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비 인문플랫폼 서비스가 아쉽게도 종료된다고 한다. 몇 자 쓰지도 않았지만, 끼적여 놓은 생각의 파편들을 옮겨놓는다.
2012년 1월 18일의 메모 (2012.01.18 오전 01:58)
소련군의 종심전투이론에 대한 포스팅을 읽다가, 종심전투이론의 "지각의 병참학"을 떠올린다(『전쟁과 영화』). 전차와 야포, 항공기와 공수부대 사이의 제병합동전술이라는 개념 수준에 머물러서는 "전격전"에 대한 오해에 그칠 뿐이다. 핵심은 전술과 기계의 앙상블이 생산하는 심리적인 효과이며, 그 효과를 전선의 연속적인 확장으로 기호화-물질화하는 것이다.
"전술과 기계의 앙상블"에 대한 노트 (2012.01.21 오전 04:04)
1. 앞서 "전차와 야포, 항공기와 공수부대 사이의 제병합동전술이라는 개념 수준에 머물러서는 "전격전"에 대한 오해에 그칠 뿐"이라고 썼을 때, 나는 저 유명한 전격전Blitzkrieg이란 단어가 어떻게 한 혁신적인 발상을 은폐해 왔을지 상상해 보았다. 그런 점에서 "핵심은 전술과 기계의 앙상블이 생산하는 심리적인 효과이며, 그 효과를 전선의 연속적인 확장으로 기호화-물질화하는 것"이라는 표현도 문제가 있다. 이 표현은 사실 전격전에 대한 하나의 오해―인체의 신경을 타격하듯이 대항군의 지휘계통을 마비시키는 전술―를 반복하는 것으로 들릴 수 있다.
2. 전격전에 대한 오해에 대해서는 이 포스팅을 참조. http://www.blog.periskop.info/16
3. 소련군 종심전투이론 혹은 종심작전교리의 핵심은 미래전에 대한 전망에 있다고 해야겠다. 기계와 인간의 앙상블. 적군Red Army은 1차 대전의 참호보다 반혁명과의 투쟁에서 장갑열차와 함께 싸운 기억을 더 강하게 간직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회전(大回戰)의 승리가 선사하는 나폴레옹적인 열정은 러시아의 동토(凍土) 위에서 차게 식어버린다. 단 한 순간의 결정적인 승리가 가능하지 않으리라는 전망 속에서 탄생한 종심작전교리는, 그것이 러시아적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전"이 아니라 "미래전"을 지향했다. 즉, 전차와 야포, 항공기와 공수부대는 공장과 철도, 카메라와 전기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기술적 개체들은 앙상블과 더불어 발생한다). 소련군이 이 교리를 생산하고 숱한 시행착오를 겪은 데에는 물론 혁명(2차 대전 때에는 스탈린주의적인 "어머니 조국")의 방위라는 지극히 실용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잡다한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종종 반박하면서 서로 잡아먹을 듯이 논쟁했을 적군 장교단은 숙청당하기 전까지 자신들 역시 하나의 전위avant-garde, 공산주의 세계를 준비하는 "새로운 인간"이라는 상상에 사로잡히지는 않았을까? 나는 "이론가" 투하체프스키가 카메라를 든 베르토프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망상에 끌린다.
4. 이런 미래파적인 상상을 소련에만 적용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냉전기 미국은 소련의 거울상이었고, 과학과 계몽의 힘을 신봉한 사람들이 세운 나라였기에 "미래"에 대한 상상을 소련과 더욱 잘 공유할 수 있지 않았을까(물론 최후의 승리자는 언제나 미국이었겠지만)? 미국인만큼 우주로 날아간 라이카와 유리 가가린을 질투한 사람들도 없었을 것이다.
