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본 영화 이야기. 왕가위의 <일대종사>는 엽위신의 <엽문>과 비교될 수밖에 없는 영화지만, <엽문>이 표현하지 못하는 지점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더 높이 평가받을 만한 영화다. 무상하게 흩어지는 인생을 수 천 년 무술 역사 속에서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무술에 빗대는 관조가 그렇다.
<일대종사>는 실존 인물 엽문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는 영화다. <엽문>이 관록 있는 배우(견자단)와 정교한 무술연출을 통해 실존 인물의 재현을 최대한도로 끌어올리려 했던 점을 생각하면 <일대종사>는 늦어도 너무 늦은 작품으로 보인다. 하지만 무술영화의 재현이 얼마나 '사실적'인지를 두고 영화의 장르적 완성도를 가늠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영화는 단절과 도약의 기술이기에, 무술의 재현은 편집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일대종사>와 <엽문>에서의 무술 합만으로 영화를 재단하는 것은 영화를 보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두 영화 모두 실존 인물을 영화적 허구로 다룬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엽문이 항일투쟁에 가담했는지는 불분명하고 홍콩으로 피신한 것은 일제가 아니라 공산당 때문이었다(<엽문>). 당연하게도 궁이(장쯔이)와 궁씨 집안은 허구이며 궁가 64수도 실존하지 않는 무술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일대종사>).
두 영화의 차이는 무술 합의 정교함보다 각각 동원하는 서사적 장치에 있다. <엽문>이 1940년대의 엽문을 항일투사로 재구성했다면, <일대종사>는 1940년대를 공백으로 남겨둔 뒤 그 자리에 궁이의 플래시백(궁이의 복수)을 배치했다. <엽문>이 현대 중국의 민족주의에 호소했다면, <일대종사>는 생략과 회상을 통해 이제는 중국의 일부가 된 홍콩의 탄생과 소멸(피난처이자 영국 치하의 '자유'와 허무의 공간의 소멸)을 상기시킨다.
각각의 전략은 각 영화의 관객을 정확하게 겨냥한다. <엽문>이 이제는 중국인이 된 홍콩인이 중국인에게 보내는 화해(그리고 낯부끄러운 아부를 곁들인)의 제스처라면, <일대종사>는 홍콩인이 홍콩인에게 보내는, 홍콩을 위한 애도사라고 할 수 있다. <일대종사>가 무술인들의 기념사진을 거듭 프레임에 담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하겠다. 시간은 덧없는 것이고 무술도 기억과 마찬가지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바랜다. 빛바랜 사진만이 무술인이 모였고 잠시나마 이 땅에 숨을 붙였음을 보여줄 뿐이다. 궁이의 말대로 "어떤 기술도 하늘보다 높을 수는 없고, 어떤 재능도 땅보다 깊을 수는 없다."
때문에 무술인은 제자를 통해 무술을 잇는다. 무술의 세 가지 단계, 나를 알고, 천지(세상)를 알고, 중생을 안다는 것은 무술이란 생명처럼 자기를 돌보고 타자와 교류하고 후대를 남긴다는 것을 뜻한다. <일대종사>가 <엽문>과 갈라지는 결정적인 지점은 궁이가 세 번째 단계에서 멈춰섰다는 데 있다. 여기서 궁이는 당대에 존재하기 어려울 가상이며 안티고네를 연상시키는 인물이다. 안티고네가 가족과 국가의 대립을 신의 법과 인간의 법의 대립으로 전치시켰듯이, 궁이는 사적인 복수를 무술인(강호)의 정의로 전치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원로들이 복수는 무의미할 뿐더러 결혼을 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비의 유언이라고 만류할 때, 궁이는 자신의 '올바름'을 굽히지 않는다. 수하인 복성이 더 이상 복수가 예전처럼 명예로운 일이 아니라고 조언할 때도(동북지방은 일제 치하였다. 대사로 미루어보건대 사적 복수는 사형에 준하는 처벌에 해당했을 것이다) 궁이는 물러서지 않는다.
