼루티오는 우주의 질서를 가리키는 용어였다. 그러니까 레볼루티오는 격렬한 변화보다 천체의 순환 같은 질서정연한 흐름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반면 고대 유럽에서 근대적인 의미의 혁명에 보다 가까운 용어는 플라톤이 『티마이오스』에서 언급한 메타볼레metabolê였다. 기독교가 지배적이었던 13~16세기 유럽에서 프랑스어 레볼뤼시옹révolution은 ‘신이 정해놓은 시간의 완성’이었다. 이렇게 레볼루티오의 어원과 기독교 세계관이 결합하면서 ‘혁명’에 ‘단절’이라는 의미가 스며든다. 레볼뤼시옹은 자연이나 종교뿐만 아니라 세속의 일을 나타내는 데에도 쓰이면서 순환이나 회귀의 의미는 희미해지고, 변화나 변질의 의미가 더욱 두드러졌다. 


  레볼뤼시옹이 본격적으로 근대적인 의미를 가진 것은 영국의 청교도 혁명과 왕정복고 때부터다. 왕당파를 물리치고 공화정을 세운 올리버 크롬웰이 죽은 뒤 찰스 2세가 즉위하자, 왕당파는 이를 ‘영광스러운 혁명the glorious revolution’이라고 불렀다. 볼테르는 『철학 사전』(1764)에서 레볼뤼시옹을 ‘전복, 개혁, 정치적 위기, 급변’ 등과 유사한 어휘로 사용하는 동시에, 정치와 경제를 비롯해 폭넓은 영역에 적용했다. 레볼뤼시옹을 정치 용어로 정확하게 규정한 이는 몽테스키외였다. 그는 『법의 정신』(1748)에서 레볼뤼시옹을 ‘정치권력의 성격과 조직에 나타난 철저한 변화, 통치자가 아니라 정체를 바꾸는 정치적 사건’으로 정의했다. 이렇게 의미 변화를 겪은 레볼뤼시옹은 1789년 프랑스 혁명을 기점으로 ‘기존 권력을 다른 권력으로 대체하려는 목적을 위해 계획적으로 일으킨 일련의 연속적인 정치 사건들’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프랑스 혁명,

‘혁명’의 의미를 완전히 바꾸다 


  1789년 민중이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했을 때 “반란인가?”라는 루이 16세의 말에 라로슈푸코리앙쿠르 공작이 “아닙니다, 전하. 혁명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프랑스 혁명기의 대표적인 혁명가이자 자코뱅 당원이었던 생쥐스트는 “절반의 혁명을 하는 자들은 자기 무덤을 팔 뿐이다. 공화국의 확립은 곧 혁명에 대립되는 모든 것의 파괴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혁명이 체제의 변화를 가리키는 것으로 의미가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급진파인 자코뱅이든 온건파인 지롱드든, 혁명에 호의적이든 적대적이든 레볼뤼시옹이라는 말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변화를 가리킴과 동시에, 세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나타냈다. 


  하지만 혁명과 반혁명, 자코뱅의 공포정치와 총재정부의 반동이 포개진 격동의 시기 속에서 혁명에 회의적인 사람들 또한 늘었다. 공화주의를 지지했던 빅토르 위고 역시 “가난이 민중을 혁명으로 이끈다면, 혁명은 민중을 가난으로 이끈다”, “미래의 혁명을 피하려면 과거의 혁명을 받아들여라” 같은 표현을 통해 혁명에 대한 복잡한 심경을 내비쳤다. 혁명에 열렬히 가담했던 피에르 베르니오의 “혁명은 사투르누스처럼 제 자식들을 집어삼킨다”는 표현 또한 마찬가지다. 혁명에 대한 피로와 환멸은 “능숙한 사람들이 저지른 어리석음, 재간꾼들이 말한 기괴한 생각들, 정직한 사람들이 저지른 범죄, 바로 이것이 혁명이다”(루이 드 보날) 같은 반혁명적인 담론으로도 나타났다. 한편 공화주의자 프랑수아 바뵈프는 로베스피에르 사후, 혁명이 완료되었다는 총재정부의 선언에 “혁명은, 다시 한 번 말하건대 모두의 행복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행복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혁명은 완료되지 못한 것이 아닌가?”라고 응수하며 혁명의 영속성을 강조하고 사회적 변혁을 요구해 혁명의 성격을 더욱 급진적으로 규정했다. 프랑스는 1830년 7월 혁명과 1848년 2월 혁명, 나폴레옹 3세의 반동정치와 파리 코뮌을 거치며 격렬한 혁명의 시기를 맞았다. 혁명과 반혁명이 엇갈리는 와중에도 혁명의 의의는 강력하고 보편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혁명에 대한 다양한 관점에도 불구하고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이 다음 시대에 가져다 준 가장 큰 결실은 민중을 일깨운 계급의식과 혁명의 정신일 것이다. (…) 혁명의 모순을 목격했지만 빅토르 위고가 “혁명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필연에서 나온다.”(『레미제라블』, 1862)는 신념을 고수하며 혁명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놓지 않는 것 또한 민중의 의식을 일깨운 혁명의 정신 때문일 것이다.” (13쪽) 


  러시아 혁명은 프랑스 혁명의 해석에 다시금 강한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 혁명 당시 프랑스인의 관점은 프랑스 공산당 전 서기관이었던 로베르 위가 쓴 회고록 『공산주의, 변화』(1995)에서 가늠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프랑스 좌파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을 1789년 프랑스 혁명과 1793년 루이 16세의 처형을 계승하는 사건으로 상상했다. 그 때문에 스탈린의 참전 결정은 나치 점령으로부터 프랑스가 해방되는 것과 연결되었고, 스탈린의 공포정치는 자유의 적에게 자유를 허용하지 않으려는 혁명적 결단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살바도르 달리는 “러시아 혁명은 추위 때문에 뒤늦게 일어난 프랑스 혁명이다”라고 주장했다. 반면 앙드레 지드나 레몽 아롱은 혁명에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했으며, 알베르 카뮈는 혁명에 대한 실망감을 “혁명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인데, 모든 근대의 혁명들은 국가를 강화시킬 뿐이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은 '보편사'라는 점에서 여전히 중요하다.


