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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Archive

변증법은 살아 있다? 마르크스, 어떻게 읽을 것인가

by parallax view 2016. 6. 30.

리뷰 아카이브 기고문(16.05.28) 

<변증법은 살아 있다? 마르크스, 어떻게 읽을 것인가> 



변증법은 살아 있다? 마르크스, 어떻게 읽을 것인가 

'새로운 자본 읽기'를 둘러싼 논쟁으로 마르크스 다시 읽기 


  “항상 역사화하라!” 미국의 마르크스주의자이자 문학평론가인 프레드릭 제임슨은 그의 주저 『정치적 무의식』(민음사, 2015)을 위와 같은 선언으로 시작한다. 저 문장은 얼핏 이론에 대한 비평의 우위, 사유에 대한 역사의 우위, 주관에 대한 객관의 우위를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제임슨이 이야기하려는 바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는 책의 「서문」을 마무리하면서 다음과 같이 쓴다. 


  “이론과 문학사, 이 두 경향들은 서양 학계의 사고에서 너무나 자주 엄격히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되어 왔기에, 결론적으로 그 둘을 넘어서는 제3의 입장이 있음을 독자들에게 환기시킬 필요가 있을 듯하다. 그 입장이란 물론 마르크스주의다. 이는 이론의 우선성을 인정하는 입장인바, 그것은 변증법의 형식에 따라, 역사History 자체의 우선성을 동시에 인식하는 것이기도 하다(16쪽, 강조는 인용자).” 


  이 수수께끼 같은 표현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제임슨이 언급한 변증법의 형식은 어째서 서로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것을 ‘동시에’ 사고하라고 채근하는 것일까. 김공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의 「방법과 변증법에 대한 마르크스의 견해의 진화: ‘체계 변증법’ 논자들의 이해에 대한 비판」(경제와사회, 2015년 9월)은 마르크스가 사고를 개진하는 방법인 동시에, 마르크스를 이해하는 방법으로서의 변증법을 둘러싼 해석을 갈무리하는 글이다. 연구자는 이 논문에서 마르크스를 충실한 헤겔주의자로 해석하려는 경향을 비판적으로 살펴본다. 그는 특히 마르크스가 ‘역사’를 어떻게 전유했는지를 강조하는데, 이를 통해 마르크스 해석의 난점이 마르크스가 자신을 헤겔과 구분 지으려던 시도의 어려움에서 기인했음을 드러내고 있다. 


체계 변증법 논자들의 

‘새로운 자본 읽기’ 


  1970년대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의 르네상스’ 이후 학자들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구공산권 국가에서 교조적으로 이해되었고 그 원흉은 엥겔스에게서 비롯되었다는 비판을 제기했다. 특히 이른바 ‘새 변증법new dialectic’ 또는 ‘체계 변증법systematic dialectic’이라는 입장으로 분류되는 일군의 학자들은 기존의 연구들이 『자본론』에서 제시된 상품과 화폐의 관계를 역사적인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오독을 유발했다고 본다. 그들 중 대표적인 학자인 크리스 아서는 체계 변증법적 입장을 개괄하는 한편, 『자본론』을 헤겔 『논리학』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려 한다. 연구자는 이들에게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으로, “(1)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방법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을 마르크스의 가치이론의 특수성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로 삼고 있다는 것, (2) 이때 변증법적 방법을 대체로 서술에 대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 끝으로 (3) 이 방법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해 헤겔에 크게 기대고 있다는 것” 등을 지적한다(176쪽, 강조는 원문). 


  하지만 연구자는 헤겔과 변증법에 대한 마르크스의 태도를 살폈을 때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이해를 순전히 헤겔의 방법으로 바꿔치기할 수는 없으며, 『자본론』에 대한 기존의 ‘오독’에 대한 책임을 엥겔스에게 물을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초창기에는 헤겔 변증법에 대해 부정적이면서도 일정하게 그 성과를 인정하는 등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하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제1분책』(1859)부터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변증법을 추구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변증법으로 경도되는 것을 걱정했지만, 마르크스와의 토론 뒤에는 변증법을 긍정하는 것으로 입장을 바꾼다. 특히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의 서평을 엥겔스에게 부탁한 뒤, 엥겔스의 두 번째 서평에 마르크스가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음을 생각한다면 엥겔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릴 수만은 없다. 


