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시간 : 러시아 혁명 120일 결단의 순간들』(알렉산더 라비노비치, 류한수 옮김, 교양인, 2008)의 원제는 The Bolsheviks Come to Power(1976, 2004)이다. 역사가 라비노비치는 1917년 7월부터 10월(러시아 구(舊)력, 율리우스력)이라는 아주 짧은 시기만을 다룬다. 그리고 페트로그라드(레닌 사후 '레닌그라드'로 개칭된 이 도시는 소련 붕괴 후 제정 시대 이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다시 바뀌었다)라는 제한적인 공간을 이야기의 무대로 삼는다. 이렇게 라비노비치는 혁명이 가장 집중적으로 벌어졌던 시간과 공간을 다루는 서술전략을 선택했다. 이런 제한적인 접근은 혁명의 역동성을 포착하는 데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의 글에서는 당대의 신문과 주요 인물의 회고록, 역사가의 연구문헌을 꼼꼼하게 수집해 역사를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성실함이 돋보인다.
라비노비치는 혁명기의 기록을 통해 볼셰비키(bolsheviks)가 10월 혁명을 성공시킨 이유를 분석한다. 한 마디로, 볼셰비키는 역동적인 민주주의를 유지했으며 노동자·병사 대중과 긴밀하게 상호작용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볼셰비키가 내건 슬로건("평화, 토지, 빵"이나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와 같은)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본다. 저술 시기가 냉전이 여전하던 1970년대라는 점을 생각하면 많은 용기를 낸 셈이다. 라비노비치는 10월 혁명이 음모가 집단이 우연히 성공한 봉기라는 우파적 해석과 거리를 둔다. 마찬가지로 그의 주장은 혁명이 볼셰비키의 강철 대오가 철두철미하게 이뤄낸 성과라는 소련 공식 해석과도 양립하기 어렵다.
오히려 7~10월까지의 볼셰비키 활동을 보면 일관되기보다 좌충우돌하고, 정파 간의 입장도 대립하기 일쑤였으며, 정세에 성급하거나 뒤늦게 반응하곤 했다(그들의 부주의함과 솔직담백한 태도를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소련 공식 사가에겐 결함으로 보이는 것이(반대로 우익에게는 우연이나 기만으로 보이는 것이) 라비노비치에게는 볼셰비키가 가진 활력의 원천이며, 혁명의 근본적인 힘이다. 그는 볼셰비키 혁명가를 하나하나 묘사하고 그들의 말과 실천을 서술함으로써 볼셰비키에 대한 편견을 허물고자 한다. 볼셰비키는 결코 일사분란한 조직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입장을 펼치고 논쟁하며 합의를 모색하는 당(黨)이었다는 것이다. 라비노비치는 레닌조차 당중앙위원회의 명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으며, 입장이 다른 이들과 싸우면서도 그들을 완전히 내몰지 못했음을 상기시킨다. 레닌의 주장과 지시는 다른 볼셰비키에 가로막히기도 하고 부분적으로만 관철되기도 했다. 볼셰비키는 때로는 레닌을 따르고 때로는 비판하거나 거부하고 때로는 그의 주장을 완화함으로써 혁명이 성공하는 데 이바지했다.
