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뮤니스트』(로버트 서비스, 김남섭 옮김, 교양인, 2012)
로버트 서비스에게 공산주의는 역사의 추문(scandal)에 불과하다. 그가 짐짓 '객관적인' 듯 사료를 가져와 전개하는 논지를 요약하자면 그렇다. 지젝이 여러 번 주장하는 바대로, 그와 같은 태도는 '사고금지(Denkverbot)'를 요구하는 것이다.
현존하는 질서에 심각하게 도전하려는 정치적 기획에 최소한으로 참여하려고 하는 순간, 그 또는 그녀는 즉시 뒤따르는 대답을 듣는다. "비록 자비로울지라도, 이건(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정치적 기획) 필연적으로 새로운 강제수용소Gulag에서 끝나고 말 거야." 오늘 정치철학의 "윤리로의 회귀"는 부끄럽게도, 굴락과 홀로코스트의 공포를 진지하고 급진적인 참여를 포기하도록 협박하는 궁극적인 공갈 전술로 사용한다. 이런 식으로 순응주의적 자유주의 불한당들은 기존 질서를 옹호하면서 위선적인 만족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부패와 착취 등이 있음을 알고서도, 사태를 바꾸려는 모든 시도를 윤리적으로 위험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기각해 버린다. 전체주의라는 유령을 다시 불러내면서 말이다.
- 『레닌 재장전』 서문, 21쪽
바로 이 '순응주의적 자유주의 불한당'의 문헌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노동자 국가와 수용소 국가는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려 있어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공산주의 운동은 분명히 파산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의 난국은 반(反)자본주의적 대안은 속출하지만, 어느 전략도 자본주의의 총체성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한다는 데 있는 것은 아닐까?
참담한 실패에서 눈을 떼지 않되 포기하지 않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로버트 서비스는 공산주의자 혹은 사회주의자를 '책의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이런 지적을 비아냥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의 말대로 변화를 꿈꾸는 이들이 '책의 사람들'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사사키 아타루의 말대로 책을 읽고 쓰는 것은 그 자체로 혁명적인 일이니까. 물론 책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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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이 양보를 승인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 볼셰비키는 민족주의가 만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레닌과 스탈린은 고집을 부렸다. 두 사람은 소련의 여러 민족들에게 문화적 자기 표현의 자유를 어느 정도 허용하면 '대(大) 러시아 국수주의'의 의혹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책의 사람들'*이었고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자신들의 경전으로 대했다. 자신들이 말하는 언어로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교리를 효과적으로 공부하거나 배우지 못할 것이다. 벨라루스 농민들은 러시아어를 이해하지도 못하지만 일단 자신들의 모국어로 읽는 법을 배우면 레닌의 가르침을 주입받을 수 있을 것이다. 민족적 감성을 용인하는 것은 사회주의로 향하는 교두보가 될 것이다. (136쪽)
* 책의 사람들(people of the book) 이슬람교에서 무함마드가 나타나기 전에 신의 계시를 적은 경전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구체적으로는 기독교도와 유대인들을 말한다. 여기서는 《자본론》을 경전처럼 떠받든다는 비유적 표현으로 쓰였다. ― 역자 주
