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Read & Think

모멸감

by parallax view 2014. 5. 5.

『모멸감』(김찬호, 문학과지성사, 2014)


  모두가 자신이 '을'이라고 생각하는 시대다. 하지만 우리는 누군가의 을이면서 또한 갑이기도 하다는 게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모멸감』은 위로를 위한 책이 아니라, 그런 진실을 환기하고 성찰하도록 해주는 책이다. 내가 책을 집어든 동기는 요즘 느끼는 '모멸감' 때문이다.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 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나의 이미지에 대한 자괴감 같은 것들. 이 모멸감을 사회학적인 언어로 이해하고 싶었다. 나는 그런 분석이 나를 지켜주는 부적이 되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마지막 장의 공자님 말씀(정말로 성현의 고전을 끌어온다)이 약간 김빠지긴 해도, 한편으로는 모멸감을 인식하고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결국 옛 말씀을 끄집어오는 수밖에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얼마 전 출간된 『감성사회』(글항아리, 2014)의 김왕배 선생님 글도 비슷하게 결론을 내린다. 가라타니 고진 식으로 말하자면 교환양식 A(호수제)로, 에티엔 발리바르 식으로 말하자면 '정치의 타율성의 타율성'인 시빌리테(civilite, 시민인륜)를 요청하는 제스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즉 개인도 없고 사회도 없는, 그래서 사회라고 할 만한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사회 이외의 다른 말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무능력(엄기호)을 극복하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안전한 관계(김찬호)"라는 것이다. 김찬호 선생님이 주의를 기울이는 바대로, 나는 '제대로 된 개인'이 되고자 하는 시도가 무척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직 속에서 '개인'을 내세우기가 어려운, 공동체는 없고 집단주의만 있는 한국에서는 개인이 된다는 것 자체가 제법 큰 용기를 요구하는 상황이다. 


====================================================================================================


  노동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견뎌야 하는 과로와 스트레스 그리고 굴욕감은 어디에서 보상받을 수 있을까. 현대사회에서 가장 유력한 것은 바로 소비시장이다. 개처럼 벌었지만, 정승처럼 쓰고 싶다. 돈 벌면서 받은 '천대'를, 돈 쓰면서 받는 '환대'로 덮어씌우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또한 만만치 않다. 최소한의 신체적인 안락을 위한 소비라면 어느 정도에서 만족할 수 있지만, 끊임없이 비교가 이루어지는 소비사회에서는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지출해야 하는 비용이 자꾸만 늘어나기 때문이다. 경제의 규모가 커지면서 소비 급수의 사다리가 점점 높아지고, 웬만큼 재산을 갖고 있거나 소비를 하지 않으면 위신을 인정받지 못한다. 최소한의 품위 유지비가 너무 높다(88쪽).


  한국의 근대화는 선진 산업사회를 재빨리 따라잡는 것을 목표로 긴박하게 추진되었다. 그러다 보니 합리적 개인화를 수반하지 못한 채 집단 에너지를 동원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공동체는 빠르게 해체되었지만, 대안적인 공동체나 자발적인 결사체의 형성은 지극히 미미했다. 결국 개인의 독립도 사회적 유대도 모두 엉성한 채 외형적인 경제 규모만 커졌다. 고도 성장기에는 상승 이동의 즐거움으로 그러한 부실함이 상쇄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저성장 단계로 접어들자, 사회의 약한 고리들에서 파열음이 나기 시작했다. 갈수록 증폭되는 갈등과 대립, 학교 현장에서의 왕따와 폭력, 가족의 해체, 우울증과 자살의 급증 등이 그것이다(142~143쪽).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안전한 관계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사람들, 억지로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는 공간이다. 내가 못난 모습을 드러낸다 해도 수치스럽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뒷담화를 하지 않으리라고 믿을 수 있는 신뢰의 공동체가 절실하다. 그를 위해서는 자신과 타인의 결점에 너그러우면서 서로를 온전한 인격체로 승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258쪽).


  실존주의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롤로 메이Rollo May는 조언한다. 자극과 반응 사이의 자동 회로를 차단해보라고. 거기에서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다고. 간단한 원리지만, 실행은 결코 쉽지 않다. 몸을 단련하듯 꾸준히 연습해서 조금씩 체득해야 하는 요령이다. 불교에서는 오랫동안 그 방법을 탐구해왔다. 어떤 감정이 일어날 때 거기에 매몰되지 말고, 감정 자체를 주시해보자. 내가 지금 이렇게 느끼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의 감정과 거리두기가 가능해진다. 어떤 사건이나 상대방의 언행이 나의 반응(행동)을 즉각적으로 불러일으키도록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그 상황에서 생겨나는 감정을 객관화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떻게 반응할지를 선택할 수 있다(286~287쪽). 





'Read & Think' 카테고리의 다른 글

코뮤니스트  (0) 2014.05.25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  (0) 2014.05.10
자신이 주인이라고 착각하는 노예들에게  (0) 2014.05.03
권력이란 무엇인가  (0) 2014.05.02
투명사회  (0) 2014.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