여기서 <엽문>이 '매국노'에 대한 비난을 거두지 않는 것과 달리, <일대종사>는 배신자가 매국노냐 아니냐를 비중있게 다루지 않는다. 사형인 마삼은 일제에 붙어 협회를 창단했고 그 점이 스승(궁사부)과의 거리를 넓히긴 했지만, 궁이를 자극한 것은 마삼이 매국노라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가 아버지의 유산(아버지의 유언이자 64수의 비결)을 강탈해갔다는 사실에 있다.
그런 점에서 궁이는 '신여성'의 전형이 아니라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강호의 정의'의 마지막 화신이다. 궁이는 아무리 출중한 무술이라도 명예와 체면을 잃은 채 부끄러운 이름을 남기느니 차라리 깨끗하게 사라지는 쪽을 선택하는 완고함의 표본이다. 여자의 몸이기에 제자를 둘 수 없고, 복수를 위해 결혼을 포기했으니 아이도 가질 수 없다. 오래된 대의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보수'의 초상은 궁이를 통해 드러난다. 강호의 정의, 그를 다시 이르자면 무술인의 윤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궁이는 윤리 앞에서 결단하고 그 결과를 감당하는 인물의 전형이다.
하지만 결국 <일대종사>는 사랑에 대한 영화다. 사랑의 기억은 덧없지만 그것이 없다면 삶을 지탱할 수 없는 것이다. 영화가 궁이에게 엽문(양조위)과 비등하거나 오히려 더 많은 비중을 할애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그녀가 <일대종사>의 핵심을 관통하는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궁이와 엽문이 서로에게 품은 연정은 일합의 대결로 표현된 것만큼이나 무술의 성쇄와 함께 한다. 엽문이 언제까지라도 궁가 64수를 배울 날을 기다리겠다고 궁이에게 말하자, 그녀는 자기는 이제 64수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한다. 왕가위의 <동사서독>에는 서사적 장치로서 '취생몽사'라는 술이 나온다(영어 자막은 'happy-go-round'라고 나온다. 적절한 작명이다). 마시면 슬픈 기억을 모두 잊다는 술이다. 하지만 그 술은 농담에 불과하다. 영화 속 인물들은 취생몽사를 마시고 기억을 점점 잊어가지만, 사실은 잊은 것이 아니라 잊은 척할 뿐이다. 궁이가 엽문에게 무술을 잊었다고 말하는 것도 비슷한 변명일 것이다.
마삼과의 대결로 입은 내상을 아편으로 달래며 죽어가는 궁이는 64수를 펼치는 꿈을 꾼다.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잊을 수 없는 것이다. 궁이와 엽문의 엇갈린 운명은 왕가위 영화의 전형성을 반복한다. 고백은 이루어질 수 없기에 애틋하다. 엽문이 궁가 64수를 배우기에 '너무 늦은' 것처럼, 궁이가 엽문에게 한 "당신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고백도 너무 늦은 것이다. 그리고 그걸 미처 받지 못한 엽문도 너무 늦어버렸다. 그 이전에 엽문이 궁이를 만나러 동북지방으로 가겠다는 약속은 너무 늦어버린 채 영영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들의 사랑과 희망은 그렇게 늘 '너무나 늦은' 것이다.
그렇기에 너무나 늦은 약속과 맹세는 빛바랜 사진처럼 낡아가면서 쓰린 추억이 된다. 궁이가 죽고 엽문은 '중생을 아는' 단계, 제자를 받아 영춘권을 전수하며 생을 마감한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다. 일제와 싸우거나 강호의 대의에 목숨을 거는 대신, 무술인으로 살고 무술인과 겨루고 무술인을 배출하는 삶. 엽문이 무표정한 얼굴로 제자들과 예의 기념사진을 찍을 때, 그는 홍콩으로 온 여느 망명객처럼 타지에서 왔다가 홍콩에 정착한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자취를 남긴다. 그것이 그의 삶의 전부다. 자기 삶의 한계를 알고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 홍콩인의 삶.
나는 <엽문>보다 '늦어도 너무 늦은' <일대종사>가 <엽문>보다 낫다고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으려 한다. <일대종사>에는 있지만 <엽문>에는 없는 것, 그건 결국 궁이이고 사랑의 기억이다. 덧없고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다. 꿈을 다루는 영화는 그렇지 않은 영화보다 언제나 더 낫다. (14.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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