레비엔과 레비네는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자유군단 부대가 바이에른 북부의 밤베르크에 집결했다. 베를린의 독일 정부는 소비에트공화국의 종말을 모색했고 구스타프 노스케 국방장관은 스파르타쿠스단에 대한 과도한 군사적 행위를 이미 눈감아준 적이 있었다. 5월 독일 정규군이 뮌헨에 도착했을 때 평의회 지지자들의 손에 붙들려 있던 인질 10명의 학살 소식이 들려왔다. 야만적인 보복이 시작되었다. 공식적으로는 공산주의자와 동조자들 600명이 살해되었지만, 이것은 아마도 실제 숫자의 절반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레비엔은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레비네는 저항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자리를 지켰다. 재판을 받으면서 레비네는 선언했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모두 휴가 중인 죽은 사람들이다."* '만국의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공개 편지를 쓰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 톨러는 장기 투옥형을 모면했다. 정규군과 정치적 극우 무장 세력을 동시에 이용한 노스케의 전략은 매우 효과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바이에른소비에트공화국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설픈 모험이었다.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이 레비엔과 레비네가 어떤 식으로 행동했는지를 알게 되자 모스크바에서는 그들을 혁명영웅으로 기념할 열정도 사라졌다. (151~152쪽)
*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모두 휴가 중인 죽은 사람들이다 공산주의자들의 단호함과 결의를 잘 보여주는 이 유명한 말은, 1919년 스파르타쿠스단의 봉기가 실패하고 지도자들인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살해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이겐 레비네가 재판을 받으면서 법정에서 행한 다음과 같은 진술의 일부이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모두 휴가 중인 죽은 사람들이다. 나는 이를 충분히 깨닫고 있다. 나는 당신이 내 휴가를 연장할지, 아니면 내가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합류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나는 여하튼 냉정하고 침착하게 당신의 평결을 기다리고 있다." ― 역자 주
그람시는 볼셰비즘의 군사주의적 측면을 싫어했다. 《옥중수고》에서 그는 트로츠키의 노동 군대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지적했으며 '무기의 힘'에 대한 스탈린의 의존에 대해서도 유사한 판단에 도달했다. 또 외부 세계의 객관적 현실에 대한 조악한 믿음을 고수하는 것처럼 보인 부하린에 대해서도 유보적 태도를 취했다. 그람시는 공산주의자들이 공리적 명제에서 출발하기보다는 실제로 자신들의 사상을 시험해보기를 원했다. 그는 공산당의 '경직화'에서 문제점을 찾아냈다. 그람시가 자신이 소장한 도서 중에서 감옥에 넣어 달라고 한 책 중에는 지도자들이 추종자들로부터 단절되는 경향이 있음을 밝힌 로베르트 미헬스의 고전적 정당 연구서가 있었다.
병들고 방치된 그람시는 1937년 4월 살아날 가망이 없다는 진단이 내려진 다음에야 감옥에서 풀려났다. 그리고 불과 며칠 후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가 만일 건강한 몸으로 석방되었더라도 당시 볼셰비키 수칙에 갇혀 있던 코민테른이 그를 부드럽게 다루었을지는 의문이다. (그람시는 1936년 스탈린의 지노비예프 처형에 반대했다고 구금 중에 동지들에게 구타당했다.) 그람시는 덜 엄격하고 덜 편협한 마르크스주의를 탐색한 유일한 외국인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다. 1919년에 헝가리소비에트공화국의 공교육인민위원이었던 죄르지 루카치는 소련에서 피난처를 구했고 《역사와 계급의식》을 집필했다. 그는 그람시와 마찬가지로 노동 계급이 스스로를 해방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필요하다는 믿음을 간직했다. 1917년에 그러한 관념은 대부분의 볼셰비키 사이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그것이 이해될 수 있었다면 수용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루카치는 철학에서 대학원생 정도의 능력이 없는 사람이면 어느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헤겔적 용어로 표현했다. 여하튼 세월은 변했다. 혁명적 행동에서 당의 역할이 자명한 시기에 루카치의 책은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지노비예프가 루카치의 사상을 비난하자 루카치는 즉각 자신의 주장을 철회했다. 그는 공식 공산주의의 품을 떠나 살아갈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225~226쪽)