5. 기계화된 전쟁에 대한 통속적인 접근, 그 인간학적 개탄―우리는 톱니 위에서 나사를 조이는 찰리 채플린이다!―과 거리를 두었을 때에야 기계와 인간 사이의 연결망이 전쟁을 경유해 구축되어 왔다는 것을 명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커뮤니케이션과 통제의 원리로 창발된 아이디어들의 집합인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가 전쟁 속에서 태어났다는 것―컴퓨터도, 인터넷도!―을 상기해야 한다. 독일군의 항공기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공포의 실제 성능은 영국 군부의 요구에 미치지 못했다고 하지만, 대공포가 작동하는 원리는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 더욱 활성화되었다. 처음으로 "사이버네틱스"라는 명칭을 사용한 수학자 노버트 위너는 이 원리로 인간, 동물, 기계 더 나아가 사회까지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인간의 인간적 활용』). 그는 사이버네틱스라는 사고방식이 전쟁에 활용되는 것을 불편하게 여겼지만("C4I"), 이는 태생에 대한 자기 망각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다.
6. 이 지점에서 "전술과 기계의 앙상블"이라는 표현이 갖는 의미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전술은 인간이 기계에 개입하는 방식이며, 기계는 전술의 조건이자 수단이다. 기술의 매개자로서 인간의 위상을 다시 자리매김하려고 했던 시몽동은 적어도 그의 박사학위 부논문에서 전쟁 기계들에 대해 침묵하는 것 같다(『기술적 대상들의 존재 양식에 대하여』).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가 분석한 모터와 진공관들 역시 전쟁 기계에 들어가는 개체들이라는 점이며, 전쟁 기계가 구성하고 있는 앙상블 만큼이나 다양한 앙상블을 조건짓고 형성한다는 것이다(자동차와 고속도로, 신호등과 횡단보도, 도로교통수칙과 운전면허증, 교통사고와 의료보험…). 시몽동은 로봇이라는 종(種)을 향한 사이버네틱 판타지를 반성하고, 유기체와 기계의 유사성을 동일성으로 간주하지 않고서 개입의 여지를 찾아내려고 한다.
7. 여기서 전술이라는 군사(학)적 용어를 사용하는 것과 전쟁사의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전쟁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게 아님을 강조하고 싶다. 사실 이 잡다한 생각들은 한 가지 의문에서 출발한 것이다. 푸코가 "전략"과 "전술"을 이야기할 때, 그리고 들뢰즈가 "전쟁 기계"를 이야기할 때 이 둘은 공히 클라우제비츠를 끌어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푸코가 클라우제비츠의 명제를 뒤집어 "정치는 다른 수단으로 수행되는 전쟁"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전쟁을 베버식으로 말해서 "가능성의 기예"라고 한다면, 『손자』와 『전쟁론』을 달달 외운들 백면서생이 전략가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전쟁을 수행하는 테크닉, 즉 실천으로서의 전략과 전술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생산되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전쟁론』을 읽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테크닉으로서의 전술. 테크닉의 구현으로서의 기계.
2012년 2월 1일의 메모 (2012.02.01 오후 08:59)
"기술과 문화를 연결한다는 거창한 것은 욕망이고 실제로 그 둘은 이미 잘 구별이 안되는 것. 이상한 거대한 욕심은 종종 자신없는 이들이 갖는 것인데 무슨 방패나 부적이랄까... 빨리 없앨수록 현실을 제대로 보게 되지." 맞는 말씀이옵니다ㄷㄷㄷ
사이버네틱스와 "계획경제" (2012.02.08 오전 01:52)
언젠가 사이버네틱스를 "기술적으로 구체화된 자유주의"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인상은 사실 노버트 위너의 『인간의 인간적 활용』(텍스트, 2011)에서 받았던 것이다. 그의 『사이버네틱스』가 일찍 번역되어 나오면 좋겠지만, 여튼 기술적으로 구체화된 자유주의로서 사이버네틱스를 위치짓고자 하는 경향은 위너보다 피에르 레비에게서 더 강한 것 같다.
