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 동네' 마포의 탄생

리뷰 아카이브 기고문(16.06.16) 

<'퀴어 동네' 마포의 탄생> 

'퀴어 동네' 마포의 탄생 

성소수자와 지역의 행복한 결합을 모색하다 

  애도할 일이 자꾸만 늘어난다는 건 괴로운 일이다. 지난 6월 12일 미국 플로리다 주 올랜도에서 사상 최악의 총기 난사 사건이 벌어졌다. 이 참사로 49명이 죽고 53명이 부상을 입었다. 한동안 범인이 이슬람국가IS의 조직원이라는 말도 돌았지만, 사태의 핵심은 그가 이슬람국가 소속이었냐 아니었냐에 있지 않다. 참사가 동성애/성소수자 혐오 때문에 벌어졌다는 게 핵심이다. 나와 다르고 ‘도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사람을 미워하고 죽이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런 곳이다. 우리가 진작 벗어났다고 믿었던 세상은 버젓이 고개를 내밀며 끊임없이 모두를 위협하고 있다. 이런 사건에는 이른바 ‘선진국’도 ‘후진국’도 없다. 

  하지만 여전히 성소수자 혹은 퀴어queer는 지금 여기에서 살아 있다. 함께 모여 밥을 먹고 수다를 떨고 축제를 열면서 삶을 버티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나름의 마을도 만들고 있다. 설령 그 마을이 일시적일 수 있다 해도, 여전히 살아 있고 또 사랑하며 산다는 걸 알리는 것이야말로 이 막막한 세상을 모두 함께 버틸 수 있는 방법일 것이라 믿는다. 「“LGBT, 우리가 지금 여기 살고 있다”: 현대 한국의 성적소수자와 공간」(강오름, 비교문화연구 제21집 1호, 2015년 1월)은 성소수자들이 서울이라는 공간 중 일부에 정착하며 생활 공동체를 형성하는 과정을 쓴 문화기술지ethnography다. 연구자의 석사학위논문을 요약한 이 논문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마포 지역의 생활 공동체의 핵심에 레즈비언을 놓았다는 데 있다. 

동성애자 커뮤니티의 

오랜 역사 

  LGBT는 레즈비언lesbian, 게이gay, 바이섹슈얼bisexual, 트랜스젠더transgender 네 개 영단어의 앞 글자를 딴 명칭이다. 성정체성의 다양함과 변화를 요약하는 이 이름은, 얼핏 한국사회에서 동성애 담론과 운동이 최근에 나타난 듯한 착시 효과를 일으키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LGBT는 영화와 드라마 같은 재현을 통해 낭만화되는 경향이 있는데다, 일종의 ‘배려’의 대상처럼 다뤄지곤 한다. 연구자는 이런 인정의 정치politics of recognition을 비판하면서 논의를 펼친다. 또한 그동안 퀴어 담론에서 게이가 주로 주목받았던 데 문제를 제기하면서 레즈비언을 행위 주체로 부각하고자 한다. 

  연구자는 2011년 11월 마포구의 성소수자 주민모임에 가입한 뒤, 2012년 9월부터 2013년 8월까지 모임을 이끄는 ‘당번’을 맡으며 모임 활동과 참여관찰을 병행했다. 그리고 2013년 2월부터 3월까지 총 9명의 연구참여자를 면담하면서 심층면접을 수행해 자료를 모았다. 여기에 퀴어 아카이브 ‘퀴어락’에 보관된 자료를 통해 동성애자 커뮤니티의 역사를 추가로 수집했다. 

