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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Archive

천만 관객 영화의 미학은 없다

by parallax view 2016. 7. 26.

리뷰 아카이브 기고문(16.07.25) 

<천만 관객 영화의 미학은 없다> 



천만 관객 영화의 미학은 없다 

영화의 관객성 분석을 통해 관객의 정치적 주체성을 탐색하다 


  요즘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사람은 흔치 않은 것만 같다. 우리는 집에서 VOD로, 길거리에서 태블릿 PC와 스마트폰으로 얼마든지 영화를 볼 수 있는 세계에 살고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천만 관객 영화’에 대한 소식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굳이 극장을 찾지 않더라도 영화를 볼 수 있는 환경에 놓인 우리가 어째서 굳이 극장을 찾는 것일까. 그만큼 천만 명의 관객이 보는 영화에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극장에 모이는 천만 명의 ‘무리’는 대체 누구일까. 거기에서 어떤 정치적 주체성을 탐색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유혹을 느낄 법한 상황이다. 


  그러나 서동진 계원예대 융합예술학과 교수의 「다중, 대중, 군중: 관객성의 분석을 위한 몇 가지 주장」(문화연구 제4권 제1호, 2016년)은 천만 관객 영화라는 외관에 현혹되어 그 안에 무언가가 있을 것이란 기대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라 경고한다는 점에서 살펴볼 만하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천만 관객 영화는 ‘영화-이후적 관람양식’으로 통칭할 수 있는 지각 경험 양식에 따른 효과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는 극장에 모인 군중에서 곧바로 정치적 집합을 도출하려는 유혹에 빠지기보다 오늘날의 관객성을 넘어서기 위한 미학적 시도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영화-이후적 관람양식과 

상어의 미학 


  연구자는 <충격고로케>라는 웹사이트에 대한 이야기로 논의를 시작한다. <충격고로케>는 자극적인 보도를 쏟아내는 언론을 패러디하던 사이트다. 현재는 문을 닫은 그곳에서 언론이 자주 동원하는 낱말로 고른 것들은 대략 이렇다. “충격, 경악, 결국, 멘붕, 발칵, 입이 쩍, 헉!, 폭소, 무슨 일, 이럴수가, 알고 보니, 화들짝, 이것, 살아있네, 몸매, 미모, 숨막히는, 물오른, 얼짱女, 신경쓰여, 최근한온라인게시판, 화제다, 네티즌들은, 누구?, 하네요(44~45쪽).” 이 사이트에서 첫 번째 낱말로 ‘충격’을 언급한 것은 오늘날 매체에서 대중의 지각을 어떻게 동원하고자 하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대중매체는 충격적인 사건이나 현상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의 시선을 순식간에 그리로 몰고자 한다. 이런 경향은 전혀 새로울 것 없는지도 모른다. 일찌감치 발터 벤야민과 게오르그 짐멜 등은 ‘산만함 속의 지각’이나 대도시에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감각적 과부하와 그에 따른 ‘멍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연구자는 이런 경험이 자본주의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현상이며, 이를 세심하고 정확하게 분석하는 ‘지각의 사회적 유물론’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날의 지각에 대한 사회적 유물론을 어떻게 펼칠 수 있을까. 그야말로 홍수처럼 쏟아지는 이미지의 연쇄, 언제 어디서든 접속할 수 있는 인터넷 환경 속에서 단속적으로 접하는 각종 대중매체, 영화를 분초 단위로 끊어 볼 수 있도록 하는 미디어 플레이어 등은 우리가 영상을 접하는 방식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24/7 잠의 종말』(문학동네, 2014)의 저자인 조너선 크래리는 ‘주목 경제attention economy’라는 경영 담론을 통해 영화적 경험의 변화와 그 미학적·정치적 효과를 살펴보고자 한다. 


  크래리의 논의에 따르면 “안구의 운동을 포획하고 지배하는 것, 언제나 초조하게 부유하고 방황하는 시선들을 낚아채는 능력, 그러한 순간적인 지각의 지배를 통해 생산되는 주목 혹은 주의집중, 이러한 것이야말로 충격의 상관항(48쪽)”이다. 이와 비슷하게 가브리엘레 페둘라는 오늘날의 지각적 경험을 ‘상어의 미학the aesthetic of the shark’이라 부르자고 제안한다. 상어를 볼 때처럼 강렬한 충격에 휩쓸린 지각은 일시적으로 자극적인 장면을 향해 쏠린다. 이렇게 안구의 운동을 포획하고 지배하려는 매체 전략은 페둘라가 ‘다크 큐브dark cube의 소멸’이라고 명명한 현상으로 이어진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이라는 ‘검은 상자’에 들어가기는 하지만, 너무나 많은 자극이 도처에 산재하기에 검은 상자는 예전과 같은 위상을 얻지 못한다.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는 이 ‘영화-이후적 관람양식’의 시대에, 영화 이미지의 시각적 단위는 시퀀스나 쇼트가 아니라 단일 프레임이다. 배우는 몸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그저 몸뿐인 존재로 드러난다. 대중은 <출발! 비디오 여행> 같은 프로그램에서 단속적으로 소개되는 영화 클립을 즐기고, 프로덕션 노트나 스틸 컷으로 영화를 ‘이해’한다. 국내외 별점 사이트를 훑고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로 ‘입소문’을 듣고 퍼트린다. “그럴 때 <은교>는 TV와 숱한 인터넷 이미지를 통해 중계된 몇몇 외설적인 신scene으로 환원되고, <국제시장>은 어느 통신업체가 광고에서 패러디한 마지막 시퀀스를 통해 기억되게 마련이다(55쪽).” 