레비는 『집단지성』(문학과지성사, 2002)에서 사이버 공간을 "일반화된 자유주의"가 구현가능한 공간으로 설정한다. 분명 들뢰즈에게서 가져왔을, 다중의 역능puissance이 자유롭게 발산하는 유목적 공간으로서의 사이버 공간. 과연 급진적 개념들의 자유주의적 변형은 자율주의자들이 받는 비판―비물질노동이나 "일반지성" 같은 개념이 자본주의에 어떤 타격도 주지 못한다는―과 비슷하게, 유목(주의)이나 역능 같은 들뢰즈의 개념들이 걷게 될 필연적인 경로인 것일까(나는 그저 막연하게 "아니오"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한편, 레비는 사이버 공간의 집단지성의 반대편 극한에 "전체주의"가 있고 "계획경제"가 있다고 상정한다. 마찬가지로 역능의 극한에 있는 권력, 그에 따르면 분자적 역능에 반대되는 몰적 권력에 따르는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집단지성의 내재성에 반대되는) 초월성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붕괴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관해 조금이라도 반성할 수 있는 여지가 우리에게 있었는지를 상기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가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 비해 전체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이었기 때문에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가치평가를 사실명제로 치환하고 있다. 계획경제라는 시스템을 반성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아무도 계획경제를 말하지 않는다. 계획경제는 국제볼셰비키그룹 같은 집단에서나 주문처럼 욀 뿐이다(그만큼 공허하다). 계획경제에 대한 성찰의 빈자리에 들어선 것이 바로 카지노이고 증권거래소가 아닌가("민주주의를 불렀더니, 채권시장이 왔다." 폴란드의 낙서).
여기서 아옌데의 칠레 사회주의 정부에서 사이버네틱스 모델을 도입했던 사례를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몇 년 간 Eden Medina라는 연구자가 칠레의 사이버네틱스 실험을 연구하고 있는데(논문도 나왔고, 책도 출간되었다),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다. 몇 년 전 가디언에서도 관련 기사가 나왔는데, 그 프로젝트의 이름은 Project Cybersyn이었다. 가디언 기자는 "사회주의 인터넷"이라고 부르고, Medina는 "사이버네틱 사회주의"라고 부른다.
가디언 기사 : http://www.guardian.co.uk/technology/2003/sep/08/sciencenews.chile
Eden Medina 저작물 링크 : http://informatics.indiana.edu/edenm/publications/publications.html
Eden Medina 강연 동영상 : http://cyber.law.harvard.edu/interactive/events/2009/02/medina
영국의 사이버네틱스 연구자인 스태포드 비어는 칠레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여 사이버신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영문 위키에도 사이버신 프로젝트에 관한 짧은 아티클이 올라와 있다. 여담으로 사이버네틱스 모델은 사회주의 경제 시스템의 전형으로 해석되기도 했는데, 정확하게는 복지국가 모델에 대한 설명이었으며 그런 설명을 도입한 사람은 앤서니 기든스로 기억한다(『좌파와 우파를 넘어서』, 한울, 1997).
