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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Archive

문명의 충돌인가, 야만의 충돌인가

by parallax view 2016. 8. 11.

리뷰 아카이브 기고문(16.08.08) 

<문명의 충돌인가, 야만의 충돌인가> 



문명의 충돌인가, 야만의 충돌인가 

IS와 유럽 극우파의 '적대적 공생'을 면밀하게 파헤치다 


  언제부턴가 이슬람국가(IS)의 테러는 여느 사건사고 기사처럼 일상적으로 우리 눈앞에 나타나고 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해 세계 각지에서 테러가 벌어지면 다들 으레 IS가 벌인 짓이겠거니 생각하고, IS는 기꺼이 그 테러가 자기들이 일으킨 짓이라고 주장하며 의심을 기정사실로 만든다. 끔찍한 테러의 결과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며, 우리는 그런 짓을 벌인 IS를 서슴없이 ‘극단주의적’이라고 비난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극우 정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브렉시트 사태의 표면적인 원인으로 지목된 반反이민 정서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선거 후보의 부상처럼, 극우파는 이민자에 대한 혐오와 적대감을 공공연히 내세우면서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도 ‘극단주의적’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또 이렇게 극단주의적인 정치적 입장들은 그 비타협적인 태도 때문에 ‘급진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해석한다. 더 나아가 그 폭력적이고 적대적인 성격 때문에 ‘전체주의적’이기도 하다고 분석한다. 


  하지만 엄한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의 「동질화에 대한 반발로서의 극단주의 현상: IS와 유럽 극우의 사례를 중심으로」(경제와사회, 2015년 9월)는 우리가 극단주의적 집단이라 간주하는 IS와 극우파가 흔히들 생각하는 대로 다양성을 비판하고 부정하면서 등장한 것이 아니라, 통합 내지는 동질화에 대한 반발을 통해 부상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IS를 비롯한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을 범죄화하는 자유주의적 시선이 미국과 유럽 선진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슬람 세력을 활용해 온 역사를 가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극단주의의 

세 가지 형상 


  먼저 연구자는 ‘극단주의의 세 가지 형상’으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세 사건을 언급한다. 첫 번째 사건은 브레이비크라는 남자가 2011년 7월 22일 노르웨이에서 벌인 테러다. 그는 정부청사 앞에서 폭탄을 터뜨려 8명을 죽였고, 노동당 청년부 여름캠프에 들어가 총기로 69명을 살해했다. 브레이비크가 범죄를 저지른 명분은 노동당 정부의 개방적인 이민 정책 때문에 이민자 수가 늘어나 노르웨이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이 위협받았다는 것이었다. 유럽 극우파는 이를 두고 수단은 잘못되었지만 그 대의에는 동감한다는 입장을 표했다. 극우파가 이런 ‘대담한’ 의견을 피력할 수 있었던 건 이민자, 특히 ‘이슬람의 위협green threat’에 대한 대중의 반감 때문이었다. 


  두 번째는 2015년 1월 7일 《샤를리 엡도》 신문사 사무실에서 벌어진 테러로 편집진 다수가 사망한 사건이다. 1970년에 창간된 좌파 성향의 《샤를리 엡도》는 2000년대 이후 이슬람과 테러리즘을 비판의 과녁으로 잡으면서 ‘성역 없는 비판’을 수행했다. 이 신문은 2006년 2월에 마호메트 풍자 만평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고, 2011년 11월에는 ‘아랍의 봄’ 이후 이슬람주의 세력의 승리를 풍자해 사무실에 방화가 나기도 했다. 테러는 표면적으로 《샤를리 엡도》가 IS의 지도자 알 바그다디를 풍자해 벌어졌다. 하지만 좀 더 세밀히 들어가 보면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무슬림 이민자의 수와 이들의 높은 출산율을 근거로 유럽에 대한 ‘이슬람의 위협’ 담론이 확산되었다. 아랍인들이 유럽을 차지하고 있다는 우려를 표현한 ‘유라비아Eurabia’라는 용어, 유럽이 쇠퇴할 것이라는 우려, 중동 석유자본의 힘, 무슬림 이민과 그 후손의 수가 증대할 것이라는 전망, 이슬람주의의 물리적인 공격에 대한 우려가 이 담론의 주요 내용이다. 이민문제를 이슬람을 중심으로 재현하는 언론은 이 담론을 확산시키는 주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담론을 근거로 프랑스 및 서구의 가치, 정체성, 문화, 생활양식을 지켜야 한다는 논리가 부상하였다(Liogier, 2014). (114쪽) 


  세 번째 사건은 IS의 부상이다. 이슬람주의에 대한 서방의 관심은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하마스, 헤즈볼라 등 반反이스라엘 저항세력의 부상에 이어, 9.11 이후 알카에다가 주도하는 이슬람 테러리즘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2014년 이후에는 IS가 시리아 일부와 이라크의 주요 지역을 점령하면서 알카에다를 제치고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IS는 “자신만이 올바른 무슬림이라는 믿음이 강한 만큼 비무슬림이나 올바른 신앙을 하지 않는 다른 무슬림에 대해 가혹하게 대하는 것에서(115쪽)” 그들의 고유한 폭력성을 노출한다. 그 때문에 이슬람 권역에서도 IS에 대해 비판과 찬사가 엇갈리고 있다. 그런데 연구자는 IS에게 뭔가 특별한 것이 있기 때문에 부상했다기보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 이후 일종의 권력 공백이 발생한 이라크의 정세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일부에서 제기하는 파시즘 또는 전체주의와의 유비는 과도한 것(116쪽)”이다. 


