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노현 잘라내기가 과연 진보진영의 최선인가?" (프레시안 엄기호)
엄기호의 글은 곽노현에 관한 담론 중에서 가장 원칙적인 대응이다. 한 가지, "보수란 언제나 자기 특정 계층의 이익만을 보호한다. 특수 이익이 곧 그들의 전체 관심사이기 때문에 그들은 보편적 대의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라고 할 때, 보다 정확하게는 보수는 언제나 자신의 특수 이익을 보편적 대의로 환원하고자 한다는 것을 지적해야겠다. 예컨대 '경쟁의 원리'라던가 '부동산 불패 신화' 같은 담론이 드러내는 것은 그에 얽힌 이익과 욕망이 어떻게 국민적으로 보편화되는지 보여준다고 하겠다.
또 엄기호의 글과 달리, '인권'과 '정의'를 자유주의적 권리로 한정짓고, 우리에게 주어진 정의는 부르주아적인 정의일 뿐으로 일축하는 것은 상황을 극단적으로 단순화할 뿐이다. 만약 19세기 말의 사회주의자들이 드레퓌스 공판을 부르주아의 문제로만 규정지었다면, 이후의 사회주의자들은 더 이상 보편적 권리로서의 인권을 이야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를 에밀 졸라와 장 조레스 개개인의 역량으로 환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들에게 드레퓌스와 인권은 프랑스 혁명의 연장선상에 선 것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이 없었다면 사회주의도 없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곽노현은 노무현이나 한명숙보다, 독일 국적을 버리고 귀화해 국내법의 처벌을 받을 것을 강요당한 송두율 교수에 더 가깝다고 하겠다. 그들이 대면한 법적 난점은 다르지만, 그들을 다루는 이른바 '진보진영'의 태도는 동일하다. 진보는 도덕적으로 순결해야 한다고 하는 도덕적 순혈주의의 발현, 더 정확히 말하자면 '희생양'을 거듭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이쯤 되면 <경계도시2>가 진보진영에서 센세이션을 불러왔음에도 불구하고, 진보진영은 거기에서 어떠한 교훈도 얻어내지 못한 것만 같다). 엄기호는 이를 '정치의 도덕화'라고 적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시도해야 하는 것은 그의 말대로 정치의 도덕화가 아닌, '도덕의 정치화'여야 하는 것 아닐까. 무상급식과 곽노현이 서로 얽혀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그들에 대한 지지를 책임감있게 가지고 가는 것. 이를 진영논리와 구분해 내는 섬세함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한다.
프레시안 본문에서 오타를 일부 수정하고, 단락의 제목에 굵게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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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부터 먼저 하자. 처음 뉴스를 봤을 때 맥이 탁 풀렸다. 그리고 짜증이 났다. 선의라니. 이런 순진한 사람이 어떻게 교육감까지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트위터에 "진보는 분열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나이브함 때문에 망한다"는 글을 올렸다.
그 날 저녁 관여하고 있는 인권 단체 사람들과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눴다. 한 명은 분노하면서 당연히 사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다른 한 친구는 그 의견에 반대하며 저들의 프레임에 갇혀서는 안 된다고 했다. 내 생각을 묻는 친구들에게 당연히 사퇴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나마 지금 사퇴해야 서울 시장 선거와 함께하고 그래야 그나마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다른 친구가 우리까지 그를 범법자로 봐야 하냐고 물었고, '아무 생각 없이' 범법자는 아니지만 진보를 살리기 위해서는 '읍참마속'이라고 대답했다. 순간 침묵이 흘렀고 아차 싶었다. 상대방이 매우 실망하고 있다는 느낌이 확 전해졌다. 밤 내내 뭔가 크게 잘못한 것 같다는 생각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음날부터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고 다녔다.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다. 대부분 헷갈려하고 있었다. 과연 2억 원이라는 돈을 '선의'로 준다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누가 나에게도 선의로 2억 원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도, "고객님은 2억 선의의 대상이십니다. 곽노현 팀장"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하면서, 단호하게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 후배는 "나도 빨리 한마디 하고 갈아타야할 텐데" 라고 자조하기도 했다.
