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웅의 <변호인, 노무현>. 진영논리에 의존해 적을 죽이고 나를 살리는 방식은 결국 나를 죽이고 적을 살리는 방식에 불과하다는 것(보다 정확하게는 '우리'라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을 모두 죽인다는 것). 허지웅은 여전히 진영논리를 넘어선 '상식'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적 좌파라 할 수 있겠다. 나는 그게 그의 강점이자 맹점이라고 생각한다.
사태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려는 의지는 늘 그의 글을 날카롭게 벼린다. 하지만 정치란 당파와 입장, 열정이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이를 칼 슈미트의 말을 빌려 '정치적인 것'으로서의 '적대'라고 바꿔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허지웅의 글은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정치, 혹은 노무현 지지자나 민주당 지지자보다 더욱 더 리버럴한 정치를 추구한다고 할 수 있다. 허지웅을 비판할 수 있는 지점은 바로 여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입장이 너무나 옳은 것처럼 보이는 건 그만큼 스스로를 '진보'라고 믿는 이들이 자신의 입장을 절대적인 물신(fetish)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무현에 대한 향수는 실제로 집권 기간 동안 노무현 정부가 무엇을 했고, 어떤 오류가 있었으며, 이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묻지 못하는 맹목으로 바뀌어버리고 만다. 이게 '산업화'와 '민주화'로 찬반을 가려버리는 일베와 무엇이 다르냐는 허지웅의 질문은 이런 이분법이 상존하는 한 정당하다. 일베의 지독한 반(反)노무현 정서는 결국 까와 빠의 논리를 정확하게 상속받은 것에 불과하다. 여러 사람이 지적하듯이 일베는 결국 '민주화'의 아이인 것이다. (14.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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