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예 12년>은 "이데올로기 안에서 산다는 것이란 무엇인가"를 적확하게 재현한다. 카메라는 고통스런 육체를, 그 얼굴을 주시할 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 안에서 자신을 감추고 타인을 속이는 군상을 드러낸다. 영화는 노예제도는 절대악이기 때문에 붕괴해야 한다는 관점 따위에 속지 않는다. 솔로몬 노섭은 플랫이라는 이름으로 '호명'되면서 노예가 된다. 그가 자유인이라는 어떤 증명도 '노예'라는 호명 앞에서는 무의미하다.
그렇다면 <노예 12년>은 '정의'에 대한 영화일까? 극중 떠돌이 목수는 자유와 평등 같은 보편적인 권리는 흑인과 백인을 가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 말조차 백인에게 허락될 뿐이라는 것을 영화는 감추지 않는다. 솔로몬 노섭을 구하기 위해 온 사람도 백인이다(흑인이 찾아온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랬다간 금세 노예가 될 테니까). 문제는 '누구'의 정의인지 따져묻는 게 아니라 정의와 권리는 보편적이기 때문에 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는 데 있다. 보편성은 곧 불가능성이기 때문에 급진적이다.
영화를 보면서 스필버그의 <링컨>을 떠올렸다. <링컨>은 남북전쟁 말기를 다룬다. 링컨 위인전은 노예제도의 야만성을 공격하고, 자칭 회의주의자는 북부와 남부의 이해관계를 전쟁의 원인으로 지목하곤 한다. 하지만 <노예 12년>을 보면서 노예제 같은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전쟁을 피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예제의 내파(內破)는 전쟁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한편 <링컨>에서 링컨의 시종은 링컨에게 노예제 폐지 이후의 세계가 어떻게 될지 묻는다. 링컨은 이후의 세계는 예상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세계는 미래에 열려 있다고 말할 뿐이다. 자유주의적인 권리의 세계에서, 노예제는 어리석고 불합리하며 야만적인 제도에 불과할 것이다. 혹자는 자본주의 세계가 노예제를 '극복'한 세계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예제는 내파했어도 노예제 이후의 세계가 도래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노예 12년>은 이데올로기의 끈질김을 다룬다. 우리는 과연 "지금은 그때와 달라"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14.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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