대신 이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었다. 한 친구의 말을 빌리면 이렇다. "진보가 참 야박하군요. 어제까지 '우리' 곽 교육감이라며 친분을 과시하더니 하루아침에 저렇게 내치다니." 아이러니하게도 곽노현의 '선의'에 대해서는 믿지 못하지만, 이들이 소위 진보 진영이라고 하는데 기대했던 것은 그 대단한 '도덕적 정당성'도 '정의'도 아니라 '친구/동료에 대한 선의'였다. 그것이 옳건 그르건, 사람살이에서 꼭 있어야 하고, 있기를 바라는 그 '선의' 말이다. 이 '선의'가 실종된 저 대단한 도덕적 정당성에 대한 요구에서 그들은 아무런 도덕성도 느끼지 못하고 야박함만을 느끼고 있었다. "맞는 말이죠, 그래야죠. 하지만…."
대단한 도덕적 정당성이 아니라, 친구를 대하는 '선의'에 대한 소박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부끄러워졌다. '읍참마속'이라고 무심결에 내뱉은 내 말 한마디에 왜 그 친구가 그렇게 싸늘한 반응을 보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진보/좌파에겐 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정당성이 요구된다'는 그 싸늘한 말 한마디를 통해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우리 사회의 도덕적 정당성을 높이는 것이 아니었다. '읍참마속'이라는 그 무심결의 한마디가 잘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지나가는 소나기를 피해야한다는 다급함이었다.
인권 단체에 관여하고 인권의 급진화를 연구한다고 하면서, 정작 구체적인 사건이 벌어졌을 때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 '진영' 보호 논리였다. 이게 인권을 연구한다는 사람이 해야 할 소리인지 뼈저리게 반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그리고 진보신당 등 소위 진보 진영이라고 하는데서 나온 성명서와 사퇴 촉구 논평들을 살펴보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오로지 '권력'에 대한 염려뿐이었다.
때문에 나는 질문의 방향을 180도로 바꾸어야만 했다. 그 전에는 '만약 곽노현 교육감이 거짓을 이야기하는 것이면 어떻게 할 것인가?'가 내 머리를 어지럽혔던 질문이라면 '만약 곽 교육감의 '선의'가 진짜 '선의'였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바뀌었다. 그러자 비로소 인권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보게 되었다. 그를 진보의 대표주자가 아니라 그저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피의자'로 바라보면서 오히려 인권의 시각에서 이 사건을 보게 되었다. 이것은 인권이 말하는 정의란 무엇이고 그것은 어떻게 지켜지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두 번째로 그가 한 행동이 어쨌든 도덕적으로 부당한 행위였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그가 나이브했다고 생각한다. 예수가 마태복음에서 "내가 이제 양을 이리들 가운데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비둘기처럼 순진하고 뱀처럼 슬기로워라"고 말한 것처럼 이리떼 속에서 내던져 있는 우리는 뱀처럼 슬기로워야함에도 가끔 당나귀만도 못하게 멍청하게 굴 때가 많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정말 '선의'에 의해 이 일을 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주장 역시 도덕에 대해 '나이브'하기 그지없는 주장이다. 그래서 아무런 주저함 없이 그 '도덕'에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해버리는 것 역시 '뱀처럼 슬기로운 일'이 아니라 '당나귀처럼 멍청한 일'이다. 정의란 무엇이고 도덕이란 무엇인가? 인권은 이에 대해 무엇을 나에게 가르쳐왔던가?
인권, 만인에 맞선 한 사람의 정의의 가능성
인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추상적인 개념이나 가치가 아니다. 인권이란 구체적인 한 개인이 그것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만인에게 보편적 가치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만인을 위해 한 명을 희생하는 것이 소위 공리주의의 태도라고 한다면 인권의 태도는 정반대이다. 인권이란 내가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바로 그 사람의 존엄과 정의가 지켜져야지만 만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만인과 적대할 수 있는 태도를 말한다.
