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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적 현실주의?

by parallax view 2011. 2. 6.
1. 세계 어딜가나 한줌도 안 되는 좌파판에서, 래디컬로 산다는 데에는 환희와 피로가 동시에 따라온다. 기질로 설명하든 방법론으로 설명하든, '급진'(적)이라는 구호는 매력적이면서 또한 공허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삶의 방식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즉, 삶이 급진적이지 않다면, 래디컬한 그리고 '래디컬'이라는 주장의 급진성은 금세 소멸해 버린다.

2. '대중'은 그 대척점에 현실주의가 있다고 상상하곤 한다(혹은 상상하곤 한다고 나는 가정한다). 여기서 현실주의는 타협의 동의어이다. 적어도 갈등 조정의 온건한 방법들을 포함한다. 그렇다면 급진과 현실주의라는 단어를 조합하면 어떤 개념이 도출될까? 단순한 언어유희, 모순형용에 불과할까? 잘해봐야 사회자유주의나 사회민주주의처럼 특정한 지향과 역사적 한계를 내포하는 레토릭에 불과할까? 급진적 현실주의 역시 하나의 정치적 태도가 될 수 있을까?

3. 그람시는 자코뱅이야말로 현실주의자임을 강조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물러서지 않고 신념을 추구한다는 자세를 이상주의적이라고들 부른다. 그러나 주체가 이상을 현실로 실현시키고자 할 때, 이상주의적 태도라는 반대파의 비난은 성립할 수 없다. 정치는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혁명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 역시 혁명 국면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싸우는 데 불과한 것은 아닐까.

4. 다시 '급진적 현실주의'라는 말로 돌아와 보자. 급진적 현실주의(자)에 가장 잘 들어맞는 이들은 누구일까. 여전히 자코뱅과 그 후계자인 볼셰비키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시대에 급진적 현실주의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볼셰비키 혁명의 반복을 요구하는 것일까? 지젝이 『지젝이 만난 레닌』과 『레닌 리로리드』를 통해 레닌이 하고자 했으나 할 수 없었던 행위를 포착하고 '반복'하자고 '대중'에게 요구하듯이. 

5. 난점은 이 급진적 현실주의라는 말에서 피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혁명에는 반혁명이 따라오며, 반혁명과의 투쟁은 테러라는 수단에 호소할 때 더욱 성공적이라는 통념을 마냥 외면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로, 중국의 부상과 아랍의 혁명 도미노 국면(섣부른 판단일 수 있으나 '민주혁명'의 연쇄 반응은 그 성패에 관계없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은 '제국'의 황혼을 암시하고 있지 않나. 다함께식의 "자본주의는 끝났다. 이제 대안은 무엇인가."(물론 '정답'이 정해져 있긴 하다. 맑스-레닌주의, 그 중에서도 트로츠키주의에서 찾는 '영구적인 대안') 따위의 말은 서투르고 조잡하지만(나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선언'은 나름의 통찰을 품고 있다. 정말로 '자본주의 이후'는 존재하는가?

6. 지구는 '거대한 전환'이 다가오고 있다고 느껴질 만큼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다. 생태적으로나 정치경제적으로나. 그러나 이 전환이 반드시 평화롭거나 혹은 좌파의 기대대로 혁명 국면과 근본적이고 민주적인 변혁으로 나아가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파국과 재앙이 눈앞에 펼쳐질지 모를 일이다(반혁명을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혁명 그 자체가 재앙일테지만). 근대를 돌아보면 혁명은 기근과 전쟁의 손을 잡고 나타났다. '포스트모던'한 세계에서 재앙과 손잡은 혁명은 반복될 것인가? 

7. 또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급진적 현실주의는 반드시 피냄새를 풍겨야만 하는가? 좀 더 급진적이면서도 또한 섬세하게 권력을 재배치할 수는 없을까? 추첨제의 전면적인 시행을 포함한 급진 민주주의 체제, 즉각적이고 조건없는 기본소득 전면 지급, 생산자조합-노동조합-생활협동조합의 네트워크로 구성되는 시장/비시장의 혼합 경제. 엘리너 오스트롬은 합리성의 범위를 확장함으로써 그 개념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둘 때, 공유 자원에 대한 자발적·자생적 자치 조직 연구가 가능할 것으로 가정했다. 마찬가지로 '현실'의 인식 범위를 확장할 때 비로소 급진적 현실주의는 '혁명 전위'가 대중들을 설득하는 데 유효하지 않을까? 

8. 어쩌면 혁명이 다가오고 있을지 모른다. 이런 진단이 맑스-레닌주의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할까? 그렇다면 나는 차라리 레닌없는 사회주의를 요구하고 싶다. 그걸 아나키로 부르든 뭐든 상관없이. 지금 여기서 가능하다면 무엇이든. 급진적 현실주의라는 정치적 태도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조직없는 이념은 공허하다. 잡상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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