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혁명12

폭력으로서의 사랑, 사랑으로서의 혁명 "과거의 연애가 현재의 연애를 담보해주지는 않는다. 문득 연애는 매번 주사위 놀이 같은 것이라고 한 말이 다시 떠올랐다. 그/녀가 얼마나 과거에 헌신적이었든 상관없이, 누구를 만나 어떻게 연애할지는 전적으로 운에 달렸다(즉, 누군가 연애를 못하는 건 그/녀가 매력이 없다거나 돈이 없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거다. 연애는 늘 외부로부터 온다. 우리는 너무 자신에게 몰입하는 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연애는 언제나 벼락 같은 것, 순수한 의미의 폭력, 외상(trauma)이라고 해야겠다. 다만 연애를 마무리하는 방식은 종종 자기 삶의 방식에 따른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가 했던 연애의 성격은 바로 우리가 이별하는 습관에서 드러날 것이다. 죽은 자의 유령이 산 자의 어깨를 내리누른다는 말을 바꾸면, (시간.. 2014. 5. 2.
혁명의 시간 『혁명의 시간 : 러시아 혁명 120일 결단의 순간들』(알렉산더 라비노비치, 류한수 옮김, 교양인, 2008)의 원제는 The Bolsheviks Come to Power(1976, 2004)이다. 역사가 라비노비치는 1917년 7월부터 10월(러시아 구(舊)력, 율리우스력)이라는 아주 짧은 시기만을 다룬다. 그리고 페트로그라드(레닌 사후 '레닌그라드'로 개칭된 이 도시는 소련 붕괴 후 제정 시대 이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다시 바뀌었다)라는 제한적인 공간을 이야기의 무대로 삼는다. 이렇게 라비노비치는 혁명이 가장 집중적으로 벌어졌던 시간과 공간을 다루는 서술전략을 선택했다. 이런 제한적인 접근은 혁명의 역동성을 포착하는 데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의 글에서는 당대의 신문과 주요 인물의 회고록,.. 2014. 1. 29.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사사키 아타루, 송태욱 옮김, 자음과모음, 2012)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읽고 별 할 말 없다면서 페이스북에 본문을 길게 인용하다 휴대전화 키패드로 쓰는 게 짜증나 아예 인상적인 문단 몇 개를 수첩에 옮겨 적었다. 적다 보니 저자가 거듭 강조했던 일을 나 또한 반복함을 떠올렸다. 저자에 따르면 읽는다는 것은 늘 불가능한 일이고 우리는 읽고 나면 미쳐버리므로 읽은 내용을 망각하거나 왜곡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는 광기와 자기방어 모두를 물리치는 한편, 결코 읽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 읽는다는 것은 늘 다시 읽는 것이고 고쳐 읽는 것이며 쓰고 다시 쓰는 것이다. 문학의 범위는 아주 넓고 우리의 혁명은 바로 읽고 쓰는 데 달렸다. 오직 읽고 쓰는 것만이 혁명적이다. .. 2013. 4. 28.
혁명론 여전히 '혁명'은 불온한 말이다. 그 말이 품고 있는, 권력 획득을 향한 강렬한 파토스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파괴. 폭력을 수반하기 마련인 혼란. 혁명에 대한 가장 맹렬한 이미지는 1789년 프랑스 혁명과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 나왔기에 더욱 그럴 것이다. 그래서 혁명에 대한 환호와 거부는 폭력에 대한 찬성과 반대로 종종 단순화되고 오해되었다. 이런 '폭력=혁명' 이라는 도식은 혁명의 의미를 좁힘으로써 변혁의 가능성을 막거나,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개혁 혹은 개량의 범주 안에 혁명을 묶어버리는 시도로 이어지곤 한다. 하물며 쌍용자동차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을 '용공분자'로 몰고,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저항을 '국가전복행위'로 탈바꿈하는 '지금/여기'야 더 말할 것이 없다(경향신문, ).. 2009. 8.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