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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Archive

팍스 로마나는 정말로 평화로웠는가?

by parallax view 2016. 10. 20.

리뷰 아카이브 기고문(16.09.13) 

<팍스 로마나는 정말로 평화로웠는가?> 



팍스 로마나는 정말로 평화로웠는가? 

로마 역사 이야기 속 평화의 베일을 벗기다 


  한국과 중국, 일본에 위·촉·오 삼국시대가 있다면 서양에는 로마사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로마사는 영미·유럽권 소설가들이 한 번쯤 다뤄 보고 싶은 소재인 것 같다.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나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이 대표적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이후 한동안 시들했던 로마사가 최근 연이어 출간된 소설들을 통해 독자와 새롭게 만나고 있다. 특히 『스토너』로 국내 독자들에게 주목받은 작가 존 윌리엄스의 작품 『아우구스투스』(구픽, 2016)와, 『가시나무새』의 작가 콜린 매컬로의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교유서가, 2015)는 서기 0년을 전후한 로마 공화정 말기~제정 초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어째서 작가들은 로마 공화정 말기에서 제정 초기에 주목할까. 그만큼 그 시기가 잔혹하고 역동적이어서 대하 서사에 너무나 적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삼국지가 그렇듯 작가의 시선에 포착된 로마사를 완전한 사실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단적으로 일본과 한국에서 크게 유행했던 『로마인 이야기』 속의 ‘팍스 로마나’는 과연 ‘평화로운’ 시기였을까? 그 ‘평화’는 누구의 것이었으며 왜 그렇게 강조된 것이었을까? 차전환 충남대 사학과 교수의 「팍스 로마나: 평화의 선전」(사총史叢 88권 0호, 2016년 5월)은 ‘로마의 평화’라는 기치가 가리고 있는 역사의 베일을 조금씩 벗겨 내면서 그 평화의 이면에 무엇이 있었는지 살핀다. 논문은 평화의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을 드러냄으로써 우리가 역사를 이야기로 즐길 때 무엇을 잊지 말아야 하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롭다. 


“제국의 경계를 지켜라”

로마 제국이 팽창을 멈춘 진짜 이유는? 


  짧게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사이의 내전부터 길게는 로마와 이탈리아 동맹시 사이의 전쟁까지, 로마는 끊임없는 전쟁과 내전을 겪었다. 그 기간 동안 로마는 영토를 확장해 이탈리아 전역과 히스파니아(스페인), 북아프리카, 그리스, 소아시아(터키), 시리아, 갈리아(프랑스) 등지를 영토로 확보했다. 피비린내 나는 내전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가 최후의 경쟁자 안토니우스를 격파함으로써 가까스로 막을 내렸다.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를 새로운 이름으로 받은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는 스스로를 ‘프린켑스(제1시민)’라고 선언하면서 공화정의 복권을 공표한다. 하지만 복권된 공화정은 예전처럼 원로원 귀족이 ‘자유롭게’ 경쟁하고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동족과 투쟁하지는 못했다. 아우구스투스 이후의 로마 공화정은 제정 또는 프린키파투스(원수정) 체제라 불린다. 프린켑스가 군사력의 동원을 비롯한 실질적인 통치 권한을 독점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로 ‘황제’라 불리는 이들 프린켑스는 제국의 경계를 방어하는 것을 제1의 임무로 삼았다고 알려졌다.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가 세상을 떠날 때 그의 후임 황제인 티베리우스에게 전한 유훈은 제국을 기존 경계 안에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바로 이 시기 이후로 로마 제국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 즉 ‘로마의 평화’에 접어들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어째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팽창을 멈출 것을 유훈으로 전했을까. 전통적인 견해는 아우구스투스가 안전한 변방을 확보했기 때문에 더 이상 팽창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후대의 역사가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제국의 방어를 유일한 목적으로 삼은 분별 있고 신중한 정치가였다는 생각에 이의를 제기했다(123쪽).” 로마 제국의 팽창 억제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는 아우구스투스 치세와 그 이후의 로마 제국을 합리화하는 관점을 그대로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는 게 후대의 해석이다. 


  그렇다면 로마 제국이 팽창을 중단했거나 그 속도를 완화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학자도 이에 대해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사료가 명확하게 남아 있지 않은 데다 해석도 엇갈리기 때문이다. 다만 몇 가지 질문과 가설을 던져 볼 수는 있다. 


  ① 제국은 정말 더 이상 팽창할 수 없었을까? 제국의 변경은 기후와 풍토가 거칠어서 정복할 수 없다는 견해가 있었지만, 게르마니아(독일)나 파르티아(이란)의 지형이 과연 갈리아나 일리리쿰(알바니아·크로아티아 등지)보다 거칠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② 더 이상 팽창할 가치가 없었을까? 로마는 이미 비옥한 영토를 확보했기 때문에 더 이상 정복할 필요가 없었다는 주장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제정 시기의 지배적인 견해를 단순히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 


  ③ 팽창에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많은 것은 아니었을까? 군사작전에 들어가는 비용이 갈수록 커졌기 때문에 제국으로서는 광대한 전역에서 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브리타니아(영국) 정복에는 2개 군단의 추가 모집만이 있었을 뿐이며, 전쟁 자체가 가져온 막대한 이익을 고려하면 비용만이 문제가 될 수는 없었다. 


