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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Archive

빚투성이 노동자, 새로운 정치를 꿈꿀 수 있을까?

by parallax view 2016. 5. 29.

리뷰 아카이브 기고문 (2016. 04. 04) 

<빚투성이 노동자, 새로운 정치를 꿈꿀 수 있을까?> 



빚투성이 노동자, 새로운 정치를 꿈꿀 수 있을까?

금융화된 일상과 심화된 탈정치화


  신용카드든 체크카드든 카드를 쓰지 않는 직장인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통장으로 입금되는 월급은 학자금대출이며 주택담보대출의 이자로 나가고, 어떤 이들은 재테크라는 명목으로 펀드나 저축보험 같은 유사예금상품에 가입해 국민연금으로는 모자랄 노후를 보장하려 한다. 이렇게 일하는 사람들의 일상이 금융으로 꼼꼼하게 채워져 있다시피 한 지금, 임금만으로는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는 인식도 날이 갈수록 커진다. 그래서 숱한 금융위기를 겪으면서도 사람들은 주식과 부동산을 향한 열망을 포기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기존의 공장이나 작업장에서 이뤄져 왔던 노동자 투쟁과 별개로, 노동자의 일상이 금융에 잠식됨에 따라 노동자의 탈정치화가 더욱더 가속화됨을 경고하는 논문도 나오고 있다. 「가계의 금융화와 일상의 정치」(최철웅, 마르크스주의 연구 12(2), 2015년 5월)는 금융화된 일상 속에서 노동자의 이해관계가 자본의 논리에 종속되는 현상을 고찰하는 한편, 금융화를 연구하는 기존의 입장들을 비판하며 저항을 위한 새로운 전환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금융화에 대한 새로운 관점들의 등장


  논문에 따르면 그 동안 경제학에서는 금융화를 산업자본에 대한 금융자본의 우위, 가계자산의 증권화 등의 문제로 보아 왔다. 이에 대한 비판으로 등장한 것이 경제사회학 혹은 문화경제학적 접근이다. 문화경제학적 접근은 자본을 객관적으로 우리 앞에 그대로 주어진 사물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구성되고 수행되는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이때 문화는 단지 경제를 반영하거나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기호들의 집합이 아니라, 경제적 삶을 통치하는 데 필요한 언어와 장치를 제공하는 물질적 힘이다. 말하자면 경제사회학, 문화경제학적 접근은 사람들이 신용카드를 쓰고 펀드에 투자하고 민간연금으로 노후를 보장하는 다양한 실천을 통해 금융자본주의가 구성된다고 본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관점이 금융을 문화적 실천으로 본다는 점에서 흥미롭고 유용하지만, 경제적인 현실의 ‘표면’만을 살핀 나머지, 금융의 사회적 관계와 권력 자체도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구성물이란 점이 간과된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마르크스가 견지했던 역사유물론적 관점이 더욱 지금 상황에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에 따르면 역사유물론적 관점은 자본주의 사회의 표면에 나타나는 사회경제적 현상에 대한 설명이 잉여가치의 생산과 유통, 분배를 통한 자본주의의 동학과 그 과정으로부터 분석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런 관점으로 본 오늘날 금융화 현상의 주요한 특성은 노동자의 일상적인 재생산 활동이 필수적으로 금융적 수단을 통해 영위되고 있다는 데 있다. 금융적 수단은 신용카드나 학자금대출, 주택담보대출 같은 형태의 부채가 될 수도 있고, 민간연금이나 저축성 보험 같은 저축이 될 수도 있다. 이때 부채와 저축은 아주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모두 노동자의 임금을 기반으로 한다는 데 있다. 노동자의 재생산 비용이라 할 수 있는 임금을 미리 당겨쓰거나(부채), 미래를 위해 미루어 놓는(저축)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러다 보니 ‘돈이 돈을 낳는’ 듯한 현상을 보게 된다. 마르크스는 이를 ‘이자 낳는 자본’이라 불렀으며, 오늘날 금융화 현상은 20세기 후반 들어 자본축적의 위기를 신자유주의적 금융화를 통해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자 낳는 자본의 범위와 보급이 증대된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단적으로 신용카드와 각종 현금 서비스 같은 소비자신용의 확대는 일종의 허구적인 상품인데, 소비자신용의 팽창으로 형성된 자본을 의제자본fictitious capital이라고 부른다. 의제자본은 ‘미래의 생산에 대한 축적된 청구권’으로서 신용은 본질적으로 의제자본이고 노동자가 소득을 미리 당겨쓰는 것에 대한 미래의 청구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미래의 소득 흐름을 전유할 수 있다면 그게 기업에 빌려주건 노동자에게 빌려주건 화폐자본에게는 아무런 차이가 발생하지 않는다. 여기서 노동자에게는 마르크스가 ‘이차적인 착취’라 불리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런 ‘금융적 수탈’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면서 노동자는 더욱더 자본과 밀착한 관계를 맺게 된다. 