IS를 향한 윤리적 비판만으로는 테러가 발생하는 맥락을 제대로 밝힐 수 없다. (사진: BBC) 


여기서 연구자는 우리가 IS를 비롯한 이슬람 세력에게 흔히 덧씌우곤 하는 ‘급진주의’나 ‘극단주의’ 같은 표현의 역사적 맥락을 살핀다. 서구에서는 자유·평등·박애와 정교분리, 종교 비판 같은 공화주의적 이념을 비타협적으로 추구하는 입장을 급진주의로 불렀다. 이후에는 급진 자유주의나 급진 페미니즘, 급진 노동운동 등에 붙어 각 입장의 사회 변혁적인 성격을 강조하는 데 쓰였다. 서구 학자들은 이슬람 세력이 종교를 명분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는 경향을 ‘이슬람주의’나 ‘정치적 이슬람’ 등의 어휘를 동원하며 급진주의적 성격을 가졌다고 분석한다. 유럽의 우파에게도 역시 ‘급진적’이라는 딱지가 붙었는데, 이들은 “정치권 전반에 대한 강한 불신을 토대로 민주주의 제도 전반에 비판적이며 제도를 우회해 대중의 직접적인 행동이 핵심이라는 점(120쪽)”에서 급진성을 갖는다. 한편 ‘극단주의’는 급진주의와 혼용되는데, 극단주의는 “특정 사회의 일반적인 정서를 기준으로 할 때 받아들여지기 힘든 정치적,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지칭하는(122쪽)” 데 쓰인다. 정치적, 종교적 집단이 단 하나의 이념이나 교리를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이에 순응하지 않는 이들을 징벌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런 어휘에는 극단적인 세력은 나쁘고 온건한 세력은 좋다는 가치판단이 들어 있다. 


‘극단의 시대’ 속에서의 

‘적대적 공생’ 


  연구자는 이런 방식으로 정치 세력을 급진주의적이라거나 극단주의적이라고 평가하는 데는, 현재가 에릭 홉스봄의 표현을 빌려 ‘극단의 시대’인 20세기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는 니얼 퍼거슨이 “20세기, 특히 1904년에서 1953년까지의 50년간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지구별이 피로 물들었을까?(124쪽)”라고 자문하면서 인종 간의 혼합과 동질화가 두려움과 증오를 낳았다는 견해를 전유한다. 보통은 이민족 간의 동화가 성공적으로 진행될수록 그 지역에는 평화가 깃든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1940년대에 최악의 민족 갈등이 벌어진 곳은 바로 동화가 성공했다고 알려진 지역이었다는 역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연구자에 따르면 홀로코스트 또한 ‘증오가 이질성이 아니라 유사성에 대한 반발(127쪽)’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드러난 현상이다. 르네 지라르는 쉽게 모방하는 성격을 가진 인간이 동일화로 인한 멸종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희생양을 지목하곤 한다는 인류학적 설명을 제시하기도 했다. 


  유럽의 극우파는 이민자가 유럽의 주류와 동화되는 것에 대해 원주민이 민감하게 반응한 결과로 부상했다. “국제이주민들이 자신들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 이들이 주류 민족에 동화되는 것에 대한 반감, 즉 주류사회의 언어를 사용하고 주류사회 출신과 혼인하는 등 장기적으로 주류사회 성원과 차이가 사라지게 되는 것에 대한 반감이 극단주의의 한 배경(128쪽)”이 되었다. 그리고 IS를 비롯한 이슬람 세력은 유럽 극우파와 동일하지는 않더라도, 서구의 개입에 따른 세속주의적 동화에 대한 반발로 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이슬람 세력이 극단주의적이라는 평가는 서구가 자유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개입한 결과로 인한 피해를 은폐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그런 점에서 IS와 같은 세력을 악마화하는 것은 사태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될 뿐 아니라, 대안을 모색하는 것을 비판하는 데 동원될 위험이 있다. 지젝이 지적하듯이 전체주의 비판은 현재의 질서에 반대하는 모든 행위를 전체주의라고 매도하기 쉽다. 또한 유럽 극우파와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급진적인 변혁을 지향하는 이들을 억압한다는 것 또한 간과된다. 무엇보다 급진주의/극단주의 비판은 현재의 세계 질서가 이미 극단적이라는 것을 망각하는 연막이 된다. 단적으로 미국과 이스라엘을 비롯해 유럽의 강대국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슬람 세력을 이용해 왔다는 점에서, 테러의 씨앗을 부린 것은 다름 아닌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등의 지원을 받은 세력이 ‘테러리스트’가 되어 자신의 지원국을 공격하는 사태는 길버트 아슈카의 표현을 빌자면 ‘야만의 충돌’을 보여준다. 이렇게 유럽의 극우파와 IS는 ‘적대적 공생’을 하는 셈이다. 


  연구자는 원래 타 종교와 세력에 개방적이었던 이슬람 권역의 성격을 고려해야 하고, 특히 비서구사회의 극단주의에 책임이 있는 미국과 유럽 선진국이 성찰적인 태도를 가져야 함을 강조한다. 사람들이 이슬람 세력의 책임을 갈수록 강조하는 지금, 연구자의 제안은 다소 원론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관점은 국제정치의 헤게모니를 생각하지 않은 채 ‘적’을 윤리적으로 단죄하는 것만으로는 현재 벌어지는 테러에 대응할 수 없다는 점에서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