젊은 세대는 난해한 말로 루카치와 마르쿠제에 필적하는 출판물을 몇 권 내놓았다. 그 가운데 1960년에 런던에서 창간된 <뉴 레프트 리뷰>가 있었다. <뉴 레프트 리뷰> 편집자와 기고자들은 자기 시대에 맞는 마르크스주의를 열심히 탐구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소련이 내세운 공식 이데올로기는 그들을 매혹하지 못했다. 그들은 레닌과 트로츠키를 존경하면서도 마르쿠제나 사르트르 또는 콜레티나 알튀세르가 마르크스주의를 전반적으로 쇄신하는 데 기여한 바가 있는지 탐색했다. 논쟁의 본질은 여전히 소련의 과거와 현재가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는가였다. <뉴 레프트 리뷰>는 똑같은 질문을 제기한 서유럽의 많은 마르크스주의 기관지 중 하나에 불과했다. 소련은 개혁 가능한 노동자 국가였는가? 소련의 관료 계층은 지배 계급으로 변신했는가? 소련은 제국주의 국가였는가? 소련 역사상 레닌주의에서 근본적으로 '일탈'하는 현상은 언제 일어났는가? (583쪽)
1970년대 말부터 의견의 불일치는 장기간의 학문 전쟁으로 비화했다. 공격은 이른바 '수정주의' 경향 쪽에서 개시했다. 수정주의 경향의 저자들은 1917년 이후 수십 년 동안 소련 권력이 인민이라는 기반 위에 서 있었음을 강조했다. 일부는 공산주의 독재가 단지 노동자와 농민의 요구로 생겨났을 뿐이며 1930년대에 억압으로 죽은 사람은 수천 명에 불과하다고 역설했다. 대테러의 주요 책임이 스탈린에게 있다는 주장은 묵살되었다. 웨브 부부는 소련에서 배포한 공식 자료를 보고 스탈린의 책임을 부정한 한편, 무오류의 <프라우다>와 당 대회의 공식 기록에 근거해 새로운 설명을 펼쳤다. 소련과 미국을 비교해서 분석해 보려는 경향도 당대 공산주의 정치를 연구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모스크바와 베이징의 지도부가 관료적 기능과 마찰하고 점차 대두하는 이익 집단의 요구가 거세지면서 결국 통솔력에 제약을 받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각국 공산주의 지도자는 그저 자신이 이끄는 기관의 대변인이나 다름없다고 본 것이다. 수정주의자들은 전쟁 이후 사회과학에서 진행된 발전에 영향을 받았다. 그들 중 일부는 서방 정부의 국내외 정치에서 소외되었으며, 소수는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수정주의자들은 모두 소련을 관대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합의하여 발표된 수정주의 성명은 없었다. 아무도 그런 것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수정주의자들을 통일하는 유일한 문제 의식은 전체주의적 사고 전통을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과거와 현재의 공산주의에 관한 새로운 자료가 많이 발굴되었다. 그러나 발굴 과정에서 놓치고 넘어간 것이 있었다. 1960년대의 저자들(콘케스트와 파이프스뿐만 아니라 카와 도이처도 포함되었다)은 종종 극도의 야만성과 함께 휘두르는 거대한 중앙 권력이 소련의 특징이라는 데 동의했다. 수정주의자들은 분석적 상상에서 착오를 겪었다. 어떤 경우에 그런 착오는 도덕적 불감증에 가까웠다. (586~587쪽)
아마도 전후에 이탈리아 공산주의자들이 거둔 가장 큰 성과는 그들이 볼로냐에서 지방 정부를 장악했을 때 찾아왔던 것 같다. 에밀리아로마냐 중의 수도로서 볼로냐는 신입 당원을 끌어들이는 자석 역할을 했다. 시장 주세페 도차(Giuseppe Dozza)는 20년 동안 권력을 유지했다. 그의 통치는 정직함과 인민 복지에 대한 헌신으로 명성이 높았다. 볼로냐의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실용적인 정치가임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버스, 주택, 공원, 학교, 쓰레기 수거를 기독민주당 체제에서보다 더 효율적으로, 그리고 가능하다면 언제든 좀 더 싸게 일반인들에게 제공해야 했다. 톨리아티, 루이지 론고, 베를링구에르가 이끄는 공산당이 전국 수준에서 자본주의를 계속 비난했던 반면 도차는 도시의 사업가들과 협상을 했다. 도차가 가장 감당하기 힘들었던 것은 지역의 산업·상업적 활력이 쇠퇴하는 일이었다. 그가 자본가들과 맺은 협력은 그 후 이탈리아의 다른 대도시들에 공산주의자들이 종종 이탈리아사회당과 연립하여 어떻게 집권하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모델이 되었다. 로마, 토리노, 제노바, 나폴리에서는 여러 가지 상황에 지도급 직위에 공산주의 대표들이 포함된 지역 정부가 들어섰다. 일련의 모범적인 지방 자치 기록을 보면 공산당이 선거에서 승리하여 궁극적으로 중앙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길을 닦으리라는 희망이(나중에 헛된 기대였음이 밝혀졌지만) 있었다. (615~616쪽)
