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아카이브 기고문(16.07.13)
혁명의 한가운데에는 늘 여성이 있다
러시아 혁명에서의 여성과 페미니즘 운동
지금은 다들 당연한 권리로 받아들이는 투표권은 투쟁의 산물이다. 역사는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려 할 때마다 이미 권리를 보유한 이들에 의해 번번이 가로막혔음을 증언한다. 남성 노동자와 농민, 도시 빈민이 투표권을 획득하기까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여성이 투표권을 얻는 건 더욱더 험난했다. 남자들은 여자들이 투표를 하기에는 너무 미숙하고 집안일에 충실해야 한다는 논리로 일관했다. 그 때문에 영국에서는 더욱더 가열한 참정권 투쟁이 일었고, 에밀리 와일딩 데이비슨 같은 투사는 경마 경기 중 장내에 뛰어들며 “여성에게 투표권을!”을 외치다 말에 치어 죽기까지 했다. 그렇게 해서 1918년 영국에서는 만 30세 이상의 여성이 투표권을 얻었고, 1928년에는 만 21세 이상의 모든 여성이 투표에 참여할 수 있었다. 마침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을 다룬 영화 <서프러제트>가 얼마 전 개봉했다. 여성혐오가 전면화된 지금 시기에 여성 관객이 <서프러제트>에 주목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편 영국에서 여성이 투표권을 쟁취했던 그 시기에, 더욱 격렬하고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났던 다른 나라의 여성은 어떻게 정치에 참여하고 변화를 이끌어냈을까. 기계형 한양대 아태지역연구센터 HK연구교수의 「1917년 러시아혁명과 여성: 일상생활의 연속성과 변화」(여성과역사 제12집, 2010년 6월)는 유럽에서 여성해방운동이 한창이던 20세기 초, 여성이 러시아 혁명이라는 격동기에 자유와 평등을 쟁취하는 과정을 서술한 논문이다. 논문은 러시아 여성이 ‘이중권력’ 시기와 내전이라는 혼란기를 거치면서 계급별로 정세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함께 살핀다. 특히 10월 혁명 이후 일상생활의 연속성과 변화라는 양가적인 성격을 조명하면서, 소비에트의 페미니즘이 가진 역량과 한계를 함께 보여준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국제 여성의 날’로부터 비롯한
2월 혁명
러시아 혁명은 제1차 세계대전에 이어 20세기의 문을 연 커다란 격변이었다. 전쟁과 기아에 허덕이던 러시아 인민이 군주제를 전복하던 이 시기에, 여성의 정치 참여 또한 활발해졌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2월 혁명을 시작한 계기도 여성에게서 비롯되었고, 10월 혁명을 거치며 가족 관계를 비롯한 구시대의 악습을 철폐하는 쪽으로 정책이 제안, 집행되었다. 단적으로 “1918년 10월 17일자의 ‘이혼 도입에 대한 법령’, 그리고 1918년 10월 17일자의 ‘1918년의 시민권, 결혼, 가족, 친권에 관한 법령’에 따라 여성들은 결혼에서 남성과 동일한 지위를 부여받았다. 이제 여성들은 비교적 손쉽게 이혼하고, 자녀 양육지원금을 받기 위해 소송할 권리를 부여받았다.” (39쪽)
하지만 과연 러시아 혁명과 소비에트 체제가 여성해방을 구현했는가에 관해서는 여성사 연구자 간에 논란이 있었다. 러시아 혁명은 해방의 물꼬를 튼 계기이기는 했지만, 체제의 형성과 유지를 위해 여성을 동원했다는 입장부터 볼셰비키가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성과를 제 것처럼 가져갔다는 입장, 여성해방운동이 혁명의 중요한 스펙트럼이었다는 입장까지 다양하게 존재했다. 당대 여성의 활동이 계급별로 다른 성격을 가졌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하지만 연구자는 혁명기 러시아 여성은 모두 가부장제와 봉건 질서의 질곡에 빠져 있었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가졌다고 본다.
특히 황제 니콜라이 2세의 퇴위가 1917년 2월 23일 ‘국제 여성의 날’에 벌어진 시위에서 촉발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 가을부터 도시에 식량 위기가 닥치면서 여성들은 늘 길게 줄을 서서 빵을 기다려야 했다. 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결국 수도 페트로그라드의 여성들은 빵과 평화를 외치며 가두시위에 나섰다. 시위에 남성 금속 노동자도 가세하면서 규모가 불어났고 여성들은 ‘짜르 타도’까지 선언했다. 이 시위는 ‘독자적인 행동을 억제하라’는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 당중앙위원회의 권고를 무시하고 진행되었으며, 이를 두고 혁명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여성들이 “프롤레타리아의 위대한 투쟁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났다(45쪽)”고 평했다. 2월 혁명의 전면에 여성이 나섰다는 점에서 혁명이 남성 노동자로부터 시작된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2월 혁명 이후 왕당파와 자유주의자, 온건 사회주의자 들은 협의를 통해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반면 노동계급은 ‘노동자 관리 투쟁’을 벌이며 다종다양한 직종에 종사하는 노동자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때 페미니즘 운동은 거칠게 말해 두 가지로 나뉘었다. 하나는 부르주아/자유주의 페미니즘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이었다.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는 임시정부 수립 이후에도 여성 참정권이 보장되지 않는 것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들의 노력으로 임시정부는 1917년 6월에 여성이 변호인으로 종사할 권리를 인정했고, 7월 20일에는 20세 이상의 모든 성인에게 향후 소집될 제헌의회 선거권을 부여했다. 대신 임시정부는 페미니스트로부터 전쟁 지지를 이끌어 냈다. 임시정부는 혁명 이후에도 전쟁을 지속했고, 여성들은 ‘죽음의 여성부대’ 병사로, 혹은 간호사로 속속 전쟁에 투입되었다. 전쟁이 끝나갈 즈음에는 6천여 명의 여성이 전투에 참가했다.
