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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과 공화국 - 사회적 연대의 탄생

by parallax view 2014. 11. 1.

  여기 하나의 장면이 있다. 1832년 6월 파리는 투쟁의 열기로 들끓었다. 2년 전의 혁명으로 샤를 10세가 퇴위했지만 왕이라는 자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프랑스 국민은 루이 필립을 새로운 왕으로 영접했을 뿐이다. 가난과 질병에 지친 민중은 언제라도 폭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적어도 공화주의자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라마르크 장군의 장례식을 계기로 공화주의자와 그를 지지하는 빈민이 시위를 일으켰다. 정부군은 곧바로 진압에 나서고 반정부 시위대는 무장을 시도하며 격렬하게 저항한다. 피비린내 나는 격전으로 저항군과 정부군 모두 큰 피해를 입었고, 결국 봉기는 진압된다.


  영화 <레 미제라블>을 통해 잘 알려진(이미 고전이 된 원작소설과, 영화화를 고무한 뮤지컬의 명성이 더 높지만) 6월 봉기는 대중매체의 재현이 아니었다면 프랑스 혁명사의 한 장(章)에 불과했을 것이다. 우리는 6월 봉기의 실패에서 무엇을 볼 수 있을까. 무장봉기는 실패가 예정되어 있기에 무망하고 위험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봉기가 수시로 벌어졌던 프랑스 혁명 전통의 무모함을 떠올릴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실패를 목전에 두고도 ‘지금 여기’에서 시도하는 유토피아적 도약으로 해석할 이도 아주 적게나마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장면이 있다. 어떤 후보가 당선되더라도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가 실현될 것처럼 보이던 지난 대선을 돌이켜보면, 지금 우리는 ‘보편적 복지’ 구호의 초라한 내막을 목도하는 중이다. 국민연금의 국가 지급보장은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공무원연금과 관련해서는, 공무원이 납부해야 할 기여금은 올라가고 수령액은 낮은 ‘개혁안’을 두고 국회 내외로 공방이 벌어지는 상황이다.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의제였던 보편적 복지는 이렇게 또 하나의 공약(空約)이 되어 힘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별로 상관없어 보이는 두 장면의 저변에 동일한 개념이 흐르고 있다면 어떨까. 더 나아가서 복지국가란 6월 봉기와 같은 계급투쟁을 통해 태어났다고 하면 어떨까.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민주권과 현실적인 빈곤 사이의 간격을 좁혀 봉기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에서 복지국가가 나왔다면 어떨까. 이때 ‘연대(solidarité)’는 단지 내 옆에 있는 사람과 정서적, 물질적으로 얽혀 있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연대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당위가 아니라 계급투쟁 중인 프랑스에서 갈등을 봉합하고 공화국을 유지하기 위해 제안된 발명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다나카 다쿠지의 『빈곤과 공화국 - 사회적 연대의 탄생』(2014)은 복지국가 프랑스의 형성을 사상사적 관점에서 살펴본다. 그는 특히 18세기 말의 프랑스 혁명부터 19세기 말의 제3공화정 기간 동안 사회적 연대라는 개념이 제안되고 형성되는 과정을 사상가들의 저작과 연설을 면밀하게 검토해 제시한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프랑스일까.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프랑스는 선진국들 중에서도 가장 탄탄한 사회보장체계가 뿌리를 내린 나라였다. 이는 ‘사회적 공화국République Sociale’과 ‘연대solidarité’라는 단어와 더불어 표현되었다. 그런데 1990년대 들어 지구화와 유럽 통합이 진전되는 과정에서 이와 같은 탄탄한 사회보장체계가 프랑스 기업들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실업을 증가시킨다는 비판이 대두되었다. 실제로 프랑스의 실업률은 10퍼센트에 가까울 정도로 높았고, 장기실업자나 청년실업자가 도시에 넘쳐나면서 ‘사회적 배제’가 누구의 눈에도 명확한 현상이 되었다. 이에 따라 ‘연대’의 개념을 어떻게 다시 정립할 것인가, ‘사회적인 것’을 어떻게 재구축할 것인가 하는 물음들이 이어졌다. (5~6쪽, 한국어판 서문)


  프랑스에서는 ‘복지국가의 위기’가 본격화되는 상황에서 다시금 ‘사회적인 것’에 대한 성찰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반면 기업복지가 활성화된 일본에서는 1990년대 이후 일본형 복지사회 모델이 붕괴하면서 고용과 생활의 불안정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프랑스와 달리 ‘사회적인 것’에 대한 논의가 부족한 상황이기에 근본적인 검토부터 필요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한국도 예외일 수 없다. 국민건강보험과 국민연금 등 주요 사회보장제도가 ‘위에서부터’ 제안되고 형성된 한국은 사회적 연대라는 개념이 여전히 낯설다. 한국 역시 제도의 바탕에 깔린 이념과 사상부터 다시금 살펴봐야 할 상황이지 않을까. 


  책은 19세기 프랑스의 지도적인 담론을 정치경제학과 사회경제학, 사회적 공화주의와 연대주의로 구분하고, 이들이 서로 경합하면서 사회적 연대로서의 공화국을 형성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흥미로운 지점은 프랑스 혁명의 주요 이념인 자유, 평등, 우애(박애) 중 ‘우애fraternité’가 ‘연대’로 바뀌는 과정이다. 여기서 핵심은 ‘빈곤’에 있다. 빈곤으로 인한 민중 생활의 파탄과 그에 따르는 봉기를 억제하는 데 있어 우애라는 감정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사회적 연대가 제안된 배경이다. 즉, ‘사회’라는 유기체를 상정해 이를 지탱할 수 있도록 개개인이 하나의 집단으로 묶이도록 하고, 국가가 이에 책임을 지는 것, 이것이 사회적 연대의 핵심이다.