  ④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이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까? 서기 9년 큉크틸리우스 바루스가 이끄는 3개 군단이 게르마니아의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괴멸되면서 제국의 경계는 큰 위협을 받았다. 그 때문에 아우구스투스가 제국의 경계를 고수하는 쪽으로 선회했다는 주장이 있었다. 하지만 수백 년 동안 계속된 전쟁이 단 한 번의 타격으로 중단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⑤ 황제마다 통치 스타일의 차이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황제의 개인적인 성향에 따라 팽창 정책이 바뀌었다는 주장은 ‘팍스 로마나’의 성격을 구조보다 개인의 변덕이나 우발성으로 설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취약하다. 


  ⑥ 마지막으로 팍스 로마나는 정말 존재한 것이었을까? 아우구스투스가 다스리던 시대에도 변방에서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때 ‘평화’는 이탈리아와 로마 속주의 질서 회복을 가리키는 말에 더 가까웠다. 그렇긴 하지만 서기 1~2세기 로마 제국의 군사 활동은 공화정 시기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때 연구자는 T. 코넬의 견해를 따라 팍스 로마나를 직접적으로 추동한 것은 직업군대 제도의 확립이었다고 주장한다. 그전까지 로마 공화정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견인한 동력은 정치적 입신을 향한 원로원 귀족의 야망과, 농부이자 병사로서 공화정에 적극 참여한 평민의 단합이었다. 하지만 원로원 귀족들은 군복무 경험이 승진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던 공화정 시기와 달리 황제의 후원과 견제가 입신에 크게 영향을 미치면서 군사적인 팽창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무엇보다 로마 시민권이 확대되고 속주가 통합됨에 따라 군단이 속주 출신으로 채워지고 이들 병사가 변경을 방어하면서 군인은 더욱더 전문화되었다. 그런데 직업군인이 지탱하는 ‘로마의 평화’는 과연 우리가 오늘날 이해하고 있는 평화라는 개념에 얼마나 가까운 것일까. 


내전을 종식한 아우구스투스는 '평화'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내세웠다. 그 평화는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평화는 로마 제국의 

통치 이데올로기였다 


  공화정 시기의 로마인에게 평화pax란 ‘정의나 자비의 한 형태’, ‘계약의 한 형태’나 ‘계약관계의 부재’를 의미했다. 당시의 로마인은 평화를 별로 반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평화와 여가는 신체의 힘을 약화시키고 국가를 유지하는 자제력을 파괴(130쪽)”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로마인에게 평화란 항복한 적에게 부과하는 제약이었다. “로마인에게 항복은 절대적이어서 패자의 생명이나 재산, 최소한의 인권조차 보장해 주지 않았다(130쪽).” 로마인은 제국이 팽창하고 전쟁이 격화될수록 항복한 사람들을 더욱 자주 경멸하고 해쳤다. 평화는 강자의 권리였던 것이다. 하지만 내전이 격화되고 동족상잔이 그치지 않으면서 ‘공동의 평화otium commune’와 ‘시민의 평화pax civilis’가 사회적 이상으로 출현했다. 


  “공화정의 마지막 세기 내내 로마를 황폐화한 내전의 폭력을 억압하기 위해서는 상호주의적 정의 체제를 억제하고 내전의 승자로 등장한 군주가 보장한 자비로운 평화로 대체할 필요가 있었다. 기원전 12년에 로마에서 주조한 금화에 새겨진 그림은 구원자 아우구스투스와 공화국의 관계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아우구스투스가 탄원하는 적에게 손을 내밀었던 것처럼, 몰락한 공화국res publica에 손을 내밀고 있다. 회복된 공화국은 아우구스투스의 지도력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132쪽) 


  로마 황제들은 평화의 의미가 바뀌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아우구스투스를 비롯해 역대 황제들은 평화의 제단을 바치는 의식을 거행하고 군사적 승리나 평화를 기념하는 주화를 발행했다. 그들은 신전과 같이 거대한 기념물을 세우면서 제국의 평화를 과시했다. 이는 지배자의 관용을 보여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평화는 새로운 제국 이데올로기였으며 두 가지 특징을 보였다. “하나는 엘리트들과 신분들 간의 화합에 기초한 국내적 평화, 다른 하나는 로마와 평화롭게 된 속주들 사이 불평등한 평화라는 의미의 대외적 평화였다(134쪽).” 이제 평화와 제국은 사실상 동의어가 되었다. 황제들은 여전히 군사력을 독점하고 전쟁을 수행했지만, 제국의 평화를 선전하는 쪽이 훨씬 값싸고 효율적인 통치 전략이었다. 


  그럼 팍스 로마나는 정말로 평화로웠을까. 비록 내전이 종식되고 속주는 비교적 안정되었지만, 로마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는 도적이 들끓었고 속주민은 지주와 제국 관리들의 탐욕에 희생되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정복한 이래로 충성을 다했다고 알려진 갈리아는 물론, 이른바 ‘문명화된’ 지역인 이집트와 아카이아(그리스)에서도 반란은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들은 반란과 내분을 공식적으로 기록하는 것을 최대한 피했다. 평화를 공식적인 제국 이데올로기로 삼은 이상, 제국이 분열되었다는 인상을 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서기 68~70년 네로 황제의 죽음 이후 벌어진 내전은 군벌 간의 단순한 분쟁이 아니라 도시들과 속주들 간의 전쟁이었다. 그런 점에서 제정 시기에도 그치지 않은 내전은 팍스 로마나 아래 감춰진 긴장과 갈등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팍스 로마나 시대에 속주민들이 중단 없는 평화를 누렸다는 로마인들의 주장은 과장이었다. 속주들은 고대 모든 사회의 삶을 특징지은 일상적인 폭력을 제외하고도 더욱 심각한 수준의 반란과 내전을 겪었다. 속주들은 거듭 평정되었지만 평화롭지 않았다.” (13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