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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Voice

폭력으로서의 사랑, 사랑으로서의 혁명

by parallax view 2014. 5. 2.

"과거의 연애가 현재의 연애를 담보해주지는 않는다. 문득 연애는 매번 주사위 놀이 같은 것이라고 한 말이 다시 떠올랐다. 그/녀가 얼마나 과거에 헌신적이었든 상관없이, 누구를 만나 어떻게 연애할지는 전적으로 운에 달렸다(즉, 누군가 연애를 못하는 건 그/녀가 매력이 없다거나 돈이 없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거다. 연애는 늘 외부로부터 온다. 우리는 너무 자신에게 몰입하는 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연애는 언제나 벼락 같은 것, 순수한 의미의 폭력, 외상(trauma)이라고 해야겠다. 다만 연애를 마무리하는 방식은 종종 자기 삶의 방식에 따른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가 했던 연애의 성격은 바로 우리가 이별하는 습관에서 드러날 것이다. 죽은 자의 유령이 산 자의 어깨를 내리누른다는 말을 바꾸면, (시간 속에서 이미 죽은) 나의 습관이 (지금 살아 있는) 나의 어깨를 내리누른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마나한 소리겠지만, 결국 있는 힘껏 만나는 수밖에 없다."


작년 이맘때쯤 이런 글을 썼다. 사랑은 호르몬의 착각이라는 식의 속류유물론적 설명이 범람하는 냉소적인 세상에, 이런 식의 글이란 바이트 낭비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차라리 동진샘의 "사랑과 혁명이 살아야 할 유일한 이유라는 것이고, 사랑과 혁명은 서로 호환할 수 있는 동일한 것이라는 것이다. 우울하게 나는 당분간 혁명이라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이는 시대에 더 참담한 것은 혁명이 요원하거나 불가능해 보인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혁명의 불가능성을 견딜 수 있도록 하는 바로 그것, 사랑이 빈사(瀕死) 상태에 있다면 그야말로 더 슬프다는 것이다"는 글에서 위안을 얻는다.


사랑은 폭력이다. 지젝이 종종 정신나간 사람처럼 떠들어대듯이, 간디가 히틀러보다 더욱 폭력적이라고 할 때의 폭력,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인식의 체계를 비집고 들어오는 실재(real)로서의 폭력이 바로 사랑이라고 믿고 싶다.


"사랑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랑은 그리고 그, 그녀와 나의 관계를 필연적인 것으로 기꺼이 승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전연 다른 존재를 형성하고 새로운 삶의 질서를 창립하는 행위이다. (...) 내게 불신의 시대란 생각보다 명료하다. 그것은 진정으로 믿어야 할 것을 믿지 않는 시대란 뜻이다. 믿어야 할 것의 두 후보로서 혁명과 사랑을 제외하면 무엇이 더 있을까. 그러므로 나는 사랑을 믿어야 할 이유에 대해, 우리가 자신을 급진화할 수 있는 윤리적인 행위가 믿음이라면 바로 사랑은 어떻게 믿음과 상관되는지에 대해, 말하고자 했던 듯하다." (서동진)


http://www.homopop.org/log/index.php?pl=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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