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사회』(한병철,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
한병철의 글에 어른거리는 하이데거의 유령을 쫓아내야 할 것이다. 사실 쫓아낸다는 말은 적합하지 않다(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부정하고 넘어서려 시도해야 한다는 말이 보다 맞을 것이다. 소셜미디어가 민주주의를 만들어내기는커녕 투명성의 독재를 이뤄낸다는 통찰은 일견 적절하다. 투명성의 독재는 감사(audit)의 제국과 쌍을 이룬다. 대학의 360도 다면평가, 국정감사, 더욱 투명한 감사, 감시, 통제….
하지만 기술을 향한 적대적 태도로는 불충분하다. 게다가 한병철은 벤야민을 인용하면서 벤야민이 제의가치와 아우라의 붕괴를 서술할 때의 독특한 자세를 애써 무시하는 듯하다.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즉 사진과 영화의 등장이 아우라의 붕괴, 대중의 부상과 맞물려 들어가는 사건이되, 이들이 예술을 체험하고 창안하고 재생산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기도 했다는 점을 긍정한다.
파시즘은 "세상은 무너져도 예술은 살리라"고 말하면서 기술에 의해 변화된 지각의 예술적 만족을, 마리네티가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전쟁에서 기대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 예술지상주의의 마지막 완성이다. 일찍이 호메로스의 시대에 올림포스 신들의 구경거리였던 인류가 이제 그 스스로 구경의 대상이 되었다. 인류의 자기소외는 인류 스스로의 파괴를 최고의 미적 쾌락으로 체험하도록 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이것이 파시즘이 행하는 정치의 심미화의 상황이다. 공산주의는 예술의 정치화로써 파시즘에 맞서고 있다. -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제3판, 150쪽
어떤 점에서는 한병철이 옳다. 대중매체를 통해 집단을 구성하던 '근대적 대중'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단속적이고 산발적으로 무리를 구성하는 '탈근대적 개인'은 다를 것이다. 하지만 벤야민은 좋았던 옛 시절, 인간이 대지에서 분리되지 않았고 공동체 문화가 살아 숨쉬던 과거로 돌아가려는 유혹에 굴복하지 않았다. 한병철의 글에서 하이데거의 유령을 본다는 것은, 그런 과거에의 향수, 엘리트의 심미안을 느낀다는 의미에서이다. 한병철의 글은 종종 우울하고 비관적이다. 이와 반대로, 벤야민은 늘 우울하지만 항상 낙관적이다. 한병철과 벤야민 혹은 하이데거와 벤야민 사이의 미세한 차이, 그 '좁은 문'이야말로 결정적이다. (14.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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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감시사회는 특수한 파놉티콘적 구조를 나타낸다. 벤담의 파놉티콘은 서로 분리되고 고립된 방들로 이루어져 있다. 수감자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은 불가능하다. 격벽에 막혀서 그들은 서로를 볼 수도 없다. 교화를 위해 그들은 고립 상태에 던져진다. 반면 디지털 파놉티콘의 주민들은 서로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열심히 소통한다. 공간적 고립과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이 아니라 네트워크화와 과다 커뮤니케이션이 전면적 통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 한병철, 『투명사회』, 211~212쪽
벤야민은 한편으로 사진에서 제의가치가 완전히 추방당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제의가치도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으며 최후의 요새에 들어가서 저항한다고 말하고 있다. 최후의 요새는 "인간의 얼굴"이다. 그래서 초기 사진에서 초상이 중심에 놓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 페이스북과 포토샵의 시대에 "인간의 얼굴"은 전시가치밖에 모르는 페이스face로 바뀌어버린다. 페이스는 "시선의 아우라"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전시된 얼굴, 상품 형태를 취한 "인간의 얼굴"이다. - 한병철, 『투명사회』, 29~30쪽사회』, 29~30쪽 (14.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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