  제3공화정기 에밀 뒤르켐, 레옹 뒤기, 레옹 부르주아 등의 사상은 사람들의 상호의존성을 연대라 칭하면서 국가를 연대의 가시적 표현으로 파악했다. 이를 통해 한편으로는 무제한적 주권론을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에 대한 국가의 제한적 활동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공했다. (171쪽) 


  그런 점에서 연대는 자발적인 감정이나 친밀한 인간관계가 아니라 개인과 개인을 ‘사회’로 연결할 수 있는 장치 혹은 구성물을 통해 작동한다. 연대주의는 이런 사회학적인 연대 개념을 정치의 문제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담론이라 할 수 있다. 연대주의가 실현된 예는 무엇일까. 건강보험은 대표적인 사회적 연대의 표현이자 연대의 원리로 작동하는 사회보장의 장치다. 보험료는 소득별로 차등을 두지만 수혜는 보험료 납입자라면 납입액의 차이와 무관하게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런 개념과 장치를 통틀어 ‘사회적인 것the social’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사회는 그 자체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을 통해 형성된 발명품이라는 것이다. 


  프랑스 복지국가의 독특한 점은 사회적 연대의 장치가 국가 주도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것은 프랑스의 사회보장정책이 ‘사회경제학’이라는, 연대주의와 경쟁하고 길항하는 사유체계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사회경제학은 상공업의 증진에 관심을 집중한 정치경제학에 대항해 보수주의적인 사회개혁을 뒷받침하는 담론이다. 사회경제학의 이데올로그는 국가의 직접적인 개입보다 아소시아시옹association이라 불린 각종 중간집단(공제조합, 저축금고, ‘파트로나주’라 불린 자선단체 등)을 통해 가부장적인 사회질서가 형성되기를 기대했다. 연대주의와 사회경제학의 길항관계는 19세기 말 프랑스의 주된 사회보장 입법에서도 나타난다. 


  노동재해보상법은 이 법안에 무관심했던 노동운동 세력에서 이탈한 알렉상드르 밀랑 등 수정사회주의와 급진공화파의 제휴 혹은 급진공화파와 온건공화파의 타협을 통해 1898년 4월 9일에 최종적으로 법제화되었다. 그 내용을 보면, 무과실책임원칙에 기초하여 사용자들의 노동재해보상책임이 결정됐지만 특정 산업노동(공장・건축・철도・광산 등)으로 대상을 한정하고, 피해자에 대한 보상액도 낮게 제한했으며, 사용자의 보험 가입도 임의적으로 만드는 등 사회경제학의 주장을 대폭 반영했다. (221쪽) 


  노동자・농민퇴직연금법은 정치경제학과 사회경제학 쪽의 비판에 앞서 상원에서 대폭 수정(국고 부담의 경감)을 강요당했고, 최종적으로는 급진공화파와 알렉상드르 밀랑, 르네 비비아니 등 수정사회주의자들과의 제휴를 통해 1910년 3월 22일에 가결되었다. 하지만 이 법은 공제조합주의자들과, 노동자의 부담을 기피하려는 생디칼리스트들, 그리고 노동총동맹의 격한 반대에 부딪혔고, 철저한 의무화도 이뤄지지 못했으며, 가입도 정체상태였다는 점에서 형식에 그치고 말았다. (224쪽) 


  ‘복지국가’ 프랑스가 사회보장 제도화의 실패로 시작되었다는 점도 흥미롭지만, 사회적 연대가 복잡하고 다양한 사상・이념 간의 경쟁과 길항을 통해 형성되었다는 것에 더욱 눈길이 간다. 말하자면 주권을 가진 인민의 빈곤을 사회적 연대를 통해 해소함으로써, 더 나아가 공화국을 사회적 연대를 지탱하는 장치로 만들어냄으로써 계급갈등을 성공적으로 봉합했다는 관점을 보다 역동적인 사상적 경쟁으로 전환한 데에 『빈곤과 공화국』의 미덕이 있다. 최근 몇 년간 국내 인문사회과학계에서는 미셸 푸코의 통치성gouvernementalité 개념과 이를 확장한 통치성 연구를 적극적으로 끌어오고 있다. 다나카 다쿠지는 통치성 연구의 성과를 받아들이되 이를 비판적으로 다시 해석한다는 점에서, 통치성 개념을 통해 한국에서의 ‘사회적인 것’을 사유하려는 연구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다시 두 개의 장면으로 돌아와 보자. <레 미제라블> 속 6월 봉기의 처참한 실패와 현재 우리가 목도하는 사회보장제도의 후퇴. 이 두 장면의 저변에 흐르는 것은 연대라는 개념이다(<레 미제라블> 속 빈민은 말 그대로 ‘불행한 사람들(les Misérables)’이다). 다만 첫번째 장면은 연대가 형성된 배경을, 두번째 장면은 연대가 붕괴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때 사회적 연대를 반드시 복원해야 하는 무엇으로,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원리로 보는 것이 과연 당연한 것일까. 오히려 사회와 사회(과)학, 그리고 사회적 연대는 19~20세기의 사회갈등을 봉합하는 과정에서 제안된 발명품이며, 그런 점에서 역사적인 구성물로 살펴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좀더 나아가면, 오늘날 ‘사회적인 것’의 위기와 복원이 회자된다는 것은 ‘불평등’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온 빈곤이라는 유령 때문은 아닐까. 『빈곤과 공화국 - 사회적 연대의 탄생』은 ‘사회적인 것’ 혹은 사회적 연대의 복원을 주장하기에 앞서 우리가 살펴봐야 할 지점을 조명한다는 점에서 한 번쯤 읽어봐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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