  “따라서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는 영화라기보다는 오늘날 성행하는 관람양식을 적극적으로 채용한 것일 뿐이다. 천만 관객은 그런 점에서 영화적 미학의 측면에서는 거의 아무런 말을 할 것이 없다(56쪽).”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는 '영화-이후적 관람양식'의 세계를 살고 있다. (사진: http://ndolson.com/3357)


정치적 주체로서의 

영화 관객 


  하지만 오늘날의 관객을 그저 단속적이고 파편화된 영상을 향유할 뿐인 군중이라고 힐난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예컨대 레몽 벨루는 근대의 관객이 세 가지 역사적 단계를 거친다고 본다. 첫 번째 단계는 관객이 ‘대중 주체mass subject’였던 시대로, 대형 스튜디오가 발달하고 혁명적 프로파간다 예술과 파시즘의 다양한 형태가 등장했던 때다. 두 번째 단계는 ‘인민 주체subject of people’의 관객이 등장한 시기다. 벨루는 이때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가 출현하고 관객이 영화를 예술과 문화로 대했던 시절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세 번째 단계는 현재다. 현재의 관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이는 크게 노골적으로 비디오게임과 같은 대중오락에 빠진 젊은 관객층을 겨냥해 만들어지는 세계적인 상업영화들과, 그다음으로 그가 ‘미묘하게 충격을 주는subtly shocking’ 영화라고 부르는 영화들(57쪽)”의 관객이다. 


  벨루는 이 ‘미묘하게 충격을 주는 영화’에서 ‘저항의 예술’을 끄집어내고자 하면서도, 새로운 단계의 관객에게 ‘대중’이나 ‘인민’과 같은 정치적 용어를 붙이는 데는 주저한다. 그저 ‘한정된 공동체, 하지만 뒤이어 전체 세계 차원으로 확장된 공동체의 성원’이라고만 언급할 뿐이다. 더군다나 그는 어째서 영화 관객을 역사적으로 분석할 때 정치적 주체의 용어를 동원하는지에 대해서도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는다. 연구자는 벨루가 정치적 주체의 모델과 역사적 관객의 모델을 등치한 건, 이 두 모델의 상등성을 설명하는 데 부연이 필요 없을 만큼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 본다. 관객과 감독, 제작자를 비롯한 영화의 주체들은 모두 충격과 주의의 변증법에 참여한다. 그런 점에서 영화적 지각은 세계를 체험하고 반응하는 윤리적이고 미적인 효과를 받으며, 각 단계의 영화는 저마다 특정한 윤리적·미적 효과를 생산하는 조건을 만들어 왔다. 


  연구자는 이어서 오늘날의 영화적 지각에 대해 페둘라의 논의를 끌어들인다. 페둘라는 현재의 영화가 ‘극장 이후의 영화post-auditorium cinema’이며, 이전 시대에는 ‘극장-운명Auditorium-Destiny’이 지배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을 극히 간략하게 요약한다면 관객들은 좌석에 꼼짝없이 붙박인 채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을 바라보게 될 때 자신들은 끼어들 수 없는 처지에 묶인 채 무력하게 운명을 응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59쪽).” 우리가 비극을 볼 때, 끼어들고 싶지만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걸 직시할 때의 긴장은 얼핏 수동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페둘라는 셰익스피어의 <오셀로> 공연 중 끼어든 시골뜨기 농부의 사례에 대한 카벨의 논의를 언급하면서, 관객이 비극을 관람함으로써 무력해진다는 논의를 뒤집어 바로 그 수동성이 ‘관객의 윤리적 능동성을 위한 무기’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페둘라는 현재의 극장 이후의 영화 혹은 영화-이후적 관람양식 속에 놓인 관객이 수동성을 상실했으며, 이로써 정치적 주체성 또한 탈각했다고 본다. 페둘라가 “다크 큐브의 규율하는 힘이 사라지면서 모든 장벽은 무너졌다”고 침울하게 말할 때, 이는 비극의 몰락과 정치적 주체의 몰락을 함께 가리키는 셈이다. 하지만 연구자는 여기서 개탄에 휩싸이기보다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인민에게 말 건네지 않는 예술 작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들뢰즈의 말을 따라 새로운 관객성과 정치적 주체성을 함께 탐색하고 돌파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영화는 천만 명의 관객을 만나지만 그것이 던진 얼마어치의 윤리적·정치적인 효과는 천만 명어치의 민주주의, 천만 명어치의 해방을 향한 주의와 공감empathy과는 무관하다. 그러나 괜찮다. 들뢰즈의 말처럼 인민은 행방불명이고 우리는 그 부재한 관객을 향해 말을 건네는 일을 하면 된다. 그가 그를 행하는 예술을 가리켜 창조적인 행위creative라고 불렀던 것처럼 그런 창조적인 행위가 영화의 편에서 여전히 가능하다면 말이다(6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