출처: 참세상


이자 낳는 자본의 시대,

새로운 정치를 모색할 수 있는가


  단적으로 IMF 이후 정부가 은행의 대형화와 겸업화 추진 정책을 시행함에 따라 은행은 일종의 ‘금융 슈퍼마켓’이 되어 수익증권과 보험을 판매했고 기업대출과 가계대출의 비중도 변해, 1998년 기업대출이 예금은행 총 대출의 72%였고 가계대출은 28%에 그쳤으나 2005년에는 각각 50%씩 차지해 가계대출의 비중이 급증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뮤추얼 펀드가 급격히 성장하면서 2004년 465만 계좌였던 것이 2007년에는 2350만 계좌로 늘어났다. 2007년 경제활동인구가 2400여만 명이었는데 그야말로 경제활동인구 1인당 1계좌를 가진 셈이었다. 여기에 기존의 퇴직금 제도가 퇴직연금으로 점차 바뀌면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후를 ‘투자’할 민영화한 퇴직연금을 선택하고 그 투자수익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그리고 고령화 추세라는 인구학적 요인과 국가연금의 ‘임박한 위기’라는 통념으로 인해 연기금의 민영화 또한 가속화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으로 인해 다음과 같은 진단이 나온다. 


  사회적 서비스가 민영화되면 노동자계급은 사회적 권리를 시장에서 구매해야만 하고, 소득에 따라 사회적 권리를 차별적으로 제공받게 된다. 반면 자본의 입장에서 사회적 재생산 영역의 금융화는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새로운 산업시장이 창출되는 셈이다. (65쪽)


  이렇게 형성된 ‘새로운 시장’은 IMF 이후 김대중 정부의 내수부양 정책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위축된 민간소비를 진작시키기 위해 소비자 금융의 활성화를 추구하면서 2002년에 총 1억여 장의 신용카드가 발급되면서 경제활동인구 1인당 4.6개의 신용카드를 보유한 셈이 되었다. 잘 알려졌다시피 신용카드를 통한 생계용 대출이 늘어나면서 신용카드사의 부실위험이 높아지고 업체 간의 과당경쟁으로 신용대출이 더욱더 증가함에 따라 연체자와 신용불량자가 급증했다. 주택담보대출과 학자금대출도 증가해 집값과 대학등록금을 낮추기는커녕 대출액과 대출자가 점점 늘어나는 현상을 맞이했다. 


  ‘이자 낳는 자본’만이 보이는 금융시장에서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은 사적인 계약관계로서의 채권-채무 관계뿐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해 어떤 정치학이 가능할까. 저자는 ‘부채의 정치학’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말한다. 부채탕감 운동 같은 활동은 “신용의 확장을 사회적 권력관계로 파악하고 주체성의 차원을 강조하긴 하지만, 화폐와 신용의 동학을 자본축적의 메커니즘과 계급관계에서 분석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자본의 지배가 일상적인 재생산의 영역에까지 깊이 침투한 현실에 대응해 전통적인 ‘생산의 정치’와 ‘생활정치’를 포괄하면서 자본의 물신주의에 균열을 일으킬 급진적인 정치적 사유와 상상이 시급히 요청된다. (7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