그렇기에 인권 운동가들이 지난 날 그 쌍욕을 먹어가면서도 흉악범들의 인권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인권 운동가들이 흉악범에게도 인권이 있다고 말을 하면 언제나 절대 다수의 '국민'들은 피해자의 인권은 중요하지 않고 가해자의 인권만 중요하다는 말이냐고 흥분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인권 운동가들은 가해자의 인권을 옹호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인권이 옹호한 것은 가해자가 아니라 정확하게 '피의자'의 인권이다. 5000만 명이 애용하는 네이버의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피의자'란 죄를 범한 혐의로 수사 기관의 수사 대상이 되어 있는 자로서 아직 공소(公訴)가 제기되지 않은 자. 공소가 제기된 뒤의 피고인과 대립되는 개념이라고 한다.
그럼 가해자가 아니라 피의자는 왜 인권의 주체인가? 인권의 핵심에는 존엄이 있다. 인간의 존엄은 양도할 수도 없고, 그 누구에 의해서도 훼손될 수 없는 가치이다. 그렇다며 인간 존엄성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의의 가능성'이다. 증거에 의해서 형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가 주장하는 정의가 가능하다는 것에 문을 열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 바로 인간 존엄의 핵심이다. 따라서 인간 존엄의 핵심은 벌거벗은 개인이 그저 '신성불가침'한 인권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말'이 경청되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법치 국가에서 '무죄 추정의 원리'를 도입하는 것이고, 사형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람의 육체적 생명이 무엇보다 소중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형 제도를 폐지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정의'의 문제 때문이다. 사형은 100만분의 1이라고 하더라도 오판이 일어났을 경우 다시 정의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영구적으로 훼손한다는 것이다.
인권 단체가 그 욕을 먹어가며 사형 제도를 폐지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인간 존엄성의 핵심은 어떤 경우라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는 것이고, 그 '말'이 경청되게 하는 것으로 지켜진다. 그를 통해 '만에 하나'라도 그 말에 정의의 가능성이 있는지를 검토하기 위함이다. 이건 요식 행위가 아니라 인간 존엄성을 존중하는 인권에 기반을 둔 정치 공동체가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핵심적이고 필연적인 장치이다.
지금 곽노현 사건에서 소위 진보 진영이 헌신짝처럼 내던진 것이 바로 곽노현이 주장하고 있는 '정의의 가능성'이다. 그가 말하는 것을 곧이곧대로 다 믿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진짜 문제는 진보 진영이 그가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가 정의로운지 아닌지에 대해 일말의 관심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오로지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서든 빨리 무마해서 다음번 서울 시장 선거에 불똥이 튀지 않게 하는 것에만 몰두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소위 진보 진영의 관심은 인권이나 정의와 같은 '가치'가 아니라 '권력'이다. 도덕적 정당성이니 정의니, '사람에 대한 인연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며 자못 비장하게 내뱉는 말 모두 우리가 이 체제에서 나눠가지고 있는 알량한 권력을 지키거나 아니면 미래에 얻을지도 모른다고 기대되는 권력을 얻기 위함이다. 오로지 진보 진영을 보호해야한다는 것이 '절대 가치'이지 결코 '정의의 가능성'이 인간 존엄성의 핵심을 이룬다는 인권적 시각에 대해서는 눈곱만한 관심도 없다. 이것이 가장 정의롭지 못한 짓이다.
'정의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자, 그가 바로 무고자이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프랑스의 인문학자 르네 지라르의 욥기에 대한 해석이다. 욥은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지만 신의 허락을 받은 사탄의 시험에 들게 된다. 이때 욥의 친구들이 등장하여 욥에게 신이 이유 없이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니 분명히 너에게 죄가 있을 테고 그것을 인정하라고 조언한다. 욥은 끝내 이에 저항한다.
욥이 거부한 것을 지라르는 '희생양'이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욥이 받은 시험의 핵심이 바로 죄가 없더라도 죄를 인정하는 것, 즉 자신의 정의를 주장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은 욥기의 마지막에서 자신에게 대들었던 욥을 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공의를 운운하며 순순히 희생양이 될 것을 강요한 욥의 친구들을 꾸짖으신다. 무고하여 희생양을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악마의 사업이다. 아직 '무고한 자'를 완전한 '죄인'으로 몰아붙이는 자, 이 자들을 놀랍게도 그리스도교에서는 '사탄'이라고 부른다. 반대로 신의 뜻은 단 한 사람의 정의를 세워 희생양 메커니즘을 종식시키는 것이다.