공산주의자들은 다당제 선거를 폐지하고 자신들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못하게 했다. 그들은 독립적인 언론 기관들을 짓밟았고 자신들의 중앙 당 기관지, 국영 라디오 방송국, 텔레비전 방송국을 공공 정보의 유일한 전달자로 만들었다. 그들은 적절한 법적 절차를 무시했다. 영향력 있는 반대 의견을 내는 정당들을 불법화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혜롭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권력 분립이 부르주아적 속임수라고 말해주었으며, 또 그들은 일체화된 국가 기관들이 좀 더 책임 있는 체제를 만드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르크스는 루소를 따라 이러한 사고방식을 발전시켰고 레닌은 마르크스의 생각을 열정적으로 자신의 사고방식에 접목했다. 이 사고방식은 이론과 실천에서 대재앙이었다. 공산주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에게 도달하는 정보의 진실성을 점검할 중요한 도구를 스스로 제거했다. 비공식적인 언론 네트워크가 없는 그들은 자유 토론에 접근할 길이 없었다. 헌법적·사법적 타당성의 부재는 행정적 권한의 남용을 예방할 여지를 미리 없애버렸다. 동유럽 공산주의는 소련의 길을 따를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다른 곳에서, 그러니까 중국과 쿠바에서 통치자들은 소련에 복종할 의무를 강요받지 않았다. 그들이 공통의 이데올로기를 고수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들도 소련식 모델을 채택했는데, 그러지 않을 경우 인민의 불만과 저항이 맹렬히 쏟아져 체제가 붕괴할 것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737쪽)
민족주의의 요소들은 통치자가 겪는 곤경을 완화하기는 했으나 결코 해결하지 못했고, 일부 개혁가들은 소련식 모델과 외국의 많은 변종들이 또 다른 종류의 개편을 요구한다고 믿었다. 이 경향은 개혁 공산주의로 알려졌다. 공산주의자들 자신이 특정 공산주의 국가가 취한 형태, 즉 그 정책이나 제도, 지도자 또는 사회 구조에 반대하기 시작한 이래 그들은 잘못된 것은 공산주의 자체가 아니라 국가가 그것을 시행하는 방식이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에 시달렸다. 이런 일은 10월혁명 후 곧 발생했다. 오, 레닌이 일찍 죽지만 않았더라면. 부하린이 좀 더 훌륭한 정치가여서 스탈린의 집권을 막았더라면. 러시아의 경제와 문화가 그렇게 후진적이지 않았고, 그렇게 많은 자본주의 강대국들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았더라면. 이와 같은 반응은 핵심을 놓친 것이다. 완벽한 사회는 그 사회를 건설하려면 완벽한 조건이 필요하다는 전제 위에서는 건설될 수가 없다. 공산주의는 그 성격상 선진 자본주의 세계에 도전을 감행한다. 자본주의자들은 필연적으로 도전에 응한다. 실제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자들이 그런 식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리하여 어느 지역의 어떤 공산주의 프로젝트도 국내외의 어려움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지탱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대규모 억압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와 같은 어려움은 궁극적으로 정치·사회·경제적 비상 상황을 낳을 것이다.
1956년 헝가리 공산주의는 개혁에 착수한 뒤, 소련 침공이 없었더라면 공산주의 질서를 일소했을 인민들의 반란에 압도당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은 경제적 탈집중화와 공개적인 정치적 논의를 도입했다. 두브체크는 전차가 수도로 밀고 들어왔을 때 이미 정치적 수단을 장악할 힘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이런 증거들이 시사하는 바는, 공산주의를 개혁하는 어떤 과정도 결국 공산주의를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변모시키는 운동으로 전화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브레즈네프는 이 점을 이해했고 개혁에 등을 돌렸다. 그리고 그의 전임자 흐루쇼프는 개혁가였으면서도 소련의 정치·경제적 건물의 하중을 떠받치는 벽은 절대 건드리지 않았다. 어떤 한계가 존재했고, 공산주의 지도부가 스스로 완전히 다른 종류의 국가로 대체되기를 피하고 싶다면 그 한계를 밟고 넘어서는 일은 위험한 것이었다. (739~7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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