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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by parallax view 2016. 4. 23.

* 2년 전 쓴 글을 올려 놓는다.



  얼마 전 개봉한 <카운슬러>(2013)라는 영화를 보셨나요? <카운슬러>는 한 인간의 몰락에 대한 영화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러 인간’의 몰락이라고 해야겠지요. 마약을 밀매해 큰돈을 벌어보려는 변호사는 같이 사업을 하던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합니다. 배신자는 또 다른 동업자에게 배신당하죠. 그런 점에서 <카운슬러>는 배신에 대한 영화처럼 보입니다. 주인공은 자신의 동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배신당한 셈입니다. 자신은 남들처럼 비참한 말로에 빠지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 때문에요. 수많은 사람들이 배신에 얽힙니다. 주인공, 동업자, 연인, 그리고 전혀 상관없을 것처럼 보였지만 마약 거래 현장에서 서로를 속이고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들 모두가 그렇습니다.

  <카운슬러>는 이미 결정된 운명에 대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주인공이 마약 거래에 손을 대겠다고 결정한 순간, 그의 운명은 결정되었습니다. 결과를 바꿀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의 세계는 파괴되었습니다. 이어지는 불행은 떠안을 수밖에 없는 결과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저는 영화가 무척 종말론적이라고 느꼈습니다. 영화가 배신과 살인을 정교하게 묘사할수록 깊어지는 허무감에 가벼운 몸살을 느꼈습니다. <카운슬러>는 코맥 매카시가 시나리오를 집필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로드』(문학동네, 2008)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사피엔스21, 2008)의 그 코맥 매카시 말입니다. 필립 로스는 코맥 매카시와 함께 ‘미국 현대문학의 4대 작가’로 꼽혔다고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저는 이 두 작가의 작품이 얼핏 닮았다고 느꼈습니다. 비록 매카시의 시나리오는 영화를 위한 것이고, 로스는 자신의 경험을 소설로 옮긴 것이라고 하지만요. 오히려 두 작품의 차이는 시나리오냐 소설이냐가 아니라 ‘이야기’를 다루는 시선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필립 로스의 소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문학동네, 2013)는 두 노인의 후일담을 다룹니다. 1997년, 네이선 주커먼은 60대에 접어들었고, 그의 고등학교 선생이었던 머리 린골드는 아흔 살을 맞이했습니다. 그들은 47년이 지나 해후했습니다. 둘은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이라 린골드. 아이언 린 혹은 아이언맨이라는 별명을 가진 남자는 라디오드라마의 인기 스타였습니다. 그의 큰 키와 마른 체격, 우둘투둘하고 긴 손가락은 꼭 링컨을 닮았습니다. 도랑을 치고 채굴을 하고 레코드 공장을 전전하던 아이라는 노조 행사에서 링컨을 연기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1940~50년대는 라디오의 시대였습니다. 링컨을 연기한 아이라는 라디오드라마에 출연하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는 유명 여배우 이브 프레임과 결혼하면서 가정을 꾸리는 꿈도 이뤘습니다.

  1948년 어느 늦가을, 열네 살의 네이선은 머리 린골드의 동생 아이라를 만납니다. 네이선은 아이라에게서 빛나는 지성과 강인한 의지를 보았습니다. 네이선은 세계의 규칙을 위반하는 것을 넘어 규칙을 통째로 바꾸고자 하는 혁명가의 모습에 반합니다. 한편 아이라는 네이선에게서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소년 혹은 자신이 갖기를 바란 아들을 발견합니다. 그는 네이선에게 좋은 사람으로 비치길 원했습니다. 아이라는 자신의 오두막에 네이선을 초대하고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성대한 파티에 초대하기도 합니다. 네이선이 보기에 아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새 아버지’였습니다. 하지만 아이라는 네이선에게 잠시 거치는 정거장이었습니다. ‘자식’은 늘 ‘부모’를 배신하니까요. 배신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갈 수 없으니까요.

  소설이 강조하는 배신이 이런 것이라면 이야기는 훨씬 편안했을 것입니다. 이야기의 주된 시기는 1940년대 말~1950년대 초입니다. 미국에서 매카시즘이 횡횡할 때입니다. ‘적색 공포’라 부르는 시기였습니다.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는 정부와 연예계 등지에 공산주의자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장했습니다. 이때 아이라 역시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히고 일자리에서 쫓겨납니다. 이브가 쓴(사실은 아이라의 정적이 대필한)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라는 책 때문입니다. 그녀는 아이라가 소련의 스파이이며 선량한 자신과 딸을 공산주의자로 만들려 했다고 고발합니다. 지쳐가던 아이라는 결국 완전히 나가떨어집니다. 물론 이브도 멀쩡하게 살아가지는 못합니다.