내 추정이지만 사이버네틱스가 앤서니 기든스의 생각 만큼 경직된 개념이었을 것 같지는 않다. 사이버네틱스는 정보의 완전한 보존을 지향하는 시스템 이론이기 때문에 그만큼 탄력적일 가능성이 높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이버네틱스는 제어이론, 정보이론, 소통이론 등 여러 이론들의 다발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사이버신 프로젝트는 레비의 자유주의적 전제와 정반대에 선 것처럼 보인다. 물론 레비에게 아옌데 정부의 실험은 계획경제의 실패를 보여주는 전형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지도 모른다(가디언 기사에 따르면 아옌데 정부는 소련식 계획경제 모델을 피하기 위해 사이버네틱스 모델을 도입했다지만). 사실 사이버신 프로젝트도 피노체트 쿠데타가 발생하는 바람에 미완의 기획에 그치고 만 것이다. 때문에 그 성패 여부는 역사의 블랙박스 속에 들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사이버신 프로젝트를 살펴보았을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사이버네틱스라는 아이디어를 사회주의에 접속시키고자 했던 그 상상력이 아닐까 싶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그 접합을 이상화하지 않으면서 섬세하게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사이버신 프로젝트는 구좌파가 보았을 때 사회민주주의 정부에 불과한 아옌데 정부로 하여금 더욱 우경화를 부추길 장치에 불과했을까? 사이버신 프로젝트가 시카고 학파의 신자유주의 실험 이전에 이미 신자유주의적인 사고방식을 습득할 수 있게 했다고 유추해볼 수 있을까?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저 내 억측일 뿐이다-_-;;
2012년 2월 11일의 메모 (2012.02.11 오후 10:48)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보면서, 셜록은 수트가 참 잘 어울리는 캐릭터를 잡았고, 왓슨은 키에 참 잘 어울리는 캐릭터를 잡았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왓슨 만큼 호빗이 잘 어울리는 배우도 없을 게야-_-...
2012년 2월 21일의 메모 (2012.02.21 오후 10:17)
내일부터 푸코 심포지엄♡
푸코 심포지엄과 그 불만? (2012.02.25 오전 03:04)
푸코 심포지엄 때 아쉬웠던 게 있다면, 내가 정말 묻고 싶었던 것은 묻지 못하고 급작스레 떠오른 질문들만을 성급하게 내질렀다는 데 있다. 현금은 다 떨어졌는데 엉뚱한 영화 보는데 마일리지를 써 버리는 바람에 정작 보고 싶은 영화는 못 보는 기분? -_-?
한편 시간 내에 일정을 마쳐야 하고, 가능한 골고루 질문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진태원 샘의 압박감은 알 것 같지만(진행은 역시 어려워-_-...), 불필요하다 싶은 질문은 커트하고 간략한 질문을 요구하는 상황은 "제대로 된 질문"을 요구하는 것 같아 답답하기도. 물론 누구도 악의는 없다. 다만 피로가 있을 뿐. 어쩌면 학문을 하는 분들이기에 성급하고 헐거운 질문들에 대해 오래된 피로감을 드러냈던 것은 아닌가 싶은데, 그저 나의 과민반응이길.
피로감이 짙게 느껴졌다는 점에서는 그린비 식구들도 매한가지. 강의가 시작될 때마다 매대에 서서 청중을 맞아야 하는 분들에게서나, 마이크를 나눠 주고 세팅하는 분들에게서나 예민함이 느껴졌다. 출판사의 규모에 비하면 아주 거대한(?) 행사였던 만큼, 준비 과정은 물론이고 진행 과정에 있어서도 피곤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거다. 부서, 역할 막론하고 모두 투입되었을 테니까 말이지-_-;;;
언제나 그렇듯 두서없는(…) 말은 이쯤 해 두고, 개인적으로 이번 심포지엄에서 재밌는 강의는 임동근 선생님의 장치 강의와 서동진 선생님의 푸코와 마르크스(…) 강의. 장치는 시몽동이라던가 사이버네틱스라던가 행위자 연결망 이론이라던가 등등에서 요즘 나의 관심사인데, 동진 샘 말마따나 장치라는 개념이 근사하긴 하지만 뭔가 더 필요하다는 느낌이 있다. 장치 개념은 현실을 담론적 장치와 비담론적 장치의 조합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 신선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So What?"이라는 느낌? 이건 『인간 사물 동맹』에서 라투르나 미셸 칼롱, 존 로 등의 글을 읽을 때도 반복되는데, 아직은 내가 잘 모르니까(…), 라며 판단 유보 중이긴 하다;;
그리고 동진 샘은 이제 푸코와 마르크스에 대한 연구가 어느 정도 정리되어 가는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이상한 질문 던졌다고 핀잔 먹긴 했지만-_-a 그러거나 말거나, "경제"와 "정치경제학"이라는 쟁점을 사이에 두고 푸코의 분석이 갖고 있는 한계를 지적함으로써 분석의 축을 통치성에서 이데올로기로 이동하려는 것은 아닌가 라고 거칠게 생각해 본다(거칠게 내뱉었다고 또 뭐라 해도 뭐...-_-a;;).