러시아 혁명, 

끊임없이 논쟁 중인 보편사 


  그런 점에서 러시아 혁명 역시 여전히 논쟁 중에 있는 사건이다. 러시아어 레볼류치야revolyutsiya의 기원 역시 라틴어 레볼루티오다. 레볼류치야가 러시아어에 나타난 시기는 18세기 초로 알려졌으며, 현대와 같은 정치 용어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 혁명 이후부터다. 한동안 관념적인 표현에 불과했던 레볼류치야는 1905년 제1차 러시아 혁명과 1917년 2월 혁명, 그리고 10월 혁명을 거치면서 러시아인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제정 러시아의 체제 불안과 러일전쟁의 패배, 세계 경제 위기가 포개지면서 발생한 1905년 혁명은 ‘피의 일요일’ 사건과 포템킨 호 반란을 거치면서 격렬해졌다. 하지만 당국의 유화정책으로 혁명 세력이 와해되면서 1차 혁명은 실패한다. 그리고 약 십여 년이 지나도록 불안정했던 정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달했던 1917년 2월, 수도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 봉기로 폭발했다. 2월 혁명이 성공하고 황제가 하야한 뒤 임시정부와 노동자·병사 소비에트의 불안정한 이중 체제가 유지되었다. 볼셰비키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토지, 빵, 평화” 등의 슬로건을 걸고 노동자 대중의 지지를 얻으며 1917년 10월에 봉기한다. 이를 10월 혁명이라고 부른다. 2월 혁명은 정치적 변화를 불러왔다는 점에서 ‘부르주아 혁명’으로, 10월 혁명은 노동자 대중을 대표하는 볼셰비키의 집권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 내지는 ‘볼셰비키 혁명’으로 간주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은 2월 혁명을 긍정적으로, 10월 혁명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10월 혁명은 2월 혁명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는 것이 통상적인 설명이다. 트로츠키가 대표적인 예다. 그는 “2월 혁명은 10월 혁명의 알맹이가 숨겨져 있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2월 혁명의 역사는 10월 혁명이라는 알맹이가 어떻게 그 껍데기로부터 분리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이다”라고 서술했다. 한편 10월 혁명을 방어하고 그 의미를 긍정하는 것은 소비에트 정권의 주된 사업이었다. 소비에트 정권에 반대해 망명했던 ‘방향전환파’ 역시 “소비에트 정권은 비록 결함은 있을지라도 러시아에서 살아남아 혁명의 위기를 감내해 낼 수 있는 권력의 정점이다”라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이에 반해 러시아 혁명과 스탈린 독재를 동일선상에 놓는 반공주의적 시각과, 표트르 대제의 개혁과 러시아 혁명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해석(“국가는 살쪄 가는데, 국민은 여위어 갔다”) 모두 러시아 혁명의 극단적인 성격을 강조했다. 


  특히 혁명의 폭력성은 러시아 혁명을 해석하는 주된 가늠자였다. 레닌이 착취 계급의 해방은 폭력 혁명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본 반면, 1905년 혁명을 목도했던 톨스토이는 혁명의 목표가 ‘폭력으로부터의 인간 해방’, ‘진정한 자유’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톨스토이를 비롯해 20세기 초 러시아와 프랑스의 이론가들은 두 혁명을 비교하는 데 열의를 보였다. 프랑스의 혁명 이론가 마티에즈는 『볼셰비즘과 자코뱅주의』(1920)에서 자코뱅과 볼셰비키를 비교했고, 20세기의 볼셰비키가 19세기의 프랑스 혁명을 모방했다고 주장했다. 레닌과 트로츠키 역시 프랑스 혁명에 큰 관심을 보였다. 레닌은 19세기 혁명사를 연구하고 로베스피에르 전집을 읽었으며 프랑스의 전문 학술지 「프랑스 혁명」도 구독했다. 트로츠키는 ‘혁명의 자연사’ 규명을 시도하면서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의 비교 작업을 통해 혁명의 보편적 법칙을 추출하고자 했다. 


  10월 혁명 이후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고자 했던 혁명가들은 노선 갈등과 문화의 이데올로기화로 인해 좌절을 겪었다. 트로츠키는 ‘배반당한 혁명’이라는 표현으로 스탈린 체제를 강도 높게 비판하기도 했다. 구소련의 붕괴로 러시아 혁명에 대한 긍정적인 인상은 희미해졌지만,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강렬한 역사적 기억이다. 이때 혁명을 둘러싼 해석의 차이는 각각의 정치적 입장차를 드러냄과 동시에, 혁명이라는 경험의 외상적인 성격을 함께 보여준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혁명에 부정적인 오늘날, 우리에게 혁명은 어떤 어휘인지 다시금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