오해하지 말라. 곽노현이 욥처럼 순진하고 정직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전적으로 무고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그에게 잘못이 있는가, 있지 않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의 '잘못으로 추정되는 행위'가 취급되고 있는 지금의 방식이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그를 고발하는 쪽도, 그를 버리려는 쪽도 그의 잘못이 무엇인지, 그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지는 정치적 여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 정치적 여파를 더 확장하여 이익을 꾀하려는 쪽이나, 그 정치적 여파를 차단하여 이익을 꾀하려는 쪽이나, 양쪽 모두 곽노현을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점에서는 똑같다고 볼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정치적 이익'을 위해 누군가를 제물로 바치려는 이 희생양 메커니즘이라는 차원에서 그가 무고하다는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교육 현장에서 이 희생양 메커니즘을 참 많이 봤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왕따이다. 학생들에게 왕따에 대해 물어보면 백이면 백 모두가 다 왕따는 나쁜 것이고 근절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말의 뒤편에 꼭 사족이 붙는다. "근데, 사실 생각해보면 왕따 당하는 것들이 원인 제공을 하기는 해요." 어떤 원인을 제공하는지를 물어보면 대답은 대부분 '느리다', '오타쿠다', '답답하다' 등등의 대답이 나온다.
학생들과 하나하나 차분하게 그 '원인'이라는 것을 파헤쳐 나가보면 특별한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나 지목될 수 있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 그래서 '왕따는 근절되어야 하지만 원인 제공은 그가 했다'는 주장과 '왕따는 무고하다'는 주장은 하늘과 땅 차이가 된다. 전자가 정치의 도덕화라면, 후자는 도덕의 정치화이다. 진보가 주목해야하는 것은 후자이지 전자가 아니다.
진보의 가치는 이 정치를 도덕화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을 파괴하는 것이지, 여기에 기대어 어떤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진보라면 이 사건에서 서울 시장이건 국회의원이건 뭐든 다 내어주더라도 '정의'와 '인권'의 편에 서야 한다. 그것이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진보가 서야할 자리이고, 진보가 죽어야할 자리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민주당뿐만 아니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까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그의 '정의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그를 희생양 삼아 면죄부를 스스로에게 발부하다니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여기 어디에 죄가 확정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정의의 가능성을 버리지 않음으로 그의 존엄을 지켜준다는 인권 의식이 존재하는가? 그가 정의로울 수도 있음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놓음으로써 정의의 반전 가능성을 살려놓으려는 '정의'라는 가치에 대한 세심함 배려가 있는가? 정의란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들어 '사회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양 메커니즘 그 자체를 종식시키는 것이다.
도덕이란 무엇인가?
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것이 바로 '도덕적 정당성'이다. 물론 진보와 보수 사이에는 근원적 차이가 있다. 보수란 언제나 자기 특정 계층의 이익만을 보호한다. 특수 이익이 곧 그들의 전체 관심사이기 때문에 그들은 보편적 대의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진보는 언제나 보편적 대의에 근거하여 움직인다. 그렇기 때문에 우파와 달리 좌파에게는 보다 더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대중들은 기대한다. 따라서 우파의 부패사건과 좌파의 부패 사건에 대해 대중들이 보이는 정서적 반응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진보는 이점에서 늘 억울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겠지만 이게 대전제이다. 이 틀은 감수하고 가는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진보가 고루하게 도덕적 엄숙주의에 물들어 있다는 비판은 비판이 될 수 없다. 그게 진보의 숙명이다.
그러다 보니 이 문제에 대해 '온건하고 신중한' 사람들조차 법적으로 문제가 있는지는 다투어 봐야한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돈 2억 원을 준 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못하고 비난을 받아야한다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다. 그런데 여기서 좀 더 생각해보자. 도덕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만약 곽노현이 진짜 그의 주장처럼 '선의'로 돈을 준 것이라면, (법학 교수인 그가 모를 리 없는 그 행위의 위험함에도 불구하고) 자신과의 단일화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준 그 행위는 오히려 가장 '도덕'적인 행위가 아닌가?