무엇보다 볼셰비키의 힘은 혁명을 수호하려는 노동자·병사 대중의 지지에서 나왔다. 특히 당시는 임시정부가 전쟁을 끝내기는커녕 오히려 연합국의 참전 요구를 뿌리치지 못함에 따라 대중의 위기감이 고조될 때였다. 짜르는 몰아냈지만 혁명을 '완수'하지 못한 교착 시기는 시간이 갈수록 구체제가 복귀할 가능성을 키웠다. 이때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병사 소비에트에서 높은 지지를 얻기 위해 부단히 투쟁했다. 볼셰비키가 소비에트 내외에서 벌인 논쟁과 교섭, 설득은 혁명이 음모가 집단의 우연한 성공이 아니라, 혁명가와 대중이 끊임없이 서로에게 개입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이렇게 라비노비치는 혁명을 집단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으로 분석하려는 입장을 견지한다. 그럼에도 레닌이라는 개인은 역사 서술에서 피할 수 없는 존재로 부각된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 같은 볼셰비키 우파가 멘셰비키·사회주의자혁명가당과의 공조를 포기하지 못함에도, 레닌은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라는 슬로건은 시기에 맞지 않으며 무장봉기를 통해 임시정부를 타도해야 한다고 단호하게 주장했다. 라비노비치는 볼셰비키와 온건 사회주의자 혹은 소비에트와 임시정부 사이의 화해가 이뤄졌으면 하는 아쉬움을 행간에 내비치는 듯하다. 특히 볼셰비키 우파가 다른 사회주의 정당·정파와 협의할 가능성을 자세히 서술할 때 그런 면모가 돋보인다. 볼셰비키가 내전을 거치면서 혁명기의 역동성을 상실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모습도 그렇다.
라비노비치의 입장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읽으면서 만약 볼셰비키가 다른 사회주의 정당과 협상하고 공동전선을 만들기 위해 시간을 보냈다면, 레닌의 우려대로 반(反)혁명이 성공했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라비노비치는 레닌의 우려가 과장되었다고 보지만, 역동적인 정세에서 힘의 역전을 사고한 레닌이 보다 정확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나는 지금 『레닌 재장전』에 실린 장자크 르세르클의 「정확함의 사도 레닌, 혹은 재활용되지 못한 마르크스주의」를 떠올렸다). 혹은 지젝이 여러 번 강조하는 대로, 레닌은 전 인민의 투표나 역사적 발전단계 같은 '대타자'가 없다는 것을 강조한 셈이다.
나는 레닌이 '혁명의 평화적 단계'든 무장봉기든 일관되게 요구한 것은 내전의 가능성을 봉쇄하는 데 있었다고 생각한다. 레닌 역시 8월의 코르닐로프 쿠데타로 혁명을 수호하려는 노동자·병사 대중의 의지가 강해졌고, 소비에트도 임시정부에 우호적이던 태도를 수정하던 상황에서는 혁명이 평화롭게 진행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내 다시금 무장봉기를 요청한 것을 기회주의나 실용주의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레닌이 끝까지 놓지 않으려 했던 것은 '변증법'이다. 수많은 세력, 상황, 사건이 정세에 개입하고 형성하는 상황에서 무엇이 혁명을 수호하고 더 나아가 갱신할 수 있을지 사고하는 힘이 바로 레닌의 변증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이런 관점이 『레닌 재장전』과 『지젝이 만난 레닌』 같은 책에서 주로 서술된다. 그리고 그 이전에 '정세'에 대한 사유를 강조한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과 알튀세르의 「모순과 과잉결정」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내전을 피하려던 시도는 끝내 내전을 막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내전은 러시아 전토와 인민을 파괴하고 볼셰비키의 민주주의를 탈색시켰다. 나는 볼셰비키 혁명가의 사진을 보면서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이중 누군가는 내전 중 죽었을 것이고 상당수가 스탈린이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뒤 숙청되었을 것이다. 서로 격렬하게 주장을 전개하면서도 우호적인 관계를 놓지 않았던 볼셰비키는 서로의 적이 되어 상대방을 '인민의 적'으로 비난하고 처형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소련은 관료주의 국가로 퇴색했다. 그럼에도 1917년 10월은 기회에 개방된 시간이었다. 벤야민의 말을 빌리면 '좁은 문'이 열렸던 순간이고, 마키아벨리의 표현을 빌리면 "운명은 절반쯤은 운명의 여신의 몫, 절반쯤은 인간의 의지의 몫"인 셈이다.
'Read & Think' 카테고리의 다른 글
권력이란 무엇인가 (0) | 2014.05.02 |
---|---|
투명사회 (0) | 2014.05.02 |
자기만의 방 : 고시원으로 보는 청년 세대와 주거의 사회학 (0) | 2014.01.15 |
사회주의 최초의 비극에 대하여 (0) | 2013.07.08 |
글쓰기 생각쓰기 (0) | 2013.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