  동성애자 커뮤니티는 1990년대에 가시화되기 이전부터 존재했다. 게이들은 1950년대 서울 명동의 극장이나 1960년대 이후의 신당동 게이바에 모였다. 게이바는 을지로 인쇄소 골목길에 수십여 개 생겼다가, 1970년대 이후에는 종로의 파고다 극장을 중심으로 여러 업소가 문을 열었다. 하지만 비교적 꾸준히 자신들만의 장소를 찾을 수 있었던 게이와 달리, 레즈비언에게는 그런 공간이 주어질 여력이나 조건이 없다시피 했다. 그저 ‘전설’로 전해지는 구전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1965년 조직된 ‘여자운전자모임’이나 1970년대 명동의 ‘샤넬’ 다방이 레즈비언 공동체로 알려졌다. 그러나 레즈비언의 모임은 게이보다 더욱더 암암리에 이뤄졌다. 레즈비언과 게이 사이의 격차는 여성과 남성에 대한 기회/자원의 불평등한 배분, 한쪽으로 기운 사회인식이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90년대 PC통신이 등장하면서 레즈비언/게이 공동체의 출현에서 색다른 양상이 나타났다. PC통신을 즐기던 젊은 게이들은 종로가 아니라 이태원을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레즈비언 커뮤니티가 활성화되었다는 점에서 PC통신이 주요한 분기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PC통신의 퀴어 동호회를 통해 만난 이들은 “자연스럽게 인권 운동도 하고, 거기서 퀴어문화축제나 이런 것도 그때 통신사마다 있던 모임들에서 연합이 있기도 하고 뭐 같이 집회도 나가고(연구참여자 답변, 18쪽)” 하면서 퀴어 정체성을 보다 자유롭게 드러낼 수 있었다. 여기에 1996년 5월 10일 마포구에 국내 최초 레즈비언 전용 바를 표방한 ‘레스보스’가 개업했고, 그해 7월 이태원의 ‘라펠’, 1997년 신촌의 ‘쇼너’와 ‘라브리스’가 개업하면서 레즈비언의 ‘오프라인’ 공간이 확보되었다. 

‘퀴어 동네’ 

마포의 출현 

  하지만 이런 공간들은 일시적인 유흥공간으로서 공동체로서의 지속성을 보여준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이때 성소수자의 실천과 LGBT 운동은 지역 운동 혹은 공동체 운동과 만나며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LGBT 운동에 있어 주요한 전환점은 차별금지법 제정안 투쟁이었다. 2007년 보수 기독교계의 반발로 차별금지법 제정안의 수정이 이뤄지자, 성소수자 운동가들은 성적 지향을 포함한 항목의 삭제에 반발하며 <차별금지법과 성적소수자 혐오 및 차별 저지를 위한 긴급공동행동>을 꾸렸고, 그 모임은 이후 <성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행동>으로 이어졌다. 한편 지역 공동체는 1980년대의 민주화 운동 시기를 지나 국가의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거치면서 대안적인 사회 안전망의 역할을 자임하기 시작한다. 특히 2009년 1월 용산4구역 남일당 화재 사건이 터지면서 ‘지역’은 더욱더 화두로 떠올랐다. 그 와중에 2006년 9월 개설된 커뮤니티 <마용서>는 ‘마포·용산·서대문’의 앞 글자를 딴 단체로, 레즈비언들이 ‘집벙개’라는 형태로 밥을 함께 먹으면서 “서로가 가족이 되어 주는 시간(23쪽)”을 가지며 주목받았다. 연구자는 언젠가 “건물을 하나 지어 우정을 유지하며 한 동네에서 늙어 가고 싶은 마음, 즉 마용서 실버타운의 건설을 상상(24쪽)”하던 그들을 유사친족fictive kinship의 예시로 간주할 수 있다고 해석한다. 

2011년 터키 탁심 광장에서 열린 LGBT 프라이드 퍼레이드pride parade. (출처: 위키백과)

  그런데 LGBT, 그중에서도 레즈비언이 삶의 터전으로 삼은 곳이 왜 서울 마포구였을까. 주의 깊게 살펴야 할 점은 여기서 말하는 ‘마포’가 행정적인 구획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른바 ‘범 홍대권’으로 알려진 홍대 입구 및 신촌과 이대, 합정동과 망원동이 ‘마포’의 대략적인 범위라고 할 수 있다. 한 연구참여자가 “빌딩도 엄청 많고, 거기는 그냥 회사가 가까운 사람들이 가서 살겠지(연구참여자 답변, 25쪽)”, “공덕역은 삼성 래미안, 롯데 캐슬 있는 곳인데 굳이 필요할까? 걔네들은 마포에 성적소수자 살고 있는 거 알면 집값 떨어진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야(연구참여자 답변, 25쪽)”라고 말한 공덕동은 ‘마포’에서 제외된다. 일종의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y인 마포는 현재 공항철도와 경의선 지하철의 개통과 더불어 젠트리피케이션이 가속되는 곳이긴 하지만, 연구참여자들이 진입했던 시기에는 집값이 그리 비싸지 않았다. 성소수자 단체 등 시민단체가 “되게 좀 못사는 동네(26쪽)”에 속했던 마포에 속속 들어오면서 성소수자들이 합심할 수 있는 조건도 조금씩 조성되었다. 