우리 삶과 고전을 돌아보면 도덕과 비도덕의 대립이 아니라 도덕과 도덕이 치열하게 부딪치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그리스 비극에 나오는 안티고네의 이야기이다. 안티고네의 오빠가 주권자인 왕에게 반역을 도모하다 죽임을 당한다. 크레온 왕은 반역자의 시신을 아무도 묻지 못하도록 주권자로서 법을 선포한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오빠의 시신을 묻고 왕에게 끌려와서는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여기에 대한 가장 흔한 해석은 헤겔을 따라 오빠의 시신이 길거리에서 썩는 것을 동생으로서 볼 수 없었던 안티고네는 가족법 혹은 관습법을 대변하고 반역자를 묻지 못하게 한 크레온 왕은 나라의 법을 대표한다는 시각이다. 나라의 법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가족의 윤리를 대표하는 안티코네는 범법자이지만 가족의 법이라는 시각에서 본다면 안티고네는 가장 도덕적인 행위를 한 것이다.
동양에도 이런 이야기는 많다. '도덕의 원조' 공자도 논어에서 양을 훔친 아버지를 관가에 고발하는 아들이 정직한 것인지에 대해 제자들에게 묻는다. 그것이 '정직'이라고 제자들이 말하자 공자는 아니라도 말한다. 공자는 정직이란 '아들이 아버지의 허물을 감싸고, 아버지가 아들의 허물을 감싸는' 그 '사이'에 있다고 말한다. 한비자는 정반대로 이야기한다. 아버지를 고발한 아들을 초나라의 재상이 죽여 버리자 한비자는 이제 이 나라에는 왕에게 진실을 말할 사람이 없다고 한탄한다. 같은 이야기에서 입장에 따라 완전히 정반대의 이야기가 가능하다. 한쪽은 이것이 도덕이라고 말하고, 다른 쪽은 그것은 도덕이 아니라고 말한다.
만약 곽노현이 자신의 주장대로 선의로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도와준 것이라면, 그것은 두 개의 다른 도덕이 부딪치고 있는 것이지, 결코 일방이 도덕이고 다른 쪽이 부도덕인 것이 아님에도,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펴냄)라는 책이 100만 권이나 팔린 나라에서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이 문제를 도덕과 부도덕의 문제로 나눠버리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딜레마적인 상황을 다루면서 꼼꼼하게 정의의 문제에 접근하는 그 책은 도대체 왜 읽은 것인가? 100만 권이나 팔렸다지만 헛방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책만 소비한 셈이다. 도덕에 대한 오로지 단 하나의 입장만이 있는 듯하다.
우리의 무대는 인간이 도덕적 딜레마에 처할 때 그 문제를 해결하거나 조정하는 '제도'이다. 벌써 보수 쪽은 제도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가져가기 위해 이 기회를 적극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한나라당에서는 이 기회에 교육감 직선제를 폐지하려고 한다. 또한 단일화 과정 자체를 불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진보가 진보이기 위해서는 여기에 대해 제도적 해법을 제시해야한다. 프레임을 도덕의 문제에서 제도의 문제로 가져가서 보다 더 공세적인 입장을 취해야함에도 여전히 '도덕' 타령을 하며 한 사람의 정의의 가능성을 지키는데도, 제도적 전망을 내는 것에도 지나치게 무력하다. 오히려 진보야말로 이것이 도덕의 문제가 아닌 제도의 문제라고 공세적으로 치고나가면서 주도권을 가져야하는 것이 아닌가?
진보가 추구해야하는 것은 부딪치는 인간이 도덕적 딜레마에 처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냄으로서 도덕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지 어느 도덕이 우위의 도덕인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선거법 제도로는 좌파든 우파든 언제나 단일화라는 과정을 통과의례처럼 겪지 않을 수 없다.