허경 선생님 강의는 한 번 들어보고 싶었는데, 둘째 날엔 몸이 평소 때처럼 게을러져서 둘째 날엔 심재원 선생님 강의부터 들었...-_-;; 그래도 모 구좌파(…) 청년에게 열정적으로 자기 주장을 설명하시던 모습이 꽤 인상적으로 남았다. 강의 원고를 읽어보니 강의 땐 정작 다 읽진 못했겠구나 싶었...
여튼 푸코에 대해 계속 궁금해지는 강의들이었다. 한편 푸코를 정말 많이 활용하는 곳들, 페미니즘과 섹슈얼리티 연구, 문화인류학의 연구들이 거의 드러나지 못했다는 게 아쉽다. 이쪽이야말로 대중 강연이 절실히 요구되는 데 말이다. 발표하신 연구자 분들이 "너무나 남성 연구자들"이라는 것도 신경쓰이고. "푸코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있어 둘째 가라면 서러운 분야들을 빼놓은 것은 아니었을까. 이후 강연을 구성하는 데 있어 꼭 참고해주었으면 좋겠다.
역시나 두서없이(…) 주절댔는데, 좀 피곤하긴 했지만 흥미로운 시간들이었다는 말로 급 마무리를...-_-/
돌아오지 않는 질문들 (2012.03.05 오전 02:16)
사이버네틱스를 "기술적으로 구체화된 자유주의"라고 단언하는 것은 경솔한 일이다. 비록 노버트 위너와 피에르 레비 모두 자유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지만, 그것만으로 사이버네틱스와 인터넷을 "이념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다만 몇 가지 의문은 남는다. "통치"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사이버네틱스는 어떤 효과를 생산하고 있을까? 우리가 과학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관점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사이버네틱스를 "통치성"이라는 이론적 기획을 통해 이해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우리는 칠레 아옌데 정부의 사이버신 프로젝트―이른바 "사회주의 사이버네틱스"―를 "사회주의 통치성"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이해할 수 있을까? 사이버신 프로젝트를 "사회주의"에 적합한 통치성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2012년 3월 23일의 메모 (2012.03.23 오후 08:28)
<건축학개론>을 보고 떠오른 단상이 있었는데, 너무 오래되어서 잊어버렸다.
2012년 4월 6일의 메모 (2012.04.06 오전 01:24)
<건축학개론>의 "건축학개론"은 도시인류학이나 도시인문학 특강이라고 부르는 게 옳을 듯하다. 건축은 그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들, 그리고 같이 살아간다고 상상하지도 못한 존재들과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이며, 그 틈새라고 해야 할 것이다. <건축학개론> 속 "건축학개론"은 바로 그 틈새에 대한 강의다. 학부 때 그런 강의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2012년 4월 12일의 메모 (2012.04.12 오전 02:36)
이번 선거를 보면서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히고 있다. 급진적인 구호는 환영받기 어렵고, 급진적인 세력이 국가를 장악했을 때 "국민"의 저항은 상상 이상일 거라고. 그런 상황에서 의회 민주주의는 무엇인지, 우리에게 정치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2012년 5월 7일의 메모 (2012.05.07 오전 01:24)
총파업도 51+도 모두 재밌게 참여했다. 한편으로는 그 주위를 둘러싼 어떤 긴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마르크스가 그 사이에서 진동했다는 두 가지 경향―프루동적 경향과 라살레적 경향, 즉 아나코-생디칼리스트와 국가 사회주의―의 갈등을 포함한다. 내가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걸까? 흥에 겨워 놀면서도 머릿속 한켠에서는 망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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