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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Archive

박정희의 시간, 개와 늑대의 시간

by parallax view 2016. 5. 28.

리뷰 아카이브 기고문 (2016. 03. 20)

<박정희의 시간, 개와 늑대의 시간> 



박정희의 시간, 개와 늑대의 시간

비동시성의 동시성에 비춰 본 한국 정치사


  한국 현대사는 몇 가지 사건의 연속으로 쉽게 설명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식민지 해방, 이념갈등과 분단, 전쟁, 독재, 혁명, 정변과 군사정권, 민주화, 세계화. 우리가 흔히 하는 말대로 한국 현대사의 드라마는 파란만장하다. 그 드라마의 한가운데 있는 초상 중 유독 우리에게 짙은 그늘을 드리우는 인물은 단연 박정희일 것이다. 


  쿠데타의 주역이면서 산업화의 선봉이었고 민주화의 숙적이었던 이 인물만큼 명암이 뚜렷하고 후세의 평가가 엇갈리는 이는 없을 것이다. 서울시립대 국제관계학과 이병하 교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 시간의 다중성, 그리고 한국정치」(『국제정치논총』 55(4), 2015년 12월)라는 서평에서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강정인 교수의 『한국 현대 정치사상과 박정희』(아카넷, 2014)와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임혁백 교수의 『비동시성의 동시성: 한국 근대정치의 다중적 시간』(고려대학교 출판부, 2014)을 비교하며 한국 정치사의 주요한 굴곡인 박정희의 시대에 대한 학계의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개괄한다. 


비동시성의 동시성


  이병하 교수는 지금까지 한국 정치사는 시기별 주요 행위자에 초점을 맞추거나 행위자를 둘러싼 구조적 요인에 방점을 뒀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강정인 교수와 임혁백 교수는 기존의 논의를 참조하되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그들은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개념을 강조한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은 20세기 초 독일의 마르크스주의자 에른스트 블로흐가 독일의 역사적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제안한 개념이다. 블로흐는 독일이 급격한 산업화에 봉착하면서 이른바 ‘선진적인’ 세계 자본주의의 물결에 편승하는 한편, 봉건적인 관습이 살아남아 사회의 변화와 충돌하며 파시즘이 자생하는 것을 ‘비동시성의 동시성’으로 설명하려 했다. 


  강정인 교수와 임혁백 교수는 이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한국 현대사를 더 깊이 이해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강정인 교수는 서구에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사회주의가 순차적으로 이어지면서 사회가 경제적인 성장에 따른 충격을 스스로 완화할 수 있었다고 가정한다. 그와 달리 한국에서는 서구의 이데올로기가 서구에서 떨어져 나와 한국에 들어오면서 혼란을 빚었기 때문에 진정성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고 주장한다. 한편 임혁백 교수는 브로델과 월러스틴 등 세계체제론자의 논의를 빌려 한국 현대사가 일종의 ‘긴 20세기’였다고 설명한다. 그는 한국이 전근대성을 탈피하면서 근대성을 완결하고 또한 탈근대에 진입해야 하는 과제를 동시적으로 추구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고 주장한다. 


  이때 강정인 교수와 임혁백 교수, 그리고 이들에 대한 비평을 시도하는 이병하 교수 모두 직선적 시간관만으로는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는 후기구조주의적 관점을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하고 있다. 여기서 여러 사건이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여러 개의 시간이 한꺼번에 포개진다는 다중적 시간관이 역사 해석에 미치는 영향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박정희의 시간, 개와 늑대의 시간


  흥미로운 건 이병하 교수가 『한국 현대 정치사상과 박정희』와 『비동시성의 동시성: 한국 근대정치의 다중적 시간』을 비교하면서 두 저작을 박정희의 시대에서 포개려는 데 있다. 그에 따르면 권위주의와 민주주의의 이중적 정치질서가 서로 포개지고 공존하던 시기가 바로 박정희의 시간(시대)이다. 하지만 두 연구자는 박정희가 민주주의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해석을 달리 한다. 강정인 교수는 박정희가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인정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권위주의가 민주주의를 갉아먹었다고 본 반면, 임혁백 교수는 박정희는 처음부터 민주주의에 적대적이었다고 본다. 



1961년 육사 생도의 군사정변 지지 시위를 보는 박정희와 정변 주도 세력, 출처: 나무위키


  그러면서 임혁백 교수는 대항문화로서의 청년문화(‘통기타 문화’)와 민중문화운동에 주목한다. 그는 그중에서도 판소리, 풍물패, 마당극과 같은 민중문화운동이 청년문화보다 새마을 운동 등으로 대표되는 박정희의 문화정치에 보다 효과적으로 대응하며 대항 헤게모니를 구축할 수 있었다고 본다. 여기서 임혁백 교수는 문화연구의 주된 언어였던 문화정치학, 즉 문화와 이데올로기의 헤게모니를 둘러싼 투쟁을 박정희의 시간들을 해석하는 데 활용한다.


  정리하자면 강정인 교수에게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서구의 역사적 경험을 순차적으로 따라가지 못하는 한국 정치사의 상황을 설명하는 언어라면, 임혁백 교수에게는 같은 시대 안에서 서로 다른 시간을 경험하는 세력들이 경합하고 길항하는 것을 드러내는 표현이 된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대학생을 ‘민주화 프로젝트’의 대표자로, 군인을 ‘산업화 프로젝트’의 실행자로 가정한다는 점에서 본질론에 머무는 듯하다. 대학생의 ‘민주화 열망’은 준군사조직이라는 형식을 통해 작동했고, 군인의 ‘산업화’ 내지 ‘조국 근대화’는 자유민주주의라는 형식을 통해 승인되었다는 점에서 이 두 집단은 상상 이상으로 가깝지 않았을까? 박정희의 시간은 ‘개와 늑대의 시간,’ 민주주의와 권위주의가 뒤섞인 해질녘의 어슴푸레한 시간은 아닐까?


모든 사람들은 동일한 현재에 살고 있지 않다


  두 연구자의 논의에서는 다중적 시간관이라는 ‘세련된’ 접근에도 여전히 경직된 부분이 드러나 아쉽다. 강정인 교수의 논의에서는 발전된 서구와 낙후된 탈식민지라는 서사가 깔려 있다는 점에서, 임혁백 교수의 논의에서는 시간과 문화, 이데올로기와 담론이 개념적으로 뒤섞여 있어서 다중적이고 중첩적인 시간관을 통해 박정희의 시간을 새로이 읽으려는 시도가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인상을 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럼에도 이병하 교수는 두 연구자의 시도를 높이 평가하면서 부족한 점에 대해 지적하는 한편, 그 틈새를 한국 경제발전 모델로서의 만주국 연구나 대항공론장 연구로 메워야 할 것이라고 제언한다. 그러면서 그는 “모든 사람들은 동일한 ‘현재(Now)’에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이 다름 아닌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는다면 우리는 역사 속에 “다양한 시간적 리듬들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 시간의 다차원성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역사를 “동일성과 단순한 반복을 요구하는 단일한 직선적 시간이 아니라, 고려해야 할 다양한 시간성들이 공존하고 교차하는 지점으로 의미화”할 수 있다. (27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