곽노현이 처한 도덕적 딜레마는 그 개인의 딜레마가 아니라 현재의 선거제도 하에서는 출마하는 모두가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제도가 있을 수 있는가라는 점에 초점이 맞춰져야함에도 좌파건 우파건 모두 다 마치 이게 자신들의 문제가 아닌 것처럼, 개인의 도덕의 문제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에겐 정치와 같은 것은 아예 필요가 없다. 도덕만 있으면 된다. 정치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이런 딜레마적인 상황을 해결하는 제도를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가장 손쉽게 생각할 수 있는 제도가 바로 결선투표제와 같은 것이다. 제도를 이야기해야할 때이다. 정치를 위해 도덕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을 위해 정치가 존재한다.
정치적 책임을 공유한다는 것
인권에서 바라보는 '정의의 가능성'은 '무죄 추정의 원리'와는 조금 다르다. 왜냐하면 인권은 피해자를 보호해야한다는 가장 중요한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피의자 혹은 피고인이라고 하더라도 피해자가 존재하는 한, 피해자를 가해자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예를 들어 문제가 되고 있는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에서 벌어진 성폭력이 대표적이다. 죄가 확정되기 전까지 그 가해자들은 '무죄'로 추정되고 그들이 자신의 '정의'를 호소할 권리가 있다는 점까지는 비슷하다. 그러나 인권은 이 사건이 확정되기 전이라도 피해를 당한 여학생을 보호하는 것이 가장 우선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인권의 시각에서 돌아와 깨달은 것은 곽노현의 문제에서 사건 초기의 나를 포함하여 진보 진영이 자신을 피해자로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진보 진영이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서울 시장 선거를 앞에 두고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곽노현을 가해자로, 진보 진영 전체를 피해자로 놓고 이야기를 풀어가다 보니 우리를 긴급하게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 그에게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정말 곽노현이 가해자이고, 진보 진영이 피해자인가? 이렇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 정당한 일인가? 오히려 나는 이 글을 쓰는 지난 3일 동안 자신을 곽노현에 의한 피해자가 아니라 동료라고 여기는 '평범한' 사람들을 보며 부끄러움을 느꼈다. 누군가는 이것이 동료를 무조건 감싸는 '조폭의 의리'라고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내가 그들에게서 본 것은 자신들의 정치적 선택에 대한 공통의 책임 의식이었다.
교육 운동에 있는 한 선배는 자신은 곽노현을 옹호는 하지 못하겠지만 비도덕적이라고 단죄할 마음도 없다며 그가 35억 원을 토해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적은 액수지만 보탤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 이유는 '내가 그를 뽑았고, 그가 재직하는 지금에도 그만한 재미를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법조계에 있는 다른 한 후배는 만약 곽노현이 선의가 아니었다면 자신을 포함해서 그에 대해 지지를 호소했던 사람들도 함께 돌멩이를 맞아야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지지 요청은 곽노현의 교육 정책뿐만 아니라 곽노현이라는 사람을 믿어달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그가 보기엔 이 사건으로 "곽노현과 본인을 순식간에 분리해서 '전혀 다른 우주에서 살았던 사람인양'' 취급하며 본인이 언제나 중립적이었던 것처럼 말하는 것이야말로 비상식적으로 보인단다.
이건 조폭의 의리가 아니라 '정치적 책임'을 공유하겠다는, 그 동안 한국 사회에서는 너무나 보기 힘들었던 '진짜' 도덕적인 행위가 아닌가? '무조건 단일화'를 외치며 이 사단이 벌어지게 된 가장 큰 배경이 되었으면서 정치적 책임을 나누기는커녕 스스로를 피해자인 것처럼 꾸며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으려는 사람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게 이 사태에서 내가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동시에 희망을 갖는 이유이다. 새로운 정치적 주체들이 생겨나고 있다. 선택과 선택의 결과까지 같이 감수하겠다는 것, 이건 무분별한 감싸기가 아니라 정치의식의 비약적인 성장이다. 여기에 '정치의 도덕화'라는 저들의 프레임을 넘어서는 새로운 힘과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닐까?
/엄기호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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