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아카이브 기고문 (2016. 04. 07)
'선량한 이주민'에서 '불량한 이주민'으로
주류 다문화 담론과 반反다문화 담론의 공모
우리는 ‘다문화 사회’에서 살고 있다. ‘문화적 다양성’과 ‘관용’이라는 모토 아래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사람들과 공존해야 한다는 건 우리 시대의 상식에 속한다. 정부는 다문화정책지원센터와 관련 프로그램을 통해 결혼 이주 여성의 국내 정착을 돕고, 기업은 각종 다문화 관련 사업을 전개하는 한편 이주 노동자의 고용을 책임짐으로써 한국 사회의 다문화 정착에 앞장서고 있다. 그리고 일찌감치 시민단체는 다문화 정책의 진정성과 효율성에 대해 꾸준히 문제를 제기하면서 다문화 정책을 다듬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여기에 방송이 한국말을 열심히 배우고 김장을 담그며 ‘어머니’와 오순도순 지내는 결혼 이주 여성을 비추면서 우리가 ‘다문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상상을 기정사실로 만들어 낸다.
하지만 이 모든 활동들은 다문화를 주어진 전제로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다문화 담론이 한국의 발전주의 논리와도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으며 신자유주의적 통치 또한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음을 밝힌 논문이 나왔다. 「‘선량한 이주민, 불량한 이주민’ - 한국의 주류 이주·다문화 담론과 반다문화 담론」(전의령, 경제와사회, 2015년 6월)은 한국의 이주와 다문화 담론이 갖는 특징을 ‘선량한 이주민’ 만들기로 규정하면서 언론·방송과 인터넷을 통해 심심찮게 들려오는 ‘불량한 이주민’ 담론이 주류 다문화 담론과 적대하기는커녕 이와 공모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여기서 ‘관용’이 문제적인 용어로 떠오른다. 한국에서 다문화 담론이 급부상하며 함께 거론된 것이 바로 이 ‘관용’과 ‘다양성’ 같은 개념이다. 이주민을 시혜와 온정의 대상이 아닌 동등한 인격으로, ‘관용적(포용적)인 태도로’ 대해야 한다는 대전제는 누구라도 반박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웬디 브라운의 『관용 -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을 인용하면서 관용이란 사실 “존재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것, 즉 바람직하지 않은 것, 천박한 것, 부적절한 것, 더 나아가 불쾌하고 메스꺼운 것들의 존재를 규제하려는 시도”를 함축한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관용은 정치적으로 껄끄러운 존재를 규제하고 관리함으로써 현 체제를 유지하는 데 동원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한국에 이주민이 들어온 지 30년이 되는 시점에서 돌아본 이주·다문화 담론은 ‘선량한 이주민’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주 노동자들이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열악한 작업장 환경과 저임금으로 인해 고통을 받자, 이주 노동자와 관련된 담론은 인권에 집중된다. 이때 인권은 ‘사람답게 살 권리’라는 본래의 의미와 함께, 경제적으로는 성장했지만 정치적으로는 미성숙한 발전주의 국가가 새롭게 챙겨야 할 덕목으로 격상한다. 이는 한국이 식민지를 겪은 주변부 국가이면서 성장 신화를 달성한 나라로서, 다른 ‘못사는 나라들’에서 온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식의 논리로 왜곡된다. 여기서 강조되는 게 바로 ‘수치심’이다. 한동안 언론은 “사장님 나빠요.” 라고 말하는 이주 노동자에게 부끄럽지 않느냐는 식의 수치심을 자극했고, <국제시장> 같은 영화에서 종종 재현되듯이 한국인 역시 이주 노동자였음을 강조함으로써 한국인의 ‘성숙’을 촉구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연대’를 강조하고 이주민이 사실 선량한 사람들이라고 역설하는 이주·다문화 담론은 그 안에 자본의 논리와 국가주의를 품고 있었다. 단적으로 한 이주 노동자 활동가는 “40만 이주 노동자가 한국에서 일하고 있으며 한국에는 이주 노동자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권리의 주체로 인정받기 위해 이주 노동자 스스로 국가의 도구성 안에서 자본주의 논리에 협력하고 있었다.
ⓒ 국제노동자교류센터
이주민이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어떻게 포함되고 배제되는가 하는 문제는 반反다문화 담론을 통해 더욱 강화된다. 오늘날에는 이주 노동자가 일자리를 빼앗고 결혼 이주 여성에게 복지혜택이 돌아감에 따라 역차별이 심해지고 있다는 식의 반다문화 담론이 방송과 인터넷을 통해 전파되는 상황이다. 이를 두고 ‘글로벌 표준’으로서의 ‘관용’과 ‘다양성’을 내세워 다문화 담론을 옹호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할뿐더러 사태를 호도하기 쉽다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반다문화 담론의 서사는 일견 흥미롭다. 이주민에 대한 혐오를 자극하는 이들은 스스로 인종주의자가 아니라고 선을 그으면서 “불법체류자와 범죄 외국인만을 배척”하는 ‘일반 시민’으로 자기를 호명한다. 특히 남성연대 같은 단체는 “불법체류자들은 세금도 내지 않고, 병역 의무도지지 않는 등 어떠한 의무도 없이 혜택만을 받아 간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그동안 ‘선량한 이주민’의 서사에서 나타났던 시간적 격차를 무시하고 이주민을 동시대적 타자인 ‘불량한 이주민’으로 재조명한다. 이주민은 더 이상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에서 온 불쌍한 외국인’이 아니라, ‘자국의 가난한 아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복지혜택을 부당하게 누리는 기득권층’으로 탈바꿈한다. 이렇게 이주민 혐오는 일종의 역차별 논리로 상승하는데, 이런 논리는 다른 나라들에서 급성장하는 우익 담론과 많은 부분에서 유사하다. 한국의 반다문화 담론은 경제위기에서 비롯된 불안정성이 심화되면서 그 불안을 타자에게 씌우는 식의 운동이 활발해지는 것과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그보다는 서민 경제의 파탄을 위기로 규정하면서 이 책임을 국가와 자본이 아닌 외국인 노동자에게 전가시키고 있다는 지적(강진구 2012: 18)에서 보듯이, 새로운 것은 서민 경제의 파탄이라는 사회적 위기감이고, 그리고 이것의 근본적 책임이 신자유주의적, 금융자본에 의한 한국 경제의 구조 조정에 있다면, 반다문화 담론은 이와 같은 경제적 모순을 이주민과 다문화로 야기된 갈등으로 탈바꿈하는 우익 포퓰리즘으로 작동한다. (256쪽)
그런 점에서 ‘선량한 이주민’과 ‘불량한 이주민’이라는, 일견 대립하는 서사는 한국의 다문화 담론이 갖는 특성과 위험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주민의 인권은 엉뚱하게도 내국인의 권리 문제로 뒤바뀌었고, 갈수록 이주민 혐오는 심화되고 있다. 한국인이 이주민과 공존한 지 30년이 지나며 다문화 담론과 정책이 형성되고 다듬어졌지만, 이는 일종의 통치 전략으로 기능하면서 여러 가지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이를 두고 ‘정치적으로 더 올바른’ 다문화 담론으로 대응할 수는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불량한 이주민’이라는 관점 자체가 ‘자유로운 권리’라는 신자유주의적 사고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다문화 담론의 도덕적·윤리적 딜레마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다문화 담론의 전제 자체를 의심하고 비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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