  여기서 ‘홍대 로망’은 마포가 삶의 터전이 된 주된 요인으로 작용했다. 홍대 일대는 1970년대까지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었고, 1990년대 전반까지는 대학가 이상의 경관을 갖지 못했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 신촌 지가의 상승으로 라이브 클럽들이 대거 이동하고 ‘홍대 앞’ 인디 신이 부상하면서 자유를 찾는 청년들과 LGBT가 마포 일대에 모이기 시작했다. 비주류·소수자들이 자유롭게 입고 말해도 어떤 제지도 받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할아버지가 연분홍색 옷을 입어도 아, 이건 홍대니까 가능해, 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고, 그걸 갖고 뭐라고 하면 내가 이상한 사람되는 느낌(연구참여자 답변, 31쪽)”을 받는 곳이 ‘마포’다.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여성 퀴어가 “많이 산다더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퀴어들이 “이 동네는 뭐가 돼도 될 동네”라고 표현할 정도로, 성소수자들은 지역 운동, 마을 운동이 활성화되는 것에 고무되었다. 

“지금 이곳을 지나는 사람 

열 명 중 한 명은 성소수자입니다." 

  이제 퀴어들은 마포구 ‘주민’으로서 유권자라는 자각을 가지고 성소수자이자 지역 주민으로서의 권리 찾기 운동에 나섰다. 2008년 제18대 총선에서 진보정당의 종로구 후보로 성소수자가 출마했을 때 적극적으로 동참했던 활동가들 일부가 유권자 모임에 참여했다. 이 모임은 주변에 살고 있는 퀴어 주민의 목록을 작성해 보았다. 그 결과 100명을 넘긴 이들이 주변에 살고 있음을 안 이들은 “역시 마포는 변태들의 동네였다”는 확신을 갖고 유권자 운동을 전개했다. 나중에 마포레인보우주민연대(마레연)로 이어진 ‘마포레인보우유권자연대’는 2012년 4월 제19대 총선에서 ‘보트피플 정치토크쇼 & 유권자 파티’를 열면서 정치 참여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후 마레연은 한 달에 한 번씩 함께 밥을 먹는 ‘퀴어 밥상’을 열고, 각종 취미생활을 공유하는 소모임을 통해 성소수자 간의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 이들은 홈플러스 합정점 입점 저지 투쟁에도 함께하면서 지역운동과의 끈을 놓지 않았다. 마레연을 비롯한 LGBT가 더욱 가시화된 것은 지역 광고 게시대에 “LGBT, 우리가 지금 여기 살고 있다”, “지금 이곳을 지나는 사람 열 명 중 한 명은 성소수자입니다” 라는 현수막을 걸자, 마포구청에서 “어른들이 불편해하신다”, “청소년에게 안 좋다”는 이유로 게재를 거부한 일 때문이었다. 기존의 지역공동체가 이성애 가족 중심으로 운영되며 성소수자가 배제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마포구청의 현수막 게재 거부는 주민으로서의 성소수자의 존재를 지우려는 시도였다. 연구자는 “자신들의 공간에 대한 정당한 확보에의 충동은 급진적 투쟁의 상상과 운동을 불러일으킨다(40쪽)”는 문장을 인용하면서, 이 사건을 통해 성소수자가 결집하고 “마포의 ‘퀴어 동네’로서의 상징성을 강화”하게 되었음을 강조한다.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돕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는 것, 이들은 같은 주민이자 저마다의 성정체성을 가진 ‘따로 또 같이’의 인간이라는 것. 논문은 ‘퀴어 동네’ 마포의 주민들을 기술하면서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고, 또 그 저항이 또 다른 삶의 방식을 만들어 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직 눈에 확 띄진 않지만 그런 공동체가 서울만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도 만들어졌을 것은 물론이다. ‘퀴어 동네’ 모두가 즐겁고 건강하게 지속되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