  소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는 1950년대 미국의 분위기를 전달합니다. 동서 양 진영이 공유했던 억압, 즉 매카시즘, 적색 공포, 스탈린주의의 가혹함, 반(反)유대주의, 널리 퍼진 거짓말을 신랄하게 다룹니다. 모든 거짓말은 배신의 원천이면서 또한 배신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거짓말. 끝없이 쏟아지는 거짓말. 진실을 거짓말로 바꾸고, 거짓을 또다른 거짓말로 바꾸었지. 사람들은 거짓말을 늘어놓는데 능력을 발휘했지. 거짓말의 기술을 유감없이 발휘했네. 상황을 신중하게 재고, 그런 다음 침착한 목소리와 정직한 표정으로 아주 생산적인 거짓말을 쏟아냈어. 그들이 설령 부분적으로는 진실을 말했더라도, 그건 십중팔구 거짓말을 위한 것이었어(441쪽, 강조는 본문).” 하지만 희생자인 아이라 역시 거짓말을 합니다. 자신의 삶과 이상을 지키기 위해서요. 머리 선생도 거짓말을 합니다. 동생인 아이라를 지키기 위해서요. 고발자인 이브 또한 거짓말을 합니다. 자신의 딸을 지키기 위해서요. 이 모든 거짓말은 대립하는 이데올로기와 뒤섞이면서 더욱 증폭됩니다.

  얼핏 보면 소설은 정치와 이데올로기에 동원되고 결국 배신당하는 사람들을 묘사하면서 이데올로기의 무상함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편 소설이 작가의 실제 경험과 관계된 것(로스는 자신과의 사생활을 회고록으로 폭로한 아내에게 분노해 이 작품을 발표했다고 하는군요)이라는 이야기를 떠올리다 보면, 이 소설을 어떤 대의나 선량함도 인간의 나약함과 저열함을 당해내지 못한다는 메시지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카운슬러>와 비교하면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역시 배신에 대한 이야기로 비칩니다. 또 이미 내린 선택에 따른 결과를 고스란히 감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대한 이야기로도 보입니다.

  아이라가 정말로 혁명가로서 살기를 원했다면 스타로서의 삶, 가장으로서의 삶을 포기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 것도 포기하지 못합니다. 또 머리 선생은 자신의 선량함만은 포기하지 못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서서히 소중한 것을 잃어갑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언젠가, 포기하는 순간 자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은 것, 그것을 그 사람의 스타일이라고 적었습니다. 누군가의 스타일은 바로 그 사람의 ‘약점’일 것입니다. 오직 약점만이 그 사람을 자기 자신으로 있도록 만듭니다. 그들의 약점은 그들의 몰락을 이끌어 냅니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모든 선택과 실수는 다른 방식을 통해 승화할 기회를 얻습니다.


  로스의 소설이 매카시의 <카운슬러>와 다르다면 바로 인간의 약점을 응시하는 시선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카운슬러> 속 인물은 누구의 도움도, 위로도 받을 수 없습니다. 그 세계 안에서는 복수도 불가능합니다. 방향 없는 악의만이 넘실대는 지옥입니다. 그러나 로스의 소설에서는 인물의 몰락과 고통, 선택과 실수는 네이선과 머리 선생의 대화를 통해, 네이선과 머리 선생이 풀어내는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에게 전해질 수 있는 것이 됩니다.


  “네이선, 난 누구에게도 이 얘기를 할 기회가 없었네. 이렇게 길게 말일세.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거야. 지금 이 자리에서 다 얘기하고 싶네. 모든 걸 다.”

  “왭니까?”

  “살아 있는 사람 중 아이라의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나뿐이고, 그 이야기에 관심 있는 사람은 자네뿐이야. 그래서 그렇다네. 다른 사람은 모두 죽었으니까.” 선생님은 소리내어 웃었다. “나의 마지막 과제인 셈이지. 아이라의 이야기를 네이선 주커먼과 정리하는 것.”

  “그걸로 제가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건 내 일이 아닐세. 내 일은 자네한테 전하는 것뿐이야. 자네와 아이라는 사이가 각별했으니까.” (441~442쪽)


  누군가 ‘이야기꾼’이 되어 이야기를 다른 이에게 전달한다는 것. 이야기는 역사를 되돌릴 수도, 불의를 저질러 놓고 버젓이 살아 있거나 ‘위인’으로 죽은 악인을 완벽하게 탄핵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질기게 살아남아 고통의 시간을 조금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승화시킵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공식적인 기록을 통해 위선의 가면을 덮어쓴 자를, 또 거짓말의 당사자이면서 희생자가 된 이를 다음 세대가 잊지 못하도록 합니다. 이야기로 번역된 인간의 약점을 다른 말로 하자면 ‘비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의 부조리를 상기시키는 형식으로서의 비극 말입니다. 저는 배신과 복수를 극화함으로써 슬픔을 승화하는 비극은, 정치적 열정에 둔감하고 허무주의에 빠진 우리 시대 무기력의 해독제가 될 수 있다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같은 비극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