  그렇다면 마르크스가 헤겔 변증법을 취했을 때 처한 난점은 무엇일까. 연구자는 아서 등의 체계 변증법 논자들이 마르크스의 변증법을 서술의 문제로 간주하고 ‘헤겔과의 긍정적인 관계’에서 해석하려 한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마르크스가 어떻게 헤겔과 자신의 변증법을 구별하려 했는지를 강조한다. 체계 변증법 논자들의 주장과 달리 마르크스에게 변증법은 ‘서술’의 문제이기보다 ‘사고’의 문제이며, 마르크스는 자신의 변증법을 헤겔과의 적대에서 창출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저 유명한 표현인 ‘물구나무 선 헤겔’을 거꾸로 뒤집어 유물론적으로 갱신하려 한다. 


  하지만 사고와 서술을 엄격하게 분리할 수는 없다. 마르크스는 자신과 헤겔 사이의 적대를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가치가 아니라 상품으로 시작한 것은 수많은 해석을 야기했다. 마르크스는 한 상품의 가치가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따라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가치는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하지만 가치에 관한 장으로 『자본론』을 시작한다면 헤겔식으로 말해 ‘정신의 자기실현’이라는 방식으로 서술되는 걸 피할 수 없다. 그 때문에 마르크스는 가치가 아니라 상품으로 『자본론』을 시작했다. 그리고 자본주의에 대해 추상적으로 서술한다는 인상을 피하고자 영국 공장법의 입법과 같은 당대의 주요한 사건과 역사적 예증을 삽입했다. 이를 두고 아서는 역사적 예증의 삽입은 마르크스의 서술에서 부차적인 것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마르크스는 '물구나무 선 헤겔'을 거꾸로 세우려 했다. (사진: https://ausomeawestin.wordpress.com/)


정치경제학 비판의 핵심,

역사 


  그런데 역사라는 항은 마르크스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이며 논쟁적인 것임이 곧 드러난다. 마르크스는 애덤 스미스와 같은 정치경제학자들이 가치라는 개념을 추상하면서 그 개념의 역사성을 보지 못한다는 걸 비판했다. 개념 그 자체의 자율적인 변화 과정이 아니라, “정규적·지속적인 대량생산의 등장이 ‘가치’라는 개념이 현실적으로 성립하는 데 있어 본질적인 역사적 전제가 된다.” 또한 마르크스가 『자본론』에 삽입한 역사적 예증은 단지 독자들로 하여금 책을 쉽게 이해하기 위한 당의정으로 쓰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가 도입한 역사적 예증은 이론을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들어 준다. 하지만 반드시 그 역도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난점은 마르크스가 생산물(활동)과 상품, 상품과 교환가치, 교환가치와 화폐 사이의 ‘범주의 이행’을 서술할 때 나타난다. 연구자에 따르면 체계 변증법 논자들은 범주의 이행을 역사적인 변화로 이해하는 경향을 ‘역사 변증법’이라 부르며 비판하고, 이를 순전히 논리적인 과정으로 바꿔 버렸다. 


  그러나 이때 ‘역사’는 “역사 일반이 아니라 자본의 역사, 곧 근대적 자본의 형성사”를 가리킨다(197쪽, 강조는 본문). 마르크스에게 개념적 재구성만이 문제였다면 체계 변증법 논자들의 관점대로 헤겔주의적인 서술만이 중요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역사로의 복귀’는 자본주의의 역사성과 그 변화 과정을 강조함으로써 개념이 진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도입한다. 비록 마르크스는 ‘하나의 유기적 총체로서의 자본의 내적 구조’를 밝히는 데 관심을 두었지만, 자본의 내적 구조는 자본주의의 역사성과 함께하기 때문에 매끄럽게 서술할 수 없는 빈틈을 드러낸다. 


  연구자는 마르크스 사고/서술의 ‘빈틈’을 강조함으로써 체계 변증법 논자들이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논리적으로 매끄럽게 서술하려 한다고 비판한다. 이때 연구자는 최근 국내의 몇몇 연구자들이 소개하고 있는 ‘새로운 자본 읽기’를 비판하고 전통적인 입장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런 논쟁은 제임슨이 『정치적 무의식』의 「서문」에서 제시했던 바, 이론의 우선성과 역사 자체의 우선성을 ‘동시에’ 인식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우며 또한 포기할 수 없는 과제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제껏 우리가 보이려고 애썼듯이, 하나의 논리적 구조물로서의 마르크스의 가치이론은 그 안에 일정한 빈틈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 빈틈은 마르크스 가치이론의 불완전성을 나타낸다기보다는 그 어떤 사회이론도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들을 가리킨다고 봐야 한다. 사정이 이렇다면, 그런 빈틈을 더 많은 논리로 채우려 하는 것은 헛된 일일 뿐이다. 오히려 마르크스의 가치이론이 갖는 특장점은, 마르크스 자신이 강조한 대로, 그것이 ‘그 자신의 한계를 안다’는 데 있다.” (200~20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