한편 노동계급 여성은 부르주아 페미니스트와 혁명의 성과를 공유했지만 추구하는 바는 달랐다. 병사의 아내들은 1917년 3월 중순 페트로그라드 항구 지역의 여성 모임에서 ‘분여지의 몫’을 늘려달라고 주장했다. 남편이 군역에 종사했기에 토지를 받지 못해 경제적으로 가장 열악한 처지에 놓인 여성들은 4월에 가두시위에 나섰다. 이어서 5월에는 세탁부들이 8시간 노동과 하루 최소 4루블의 임금을 요구했다. 5월 13일부터 9월까지는 염색업 여성 노동자들이 파업을 시도했다. 아쉽게도 이들의 활동은 당대 언론에서도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 볼셰비키의 여성 비율은 1917년 약 8%에 그쳤고, 주요 인사들도 전국적인 리더십을 얻지는 못했다.
러시아 혁명과
페미니즘의 분화
이렇게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는 정치 참여와 같은 사안에, 노동계급 여성은 공유지 분배나 임금투쟁 같은 경제적인 사안에 집중하며 서로 차이를 드러냈다. 2월 혁명을 이끈 노동계급 여성이 정치적인 의견을 잘 드러내지 못한 것은 여전히 노동계급의 젠더 의식이 취약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었다. 실제로 혁명 이후에도 젠더 위계는 여전히 유지되었다. 내전이 진행됨에 따라 여성 대부분은 군 사무원이나 간호부로서 혁명 수호 투쟁에 동참했지만, 성별화된 관계가 곧바로 변화되진 못했다. 이리나 유키나는 ‘소비에트 전통주의’를 언급하면서 “이미 의식이 있는 여성들에 대해 오랫동안 법 의식의 고양, 문자율 확대, 문화의 발전이라는 ‘비현실적 주제’를 강조해 왔고, 이것은 젠더 정치에 기반하는 사회적 지위 체계를 만들려는 소비에트 체제의 정치 문화를 여실히 반영한다(57쪽)”고 비판했다.
그렇지만 러시아 여성의 일상생활에는 가부장제의 질곡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기획이 삽입되기도 했다. ‘1918년의 시민, 결혼, 가족, 친권에 관한 법령’이 공포되면서 여성과 남성의 신분상 평등이 보장되었고, 혼인한 부부는 남편 또는 아내의 성을 선택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리고 서자와 적자에게 평등한 법적 권리가 부여되었으며, 이혼은 쌍방 혹은 한쪽의 요청으로도 성립할 수 있었다. 여성에게 동일 노동‧동일 임금 원칙이 적용되었고 낙태가 합법화되었다. 변화의 또 다른 계기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가 주축이 된 여성부의 창립이었다. 당 지도부는 여성부를 “여성 노동자를 동원하도록 조정하는, 다시 말해 당 정책을 위한 일종의 ‘트랜스미션 벨트’(59쪽)”로 활용하고자 했다. 하지만 여성부의 지도자와 활동가 들은 당 지도부와 이견을 보이면서 여성해방을 위한 정책을 집행하고자 했다. 여성부는 대표단에 선출된 여성 노동자의 교육에 많은 신경을 썼다. “대표단은 수업과 모임에 참가하고, 정치 문제에 대한 보고를 들었으며, 공장에서 탁아센터 같은 것을 통해 노동 여성을 조직하는 법을 배웠다(59쪽).” 이를 통해 수천 명의 여성이 당에 가입해 1922년에는 3만 명의 넘는 여성 당원이 배출되었다.
하지만 내전이 지속되면서 경제적 조건이 열악해지자 공공식당과 간이식당, 보호소와 어린이집의 운영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여성해방의 기획은 러시아 인민이 전통적인 가족 관계로 회귀하는 것을 막는 데 역부족이었고, 정부가 여성의 의무적 징집을 금지함에 따라 전쟁은 더욱더 남성의 영역으로 고착되었다. 이런 한계가 있었지만 “볼셰비키는 사회주의 사회의 토대, 즉 여성을 위한 완전한 법적, 시민적 평등권, 학교 교육과 직업의 평등권, 여성들이 새로운 자유를 향유할 수 있도록 가사와 육아를 국가가 담당하는 사회적 서비스를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러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볼셰비키는 혼인과 가족에 관한 법을 만들었다(62~63쪽).”
기계형 교수의 논문은 러시아 혁명의 한가운데에 여성이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한편, 그 양상이 계급별로 상이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여성의 자유와 해방을 향한 노력이 20세기 초 전 세계적으로 퍼져 있던 시기에, 우리가 곧잘 망각하곤 하는 러시아 혁명 속에서도 어떤 노력이 펼쳐졌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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